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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권(73호-76호)
2019.07.14 16:48

73호/책·크리틱/안성덕/이야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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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책·크리틱/안성덕/이야기의 힘


이야기의 힘
-배아라 시집 『떠도는 잠』


안성덕



꼴깍꼴깍 침을 삼키며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이야기.
“옛날 옛적 어느 고을에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마음씨 착하고 우애 좋은 형제가 살았더란다”로 시작하여 “잘 먹고 잘 살았단다”로 끝나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혹부리 영감’으로 이어졌다. 우리들은 도깨비 이야기에 간이 콩알만 해졌다. 긴 겨울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오줌보를 움켜쥐고 어쩔 줄 몰랐다.
‘우연히 도깨비를 만난 혹부리영감이 무서워 노래를 불렀다. 혹에서 노래가 나온다는 말에 도깨비들이 많은 재물을 주고 혹을 샀고, 혹부리영감은 혹도 떼고 큰 부자가 되었다.’는 대목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웃마을 다른 혹부리영감이 도깨비를 찾아가 노래를 하자, 한 번 속은 적 있던 도깨비들이 오히려 혹을 붙여주는 바람에 혹만 하나 더 달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암만 흘렀어도 또렷이 기억된다.
이야기가 어찌 우리에게만 있을 텐가. 왕비의 부정을 목격한 ‘샤리야르’ 왕은 여자들에 대한 불신으로 잔인한 복수를 시작한다. 매일 밤 젊은 처녀를 불러 잠자리를 같이하고 다음날 죽여 버린다. 나라 안에 왕을 향한 분노가 가득하게 되자 대신의 딸 ‘세헤라자데’가 나선다. 왕과의 첫날밤, 그녀는 왕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절정 부분에서 “다음 이야기는 내일 밤에……”라며 말을 멈춘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왕은 ‘세헤라자데’를 죽이지 못하고, 목숨을 담보로 한 그녀의 이야기는 천일(1001)일 동안 계속된다. 다양한 인생사, 끝없는 꿈과 로맨스, 변화무쌍한 모험과 환상, 경이로운 마법의 이야기를 펼쳐 왕을 매혹시킨다. 결국 ‘샤리야르’ 왕의 악행은 끝난다. ‘세헤라자데’는 왕비가 되고 나라는 태평성대를 맞는다.
동서고금 이야기에 끌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야기 속에 결코 단순할 수 없는 우리네 인생의 여러 유형이 들어있기 때문이리라. 이야기는 재미있고 더 오래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이리라.


콩알 같은 장대비가 밤새 뒷산을 쓸어내렸지.
황톳물 콸콸 토해내며 도랑물은 떠 밀려갔지.
5학년 언니가 바짓가랑이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겁먹은 2학년 동생 업고 징검다리 건넜지. 


아버지가 장에 가서 사다 주신 검정고무신이
물살에 떠밀려 두둥실 떠내려갔지.
동생을 건네 놓고 뛰어갔지만 고무신은 보이지 않았어.
고무신, 내 고무신, 도랑물 소리도 쿵쾅대며 귓전을 때렸지.


계절이 바뀌고 친구 따라 아랫마을 다녀오는 길이었지.
이끼 낀 고무신 한 짝이 나무뿌리를 움켜잡고 있었어.
키가 훌쩍 자란 나 짠한 가슴으로 검정고무신 바라보았지.
빛바랜 검정고무신 한 번 쓰다듬고 다시 띄워 보냈어.


                                                    ―「검정고무신」전문


동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5학년 언니가 바짓가랑이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겁먹은 2학년 동생 업고 징검다리 건”넌다. “콩알 같은 장대비가 밤새 뒷산을 쓸어 내려” 도랑물이 불었다. 불어난 도랑물에 “아버지가 장에 가서 사다주신 검정고무신이” “떠내려갔”다. 검정고무신이 왜 벗겨졌을까? 그랬다, 그땐 그랬다. 오래 신기려고 발 치수보다 큰 고무신을 사다 주셨을 테다. “동생을 건네 놓고 뛰어갔지만” 보이지 않는 고무신. 아버지께 호되게 야단을 맞을 게 뻔해 “고무신, 내 고무신, 도랑물 소리도 쿵쾅대며 귓전을 때렸”을 테다. 세월이 흐른 후 화자는 “이끼 낀 고무신 한 짝이 나무뿌리를 움켜잡고 있”는 것을 본다. “키가 훌쩍 자란 나 짠한 가슴으로 검정고무신 바라”본다. “빛바랜 검정고무신 한 번 쓰다듬고” 띄워 보낸다. 화자가 검정고무신을 띄워 보내며 유년을 끄집어낸다.


조릿대는 빗방울을 불러 밤새 수다를 떤다.
외양간에서 황소 밤새도록 우웅우웅 숨죽여 울고,
소리 없는 상처가 가는 달을 밤새도록 묶어두었지.
대쪽처럼 살라는 소리가 또르륵또르륵 굴러왔지.
신작로 내겠다며 땅을 내놓으라는 동네사람들
처마 밑 장작더미들도 밤새도록 잠 못 이루었지.
밤새 황소가 우웅우웅 울 때마다 한 더미씩 쌓여만 갔지.
조릿대 숲 달팽이가 그 소리 야금야금 파먹었지.


                                                          ―「황소」 전문


3, 40년 전쯤 농경사회에서 아버지와 황소의 위상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한 집안의 상징이었다. “신작로 내겠다며 땅을 내놓으라”고 “동네사람들” 아우성이 “조릿대”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잠 못 들게 한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금싸라기 같은 전답을 내놓으라니, 아버지가 “밤새도록 잠 못 이루”는 건 당연지사 아니랴. “외양간에서 황소 밤새도록 우웅우웅 숨죽여”운다. 억장이 무너진 황소가 속병이 들었다. 우황 든 것이다. “밤새 황소가 우웅우웅 울 때마다 한 더미씩 쌓여”가는 건 장작더미가 아니라 아버지의 한숨이었을 테다. ‘신작로’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던 시절, 세월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던 우리들의 아버지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텃밭에는 거두지 못한 토마토 애호박이 늙은 지 오래다.
손길을 기다렸을 녀석들 얼굴엔 시름 깊어 검버섯이 핀다.
옥수숫대는 앙상해졌고 수염은 그으려 새까맣게 변했다.
잎을 한 장도 떼어내지 못한 담배는 선 채로 연기가 난다.
지켜보던 단호박은 애가 타서 단내를 풍기며 가슴을 연다.
수숫대는 짜리몽이 되어 쭈그리고 앉아 비를 맞는다.
심줄이 불거진 오이는 담벼락을 붙잡고 낮잠을 청한다.


그 여름, 구남매의 밥줄이던 호미를 내려놓으신 채 단내 나던 아버지의 한숨이 파란 하늘에 빨래처럼 걸려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불거진 아버지의 팔뚝 힘줄 속으로 둥글둥글 굴러다니며 깔깔거렸다.


                                              ―「폭염 텃밭의 풍경」 전문


아버지의 부재(심정적 부재일 수도)다. “장에 가서 검정고무신을” “사다주”시던(「검정고무신」) 산 같던 그 아버지가 그만 “구남매의 밥줄이던 호미를 내려놓으신” 거다. 웬일인지 “아버지의 한숨이 파란 하늘에 빨래처럼 걸려있다.” “텃밭에는 거두지 못한 토마토 애호박이 늙은 지 오래”고, “옥수숫대는 앙상해졌”다. “잎을 한 장도 떼어내지 못한 담배는 선 채로 연기가 난다.” 뻑 뻑, 삶이 무거운 아버지가 줄담배를 태우신다. “지켜보던 단호박”, 아니 자식들은 “애가 타” 한없이 웅크려 “짜리몽이 되어 쭈그리고 앉아 비를 맞는다.” 화자는 그때를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하지만, 가장의 부재는 말 그대로 청천벽력이었을 테다. 외면하고만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심줄이 불거진 오이”처럼 “담벼락을 붙잡고 낮잠” 속 남의 이야기 하듯 딴전피우는 것 아니랴.


바람은 참나무에 술래를 두고 소나무 자작나무 찔레넝쿨 너머 멀리멀리 숨으러 간다. 영길이 바람은 코 찔리기 바람 남선이 바람은 찰남새 바람 봉주 바람은 봉주르르 바람 희주 바람은 희쭈그리 바람 승자 바람은 똘똘이바람 점숙이 바람은 찡찡이바람 명희바람은 맹맹이바람 코 찔찔이 바람이 고지박에 걸려 넘어져 술래가 된다.
(중략)
찰남 찰남 찰남새 바람 오리나무 등 뒤로 숨었다 키다리 봉주르르 바람 한 바퀴 재주 넘고 바스락대는 칡넝쿨에 엉덩이를 밀어 넣고 숨었다. 똘똘이 바람은 고지박 뒤로 숨었다. 찡찡이 바람은 산초나무 가지에 걸려 나동그라졌다. 희쭈구리 바람이 희죽희죽 웃다가 술래가 된다.
 

                                                      ―「술래잡기」 부분


 ‘세헤라자데’가 천일일 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듯, 화자가 긴 이야기를 이어간다. 빛바랜 흑백사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절정에서 “다음 이야기는 내일 밤에……”, 말을 멈춘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샤리야르’처럼 우리들은 다음 대목이 궁금하다. “그녀는 밤새 소쿠리에 물 퍼 담”(「여백」)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밤새 물을 퍼 담는다고 구멍 숭숭 뚫린 소쿠리에 물이 고일 리 만무하다. “바람은 참나무에 술래를 두고 소나무 자작나무 찔레넝쿨 너머 멀리멀리 숨으러 간다. 영길이 바람은 코 찔리기 바람 남선이 바람은 찰남새 바람 봉주 바람은 봉주르르 바람 희주 바람은 희쭈그리 바람 승자 바람은 똘똘이바람 점숙이 바람은 찡찡이바람 명희바람은 맹맹이바람 코 찔찔이 바람이 고지박에 걸려 넘어져 술래가 된다.”며 화자가 천일 밤(千一夜) 그 숨 가쁜 물푸기를 계속한다. 


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 한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에서 보았듯이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수십 년 이내에 현존하는 직업의 반 이상이 로봇과 인공지능에게 넘어간다고 한다. 인간의 영역이 날이 갈수록 좁아진다. 그럼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 우스개 같지만 이제 로봇과 인공지능이 할 줄 모르는 일을 해야 한다. 로봇과 인공지능은 놀이를 모른다고 한다. 놀이의 핵심은 무엇인가? 무엇에 혹하여 아이들은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하는 걸까? 바로 재미다.
예전처럼 시가 읽히지 않는 시대다. ‘시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 우려의 소리가 크다. 왜 전처럼 시가 읽히지 않는 걸까? 필요 이상으로 난해한 시, 사변적 진술에 그치고 마는 시, 말초신경이나 건드리다 마는 신파조 사랑타령 등등, 이유는 많고 많다. 시도 재미있으면 멀어졌던 독자가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주관적인 진술이 아니라 객관적 공감을 획득해야 한다. 재미와 공감을 획득해야한다. 그래야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이어가는 아니 끝내는 ‘샤리야르’ 왕의 사랑을 얻게 된 ‘세헤라자데’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배아라 시인의 『떠도는 잠』에는 이야기가 있다. 스토리만 있는 게 아니라 플롯이 있다. 도깨비에게 혹도 떼고 돈도 얻은 혹부리영감의 재치가 숨어있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취해 또 내일 밤을 기다리는 ‘샤리야르’ 왕처럼 우리를 기다리게 한다. 공감하게 한다. 시중유화詩中有畵, 소동파가 왕유의 시를 평하며 말했듯이 시 속에 그림이 있다. “붓꽃”을 꺾어 그가 “풍경화를 그린다.”(「붓꽃이 흔들리는 이유」).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 「가을, 하얀 도화지」에 이야기를 펼쳐놓아 구경하는 재미가 크다.
너나없이 밥술이나 뜬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시던 할머니의 말씀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추억의 가난이야 얼마든지 좋지 않겠는가마는.





*안성덕 200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몸붓』, 『달달한 쓴맛』. 《아라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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