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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권(69호-72호)
2019.06.26 09:57

71호/신작시/이병초/적벽강 가는 길 외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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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호/신작시/이병초/적벽강 가는 길 외1편


적벽강 가는 길 외1편


이병초



 산길인가 싶으면
  바다가 가깝게 다가왔고
  파도소리를 끼고 걷는다 싶으면
  다시 산길이었다

 

잡목들 사이로 퀴퀴한 짐승털 냄새가 풍겨오기도 했다 사람 발자국을 물고 있는 풀이 허리를 펴면 새소리가 반짝일 것 같았다 칡넝쿨이 하늘을 가린 대숲을 지나다보면 군인들이 철수한 초소가 있었고 소망을 적어 철조망에 매단 패들이 갈매기소리에 몸이 들리기도 했다 느린 걸음을 재촉하듯 길은 앞을 툭 털어내며 바다를 보여주었고 이내 바다를 꼴깍 삼켜버렸다 

 

  파도소리는 멧방석만 한 홍어가 잡혔다는 시절을
  짭쪼롬하게 실어오고, 하섬까지
  바닷길이 열린다는 오늘을
  절벽에 바짝 붙였다
  바위에 산산이 부서져 물러섰다가
  순식간에 밀려와 다시 부서져 튀는 파도는
  절벽 오목한 데마다 쏠릴 것이고
  바위 그늘에서 놀래미 숭어 배를 따다
  비린내 묻은 손으로
  내 귓바퀴를 잡아당길 가시내가
  맨발로 달려올 것 같았다
  거대한 바위들이 몸을 눕히고
  숨소리를 잇댄 십여 리
  석양이면 바위가 붉게 빛난다는 얘기를 타고
  파도는 선사시대에 감기고 있었다
  수십만 년 씻어냈어도 되레
  더 검어진, 사람다운 세상을 못 이루어
  천근만근 검어진 역사가
  내일이란 글씨를 뒤적거리며
  석양을 파도소리처럼 구워먹을 것이었다

 

저녁놀이 바다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밀물인지 썰물인지도 모르고 붉게 반짝이는 잔물결로 검붉은 바위를 쓸어댔다 바다는 몸을 자꾸 뒤집으며 주먹만 한 해를 품에 떨어뜨리고 저녁놀에 피칠된 적벽강을 갈매기 둬 마리가 쪼아먹었다 집에 가기 싫은 잔물결소리가 반짝반짝 종이배처럼 접히기도 했다
                         
덧글 : ‘적벽강’은 전라북도 부안군 고사포 해수욕장과 격포항 사이에 있다.





나비야 나비



내 기억은 달랐다 서까래 같은 구렁이가 담 밑에 나오면서부터 집안이 쫄딱 망했다고들 했지만 그것은 고모들 기억일 뿐이었다 내 삶의 테두리를 불길하게 파고든 것은 구렁이가 아니라 고양이였다 나비야, 하고 부르면 녀석은 다가와 등을 굴렸다 내 손등을 핥아먹는 나비의 혀와 입술은 부드러웠다 새끼 티를 벗으면서 나비는 쥐를 잡기 시작했다 광이나 마루 밑에서 쥐를 물고 나오는 날이면 나비 밥그릇에 유난히 비린 것이 많았다


나비는 언제부턴가 식구들의 말을 안 탔다 밤낮 끼고돈 게 탈이었다 정이란 받으면 받을수록 더 허기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비는 안방에 똥오줌을 내갈기다 못해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쥐를 물어다놓곤 했다 군불 지피려고 아궁이 앞에 앉으면 불쑥 튀어나와 사람 혼을 빼놓기 일쑤였고 부엌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비린 반찬이 밥상에 올려지자마자 낼름 핥아먹고 달아나버리곤 했다 누구도 이런 나비를 예뻐할 리 없었다 나비는 골칫거리였다 닭장 옆 살구나무에 묶어두고 싶었지만 식구들 손에 잡힐 나비가 아니었다.


그런 나비가 잡혔다 길수 아제가 광에서 산태미를 들고 나오는 데 쥐를 입에 문 나비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아제는 산태미를 던져 나비를 덮쳤다 아제는 나비의 목을 누르고 있는 괭이자루를 내게 맡기고 나일론 끈을 나비의 목에 걸었다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나비 등을 쥐고 살구나무로 가더니 옆으로 뻗은 굵은 가지에 나비를 목매달아버렸다 나비는 캑캑대며 공중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헛발질을 했다 그러나 나일론 끈은 질겼다


나비는 이제 죽을 것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비의 몸은 아래로 축 처져버렸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식구들은 나비를 잊어먹고 내일 시장에 내갈 고구마순을 다발 짓고 있었다 그때 지독하게 젖에 굶주린 애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우리 집에 웬 애기 울음소리냐? 식구들이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 살구나무에 매달려 죽은 줄 알았던 나비가 마당에서 날뛰고 있었다 제 목을 조이던 나일론 끈을 풀어내느라고 죽을똥 쌌는지 눈에서 푸른 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식구를 노려보는 푸른 불빛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밤을 지지고 있었다 괴기스런 울음소리로 집안을 물어뜯고 있었다 나비는 밤하늘이 찢어지게 두어 번 길게 울더니 담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집에 다시 흉한 일이 생긴 것은 여기서부터였다 살구나무가 말라비틀어졌고 아버지는 벌이는 장사마다 때려 엎었으며 우리 집은 셋방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깟 고양이 한 마리가 집안을 절단 낼 수는 없었다 집안이 쫄딱 망해버린 딴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는 나비의 안부가 궁금했다 내 이름에 겹쳐지는 허기를 벗고 인간 밖으로 튀어나간 나비야 나비





*이병초 1998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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