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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권(65호-68호)
2018.12.19 19:06

68호/신작시/최정란/상추도둑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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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최정란



상추도둑 외 1편


1.
겁이 많은 나는 웃기만 하네
상추는 커녕
잉크를 쏟은 듯 길가에 지천으로 핀
수레국화 한 송이 훔칠 용기도 없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아
자꾸 웃음 속으로, 숨네
이 밭은 예상에 없던 풍경
예상에 없던 장물을 에코백에 받아 담으며
예상에 없던 웃음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어, 웃네
준비된 장물애비처럼, 웃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배를 잡고, 웃네
상춧잎 같은 표정으로 푸릇푸릇
고백하건데 이번 삶은
웃음으로 얼버무린 날들이 많다네
겁이 많다는 것 들키고 싶지 않아
늘 웃음이 먼저 들킨다네


2.
해바라기 핀 묘지로 가는 길  
여자들이 상추를 훔치네
무엇보다 여자들은 묘지로 가는 길
걸리면 국제사법재판소 행일 거야
상추 몇 포기에 법정에 선다면
레미제라블의 기나긴 시간이 시작될까
여자들이 손잡고 가는 길
무서울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 날의 태양을 오롯이 기억하는
해바라기는 어디에 피어 있을까


3.
몇 번이고 거듭해서 웃음소리를, 찍네
상추밭을 배경으로
묘지의 담을 넘는 덩굴장미를 배경으로
찬란한 죽음을 배경으로 
무모하게 클로즈업되는 웃음소리가, 찍히네
아무 것도 훔치지 못하는 죽음이
고요히 누워,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오후
오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워하지도 못하는
머나먼 묘지에서
해바라기 대신 상추를 만나듯
무언가 만나, 사건이 되고 농담이 되네


4.
수확이 끝난 상추밭을 가득 채운
소리만 요란한 웃음    
들키고 들켜서 더 들킬 것도 없는
웃음은 어느 묘지의 장물일까
마지막 훔칠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일 듯
마음의 일만 평 푸른 상추밭,
통째로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
마음의 겉잎 한 장 훔치지 못해 안달하던 날이
아득한 천 년 전 같네
상추를 훔치는 오후의 여자들과 한 패가 되어
무덤으로 걸어가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생의 농담도 무용담도 에피소드도 모두 묻힌
무덤으로 걸어가네

    * 고흐의 무덤이 자리한  오베르 쉬르 우와즈.



삶을 해약 할 수는 없어,


보험을 해약해요
해약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약해요
파란 하늘도 해약하고
아직 봉오리인 꽃도 해약해요
변치 않고 기다리겠다는 밀약도 해약해요

손 내밀어 아쉬운 소리 할 관계들은 파기 된지 오래
다들 어찌 사나 몰라, 궁금해도
궁금해 할 수도 없어
보험을 해약해요

오늘 닥친 위험 앞에서 내일 닥칠 위험은 
뒤로 물러서야 해요
오늘을 담보로 내일을 준비하라는 말은 잊어요

한 번 해약하시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보험회사 직원의 만류는 낮고 단호하지만,
한 번 해약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보험 뿐만은 아니어서

혹시 마음 바뀌면 어떻게 안 될까요,
능청스런 농담은 이럴 때 하라고 있지만
알아요, 마음 바뀔 일 없다는 것
보험회사 직원도 나도, 알아요
한 번 해약한 보험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인생을 해약하는 것보다는
보험을 해약하는 것이 손쉬워요
전화 한 통화면 되거든요

지나간 오 년의 불입을 파기하는데
다가올 오십 년의 보장을 파기하는데
오 분이면 되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단순하고 깔끔한 해약이라니
이 절차는 미학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해요

가슴을 쓸어내려요 정말 어쩔 뻔 했어요
해약 절차가 복잡했으면 정말 어쩔 뻔 했어요
삶을 담보로
남은 시간을 간편하게 불입하라는
유혹이 수시로 날아오는데
내일 대신 오늘을 선택 하는 나를 용서하기로 해요

삶에 입주할 때 쓴 계약서는 없어
삶을 해약할 계약은 처음부터 없어
없는 계약은 해지 할 수도 없어 얼마나 다행이에요

삶을 해약할 수는 없어 보험을 해약해요
복잡한 일도 귀찮지만
무엇보다 계약에 없는 일은 질색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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