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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

 

장이지

‘골목’의 발견과 ‘숙녀’의 발명-최하연, 박상수의 시집

 

 

1. 들어가며

최하연과 박상수가 모두 두 번째 시집을 내놓았다. 팅커벨 꽃집과 숙녀의 기분이 그것이다. 일단 두 권 모두 ‘여성 독자를 향한’ 시집처럼 보여서 흥미롭다. 팅커벨 꽃집이 동화적 기표인 ‘팅커벨’을 언급하면서 연애를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든지 숙녀의 기분이 제목에서부터 ‘숙녀’를 내세우며 여성들의 인간관계, 심리에 대해 논하고 있다든지 하는 점은, 이 두 시집의 ‘여성 지향’을 새삼 확인해준다. 물론 이러한 여성 지향은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여성들이 좋아하는 달달한 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고 이들 시집을 손에 든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두 권의 시집은 막상 들춰보면 전혀 다른 질감이다. 그러면서도 두 권의 시집이 익숙한 시의 문법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점에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팅커벨 꽃집의 최하연이 시를 쓰는 과정과 그 좌절(중단)을 연애와 관련지으면서 일종의 메타시를 선보이고 있는 점은 소위 연애와 세계의 운명을 국가와 같은 중간 장치 없이 바로 연결시키는 ‘세카이世界계 상상력’을 연상시킨다. 숙녀의 기분의 박상수가 여성 화자를 내세우면서 소녀들의 속물의식이나 미시권력 차원에 있어서의 관계의 폭력성을 다루는 방식은 만화나 소설의 문법을 떠올리게 한다.

시가 아니라 글짓기를 방불케 하는 작금의 신세대들의 시와는 판이한 작가의식을 두 권의 시집은 갖추고 있다. 이들은 시에 미달하는 방식으로 시를 교란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영역을 파괴하면서 시의 영토를 확장하고 시의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괄목할 만하다.

 

2. 지워지는 세계, ‘골목’이라는 봉합장치

팅커벨 꽃집은 피아노(2007)에 이어지는 최하연의 두 번째 시집이다. “그의 새 시집을 받아든 독자라면 첫 시집에서 마주했던 그로테스크한 절망의 이미지와 궤변에 가깝게 표출되는 사념이 잦아들고, 어떤 인상에 관한 집요한 묘사에 그의 시편들이 상당 부분 할애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수도 있다.”(강동호, 「소멸의 현상학」, p. 99)고 이 시집의 해설자는 쓰고 있다. 대체로 공감할 만한 지적이다.

팅커벨 꽃집을 받아들고 나는 키가 껑충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40대의 최하연을 혼자 떠올렸다. 40대의 키 크고 다정한 피터팬을 떠올렸다. 피아노가 나오고 난 뒤 대학로의 어느 낚지볶음집에서 만나고는, 그 뒤로 서로 연락도 없이 지내오고 말았다. 언젠가 통인동 어디에선가 누가 만났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팅커벨 꽃집은 그 시절의 편린들이 산재해 있어서 그의 근황을 보듯 정겹게 읽었다.

 

언덕에 꽃이 맺혔다

 

골목에 눈이 내렸다

불 켜진 창이 있었다

동그란 것들이 몰려왔다

반쯤 열어놓은 바다가 있었다

두 개의 동그라미가

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동그라미를 지우고 있었다

 

눈이 왔고

꽃이 졌다

―「초사흗날 아침」전문

 

시집 뒤표지에서 최하연은 “골목이 시”라는 말을 했는데, 「초사흗날 아침」만 보아도 골목이 왜 시인지 금세 알 수 있다. 그는 통인동 어느 골목이 내려다보이는 3층집에서 살았고(문인주소록에 의하면), 그 3층집 창가에 기댄 채 하염없이 그 골목을 내려다보았던 것이다. 골목에 눈이 내리고 아침임에도 불켜진 창이 보이고 사람들이 하나둘 길 위에 나타난다. “동그란 것”이란 그러니까 위에서 내려다본 사람의 머리다. 반쯤 열린 창 너머로 두 사람이 서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포개지는 장면도 있다. 눈이 오고 있었고 왠지 눈물이 맺혔다가 떨어져 내린 날의 쓸쓸함이 행간에 켜켜이 쌓여 있다.

골목은 그러한 모든 것을 노래한다. 그에 반하여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그는 시집 뒤표지에 썼다. ‘나’는 “전파망원경이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아스팔트 위로 별이 흩어질까”라고 말하고는 웃는 남자다. 보이는 대로 말하는 천진한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겸허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겸사에 그치는 것일까. 그의 시는 편편이 슬픔에 잠기고 위기를 고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지우다/지워지다, 무너지다, 떨어지다, 닳아지다’와 같은 세계의 소멸, 파괴, 실추와 관련된 용언들이 자주 반복된다.

 

손가락을 들어

선 하나를 지웠더니

크레인이 무너졌다

귀퉁이를 접자

거대한 돌멩이가 굴러왔다

(중략)

지워진 선을 따라 물이 차기 시작했다

성 안토니오 미사곡을 들으며

물속 세계를 묵상했다

선 하나를 지웠더니

옥인동 기왓장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선 하나를 지웠더니

―「도화지」부분

 

도화지에 그렸던 그림들을 지워나간다. 선이 하나 지워질 때마다 도화지 속 세계는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여지없이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폭우」, 「호우」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집에는 ‘호우’의 이미지들이 자주 나오고, 그것은 부정적인 현상이다. “고무공”도 “의자”도 “아메리카 젖소”(「나니오시떼루」)도 떠내려가게 하지만, 아마도 더 소중한 것들마저 이 차오르는 물은 떠내려 보낼 것이다. 차오르는 물은 「도화지」에서 직접 “눈물”과 이어져 있다. 이 “눈물”은 종말해버린 세계에 혼자 남겨져 있음을 깨달은 자의 눈물이다. 옥인동 기왓장 위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은 붉어진 눈이며, 동시에 끝장나버린 세계의 폐허에서도 그는 여전히 살아남아 고독한 시간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고지하는 신의 계시기도 하다(그러나 어쩌면 이 ‘태양’ 때문에 아직 완전히 끝장나버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세계는 어째서 그렇게 지워지고 무너지고 떨어지고 떠내려가고 닳아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연애의 실패 양상과도 유사하다. 「두 시 방향에 적기 출현」을 위시한 시집 3부의 시들이 ‘너’ 혹은 ‘그녀’에 대한 기억들을 곱씹고 있다는 것은, 이 시집 전체를 연시, 혹은 연애의 실패에 바쳐진 노래로 읽게 한다.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너/그녀’는 서서히 잊혀 간다. ‘너/그녀’는 ‘거니?’(「거니,」)라고 하는 말투로만 남는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모습도 목소리도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너/그녀’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질수록 세계도 빛을 잃어간다. “우리는 어울리지 않았다.”(「안식일의 정오」), 혹은 “우리의 난간도 무너져 내렸다.”(「이렛날 자정」)라고 그는 ‘우리’의 결별에 대해 쓴다.

연인들의 결별 이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 시집의 대답은 ‘시간’이다. “태양은 늙은 복서처럼 달렸다.”(「안식일의 정오」) 그것은 아주 느리게 혹은 아주 힘겹게 시간이 흐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또 시간은 쥐며느리의 이동처럼 한없이 더디다. 시적 화자는 쥐며느리의 더딘 이동을 지켜보다가 잠이 들곤 한다(「쥐며느리의 시간」). 이 시집에는 유난히 날짜를 헤아리는 듯한 제목의 시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적 화자는 날짜를 헤아리고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무위한 일상이 계속된다.

그 와중에 그는 ‘쓴다’. 정확히는 쓰다가 중단하고 다른 일을 한다. “이렇게 쓰고는/그녀 옆에 모로 누웠다.”(「이렛날 자정」), “이렇게 쓰고는 물을 끓였다.”(「여드렛날 아침」) 하는 식이다. 그의 시상은 자주 난파한다(「난파선」). 사방에서 전화기가 울리고 새들이 날아다니고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면 시상이 가라앉은 다음이다. ‘화원’은 계속 지워진다(이 시집에는 네 편의 「지워지는 화원」 연작이 있음). 그러니까 이 시집은 이러한 실패의 기록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실패가 완전히 실패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실패는 이 ‘지워지는’ 세계에 불쑥 뛰어드는 물상들에 의해 봉합된다. “이렇게 쓰고는 물을 끓였다” 다음에는 “깊고 차가운 물속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의 차 마시는 시간이 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시간 너머 문득 창문 밖 골목을 보면 “눈을 꾹 감은 고양이가/두 발을 모은 채/노랗게 앉아 있었다”(「지워지는 화원 1」)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옥인동 기왓장 위로는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도화지」). 그것을 최하연은 새삼 발견해낸다.

골목은 언제나 소란스럽고 새들은 그칠 새 없이 3층의 창문을 스치고 날아다닌다. 그러나 가끔 골목은 예기치 않은 장면들로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킨다. 팅커벨 꽃집은 이렇게 팅커벨과 무관한 지점에서 ‘골목’을 발견해내고 생의 절망들을 ‘골목’으로 하여금 봉합케 하는 더딘 시간의 기록으로 읽힌다.

 

3. 공모共謀의 감각, 속물 숙녀들의 익숙한 표정

숙녀의 기분은 후르츠 캔디 버스(2006)에 이어지는 박상수의 두 번째 시집이다. 분홍색 표지에 알록달록한 사탕과 마법의 알약, 마음의 상처에 붙이는(?) 반창고 등이 정말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다. ‘시인의 말’은 더 멋지다. “가시엉겅퀴즙/머리카락/바비 립 에센스/죽은 토끼/코코넛 파우더//샤라랑/샤라랑” 이것은 무언가 변신소녀만화에 나올 법한 주문이다. 오시마 유미코大島弓子 소녀만화의 팬인 이누도 잇신犬童一心의 「메종 드 히미코」(2005)에도 “피키 피키 핏키”라고 하는 변신의 주문이 나오지만, 남자 시인의 시집에 이런 비장의 주문이 나오다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이와 같은 변신의 주문을 박상수가 시집의 머리말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이 시집이 결국 숙녀가 되고 싶은 소녀의 이야기, 미성숙에 관한 이야기임을 미리 고지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간신히 참을 정도의 음식, 을 씹으며 나는 구름 스탠드를 켜고 치즈를 사러 가요 버찌술을 살짝 넣은, 스위트피 언덕에서 세모로 잘라 먹고만 싶은 치즈

―「학생식당」부분

 

잠도 없이 꿈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네요 내 운명이 침묵하라면 그래야겠죠? 살짝 데운 우유에 생긴 뜨거운 막 같은 것, 방금 그런 게 먹고 싶어졌어요

 

핑크색 헬륨 풍선을 좋아하고 크리스피크림도넛을 아끼고, 몰라요 대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죠?

―「로맨티시즘」부분

 

이 시집에는 일련의 팬시화한 어휘들의 목록이 눈에 띈다. 소녀취향이 질료로서 발현된 것이 이 목록들인 셈이다. 어쩌면 박상수는 심층이 표층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구조주의적 발상을 이 팬시화한 어휘들을 통해 전복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집에서 이 소녀취향의 질료들은 더 이상 소재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으로 부상한다.

숙녀의 기분에는 독자들이 알아내야 할 비밀이 언어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표면에 이미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구조주의자의 ‘초월적 시각’은 이 시집을 읽는 데 그리 쓸모가 없다. 「사춘기」라는 시는 ‘사춘기’가 으레 그러려니 하는 관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쉽게 질리는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다. ‘쉽게 질리는 스타일’이란 어떤 것인지 이 시는 술에 취한 한 못난 남성과 그를 경멸의 눈으로 보고 있는 여성 화자로 극화하여 보여준다. 「교생, 실습」은 또 어떤가. 거기에는 아직 정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육체적으로는 성숙한 여제자와, 학생이면서 선생이기도 한 중간적 존재로서의 교생 사이에 개재한 미묘한 긴장감이 그려져 있다. 그것 역시 감춰진 이야기라기보다 교생 실습에 관한 막연한 로맨스라고 할 수 없을까.

그러니까 이야기의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독자들은 이 시집에 나오는 콩트와도 같은 ‘상황’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공모共謀의 감각’일 것이다. “넌 조금 더 제멋대로 걸어도 되는 거야”라고 선배는 후배를 격려하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격려의 진실성은 조금 의심스럽다. 「좀 아는 사이」의 화자는 “우린 얕보이는 게 싫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닐까”라며, 인간관계의 속물성을 고백한다. 그녀의 진심은 겉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비밀블로그’에 쓰인 말 속에 있다. 그것은 비밀이지만, 독자들은 그 비밀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표리부동한 속물이리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맞장구를 쳤을지 모르겠다.

박상수는 학교를 배경으로 교수-제자, 선배-후배, 기 입학생-편입생 사이의 위계를 미시권력의 차원에서 잘 그려내고 있다. 그가 그려내는 ‘학교’는 학원공포영화처럼 무서운 세계다. 귀신은 나오지 않지만 거기에는 항상 따돌림과 소외, 미시권력에 의한 착취가 존재한다. 그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우스꽝스럽게 폭로한다. 우리가 이 미시권력의 그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쉽게 파시즘에 공모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숙녀의 기분은 그런 질문을 하게 하기도 한다.

박상수는 그동안 소설적 주제에 속했던 속물들의 세계를 시의 영역에 성공적으로 옮겨왔다. 그의 시를 소설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그의 ‘주인공’들은 부정적인 인물들로 형상화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평범한 인물들이며, 그들의 속물적인 의식은 그들이 ‘약자’이기 때문에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리라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지, 시인은 그것을 티 나게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상황’들을 보여줄 뿐이며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오픈 엔딩처럼 상황은 언제나 열려 있다.

 

어디 남의 학교에 와서 나대? 너의 하녀들이 미친듯이 침을 퍼부어댈 것 같았지 너는 다 가졌는데 네 걸 하나 가져온다고 뭐가 그리 야단일까 세상 제일 바닥인 애가 눈뜨고 지걸 뺏긴 애라면 너는 오늘 처음으로 바닥을 한 번 본 건데

 

피식,

 

네가 쪼갠 뒤에야

 

그랬구나

갑자기 알아버렸지

―「편입생」부분

 

숙녀의 기분에서 그는 소설의 세계보다는 확실히 더 과장된 표현을 택하고 있다. 미시권력의 차원에서 친구들 집단의 서열을 “하녀”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리얼리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단적인 표현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만화에서 컷의 분할과 배치가 긴장감을 만들어내듯이 박상수는 ‘1행 1연’을 적절히 배치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웃다’가 아니라 “쪼개다”라는 학생들의 언어를 가감 없이 활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감각은 웹툰이나 트위터 식 어법, 인터넷 게시판의 유머 등과도 친연성이 있다. 숙녀의 기분은 개인적으로 십수 년간 보아온 시들 중에서 가장 웃기고 재미있는 시집이다. 시의 영역 파괴나 진화라는 면에서 이 시집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박상수는 로맨티시즘적인 시인으로 분류되어왔다. 숙녀의 기분은 그 제목이라든지 시집의 겉치레가 여전히 어떤 종류의 로맨티시즘을 환기한다. 그러나 숙녀의 기분은 로맨티시즘의 궤도를 상당히 벗어난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웃어보지 못했다. 이 시집이 자아내는 웃음은 다분히 차가운 웃음이다. 숙녀의 ‘기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박상수는 여성들의 낯익은 세계를 통해 공감대를 만들어냈지만, 한편으로는 의도치 않게 ‘여성 혐오’라는 사회학적 주제와 만나고 있다. 그의 여성 화자는 이 여성 혐오라는 주제의 위험성을 뚫고 그녀만의 전위성을 입증해야 하는 숙제를 한편으로는 안고 있다.

 

4. 나오며

시가 좌초된 지점에서 최하연은 ‘골목’을 새롭게 ‘발견’한다. 컴퓨터 모니터(혹은 원고지) 앞을 떠나서 그는 일상의 풍경들에 새삼 시선을 돌린다. 책을 덮고 세상을 연다.

한편 박상수는 시의 폐허에서 속물들의 세계를 ‘발명’한다. 그 속물들은 바로 ‘우리’지만, 박상수의 시는 있었던 일을 재현한다기보다는 ‘발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 속물도감적인 다채로운 양상들은 우리의 예상을 크게 빗나가는 것은 아니며, 바로 그 점을 무기로 삼아 독자와의 공모를 꾀한다.

두 시인은 이제 두 번째 여행을 끝낸 셈이다. 그들의 세 번째 여행이 벌써 기대된다. 컴퓨터 모니터(혹은 원고지)와 골목 풍경 사이에서 날짜를 헤아리고 있던 남자는 골목을 벗어나 조금 더 먼 풍경에 이를 수 있을까. 혹은 다시 컴퓨터 모니터(혹은 원고지)와의 절대적인 싸움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학교를 배경으로 속물들의 세계를 발명하고 여성 화자를 내세운 남자는 자신의 세계의 이면, 여성 혐오라는 주제와 어떻게 맞설 것인가. 혹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잊어버렸던 억압의 순간들을 어떻게 다시 의외적인 장면으로 복권시킬 것인가.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연구서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 번역서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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