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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고전읽기/권순긍/“한 푼어치도 안 되는, 이 한심한 양반들아!”, 『양반전』


“한 푼어치도 안 되는, 이 한심한 양반들아!”, 『양반전』


권순긍



지식인의 변절사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정부에서 정책을 결정하거나 대규모 사업을 진행하고자 할 때 상식적인 여론과는 관계없이 소위 전문가라는 학자들이 나와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누가 보아도 아닌 일을 가지고 전문적인 용어를 동원해 가며 당연한 듯이 몰아붙이는 어용학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양반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에 분노했던 연암燕巖이 떠오른다. 우리는 역사의 어느 한 국면에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이용해 권력에 아부했던 지식인의 변절사를 어렵지 않게 목도하게 된다.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이광수李光洙(1892~1950)가 그랬고, 지금은 흉물이 된 금강산댐 건설과 이명박 정권 시절에 4대강 사업이 그러지 않았는가. 박근혜 정부에서 강행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가 그렇다. 역사학자들 90%가 반대하는데 그들을 좌파로 몰고 학생들에게 소위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겠다며 집필진의 명단도 공개하지 않고 국정화를 밀어 붙인다. 역사를 정권의 입맛대로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이 과연 역사의 엄중한 심판을 어찌할 것인가. 바로 몇 년 뒤면 거짓으로 판가름 날 것을.(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청산 1호로 한국사 국정화 시도는 부당하다고 폐기처분 되는 운명을 맞았다.)
제목도 심상치 않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연암 박지원朴趾源(1735~1805)이 20대 전후 젊은 시절에 쓴 한문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소설집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젊은 시절에 하인이나 문지기 등을 불러다 시정의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이다. 여기에는 저 유명한 『양반전兩班傳』을 비롯하여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김신선전金神仙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등 이른바 ‘9편의 전九傳’이 실려 있다. 연암의 아들인 박종채朴宗采(1780~1835)가 쓴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모두 스무 살 남짓 때 지으신 것으로 이 중 마지막 두 편은 잃어버리고 지금 일곱 편만 남았는데, 이 가운데 『예덕선생전』, 『광문자전』, 『양반전』 등 세 작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니 9편 가운데서도 이 세 작품이 특히 많이 읽히고 논란거리가 되었던 셈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장난삼아 지은 것처럼 보이므로, 식견이 없는 자는 우스갯소리로 지은 글로만 알고, 식견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얼굴을 찡그렸다”고 할 정도로 신랄한 풍자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老論의 명문대가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문장에 이름을 떨쳤던 연암이 예정된 출세의 길인 과거를 포기하고 자신이 속한 양반층을 비난하는 이런 불온한(!) 글들을 지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특히 9편의 전 중에서도 『역학대도전』과 『봉산학자전』은 연암의 「자서自序」와 제목으로 추정해 보건대 ‘유학의 도를 훔쳐 헛된 명예를 얻는 양반’이나 ‘공부하지 않았지만 양반보다 더욱 도道를 실천하는 농부’를 형상화 한 작품으로 아마도 내용이 너무 지나쳐 누군가에 의해서 없애버린 탓에 현재 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연암은 왜 이렇게 양반사회에 대한 독설을 쏟아냈을까? 『과정록』을 보면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말과 의론이 엄정하셨다. 세상의 겉으로만 근엄하고 속으로는 나약한 자나, 권력의 부침에 따라 아첨하는 자들을 보면 용인하지 못하셨으니 이 때문에 평생 남의 노여움을 사고 비방을 받는 일이 아주 많았다.”하여 “젊은 적부터 세상의 벗 사귐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을 보고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세태가 가관인 것을 미워하여 일찍이 아홉 편의 전九傳을 지어 기록하셨고 왕왕 우스갯소리를 드러내기도 하셨다.”고 한다. 양반들이 세상에 아부하는 형편없는 작태들을 미워한 셈인데, 어찌해서 지조와 권위의 상징인 양반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양반계층의 분화와 양반들의 생존 방식
역사적으로 보면 북인北人이 대거 몰락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남인南人이 대대적으로 숙청됐던 숙종 때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1680년)을 거치면서 양반들은 계층 분화를 거듭 하면서 세습적 특수집권층인 소수의 벌열閥閱과 영구 몰락한 실권층인 대다수의 사士로 양극화되었다. 소수의 벌열들이 주요 벼슬자리를 독식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사는 신분은 높으나 실질적으로 서민보다 못한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전』에 보이는 가난한 선비가 바로 그들의 실상이다.
중소토지소유자로 비교적 풍족하게 생계를 이어가며 양반가풍을 유지하는 삼남지방의 사士들과 달리 특히 서울 및 근기近畿지방의 사들은 원래부터 벼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탓에 한번 몰락하면 생계대책이 막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가기 위해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어찌 할 방도 없이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경우다. 대부분의 사들이 이렇게 살아가야 했다. 『양반전』에 정선 양반으로 등장하고 첫 번째 양반증서에 형상화된 양반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의 생계대책은 막연하여 급기야 그 ‘고귀한’ 양반신분을 팔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청구야담靑邱野談』에 「관가의 환곡을 갚고 부자가 양반을 샀다輸官租 富民買兩班」라는 제목으로 『양반전』과 비슷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지만 그러한 일이 있었기에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는 세도가에 붙어 출세의 길을 도모하는 경우다. 사는 위로는 왕이나 귀족들과도 교유할 수 있고 아래로는 농공상農工商에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세도가와 연결되면 얼마든지 출세의 길이 주어지기 때문에 이를 위해 온갖 아첨과 부정적인 작태가 이루어짐은 당연한 일이다. 연암이 증오한 것이 바로 이렇게 지조를 버리고 이익과 권세를 탐하는 무리들이었다. 두 번째 양반증서에 형상화 된 양반들이 바로 이런 양반의 부류였다.
연암이 선배인 홍대용洪大容(1731~1783)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제가 평생토록 교유한 범위가 넓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격과 처지를 살펴 그저 웬만한 사람은 모두 친구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명예를 좇고 세력에 빌붙는 경향이 없지 않기 때문에 눈에 뵈는 것은 친구가 아니요 오직 명예, 이익, 권세뿐입니다.”라고 그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셋째는 양심적인 사로서 ‘실학’을 통하여 농공상農工商의 이익을 대변하고 체제나 제도의 개선을 주장하는 이른바 ‘실학자’로서의 길이다. 연암 자신이 바로 그런 노선을 택한 셈이다. 집안을 배경으로 벼슬길로 나가는, 기득권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사로서의 주체의식을 인식하여 평생 저술에 매달려 농공상에게 이익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연암은 “사가 올바른 공부를 하면 그 혜택이 사해에 미치고, 그 공덕이 만세에 드리우지만 실천적 학문을 하지 않으면 농공상이 모두 실업하게 되는 결과를 빚는다.”고 하여 “모름지기 사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만물에 혜택을 줄 수 있는 실학을 탐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제3의 길’에 대한 대안이 있기에 권세와 이익을 탐하는 당시 양반들의 곡학아세曲學阿世를 비판하고 풍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는 9편의 전은 이처럼 대부분 양반계층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9편의 전은 완연한 단편소설의 형식을 갖춘 『양반전』으로부터 전형적인 전傳의 형태인 『우상전』까지 다채로운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전傳 곧 전기傳記는 봉건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빼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기리기 위한 한문학의 양식이다. 하지만 연암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서민은 사대부가 아니기에 이런 전의 규범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들 미천한 서민들이 입전立傳 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왜곡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왜곡의 과정,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의 간극에서 풍자가 드러난다. 연암은 당대 서민들의 발랄한 삶을 전통적인 방식의 전에 담으려는 과정을 통해 이미 형식의 파격을 예상했었고 그런 부조화를 통해 양반들을 비난하고 풍자하고자 했던 것이다. 9편의 전이 대부분 양반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제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양반전』이다.
『양반전』은 자서自序에서 밝힌 것처럼 “권세와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현달해도 ‘사’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고, 곤궁해도 ‘사’의 지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절名節을 닦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가문을 상품으로 삼아 남에게 팔았으니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리오.士廼天爵。士心爲志。其志如何。弗謀勢利。達不離士。窮不失士。不飭名節。徒貨門地。酤鬻世德。商賈何異。於是述兩班”라 하여 겉으로는 양반 신분을 팔아버린 것에서 촉발하여 양반계층의 각성을 촉구하는 데로 나아가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총체적이고 통렬한 풍자가 이루어진다.
『양반전』은 표면적으로는 가난하여 환곡을 갚을 수 없는 양반이 군수의 기지로 환곡도 갚고 양반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내용은 이렇다. 정선에 독서를 좋아하는 한 양반이 살았는데 평생을 공부하느라 돈을 벌지 못해 관가의 환곡을 꾸어다 먹은 것이 해마다 쌓여 천 석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이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며 그 양반을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마침 동네의 천민 부자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양반의 지위를 사면 좋겠다고 가족들과 상의하여 쌀 천 석을 관가에 갚아주고 양반의 지위를 사게 되었다. 그런데 군수가 이 사실을 알고 뭔가 증명이 필요하다고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른바 ‘양반증서’를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천민 부자가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힘든 조건만 내세운 것이었으며, 뭔가 ‘이익’이 있도록 다시 만든 두 번째 양반증서도 특권만 잔뜩 나열하여 ‘도둑’과 다를 바 없는 기가 막힌 것이었다. 천민 부자는 머리를 흔들며 양반이 되기를 거부하고 평생토록 양반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한다. 결국 천민 부자는 쌀 천 석만 헛되이 낭비했고, 양반은 환곡을 다 갚고도 양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
『양반전』의 전체 줄거리는 가난한 양반이 지위를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군수의 기지로 양반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지만 속뜻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와 속뜻이 서로 충돌하는 셈이다.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양반의 지위를 고수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체적인 세부묘사를 통해 양반이라는 인간들이 얼마나 쓸모없고 뻔뻔한 존재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밀린 환곡을 갚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린 지위’인 양반의 지위를 판다고 하는 설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환곡을 갚을 방도는 내놓지 않고 “밤낮으로 울기만 하자” 그 아내는 “당신은 평생 글 읽기만 좋아하더니 관가의 환곡을 갚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구료. 쯧쯧, 양반, 양반 하지만 한 푼어치도 안 되는걸咄兩班。兩班不直一錢” 이라며 혀를 차며 빈정대기에 이른다. 아내의 양반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신랄하다. 양반의 지위는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상황을 설정해서 그 양반이란 지위가 사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될 정도로 얼마나 쓸 데가 없나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서민 부자는 양반이 대단한 거라고 가족들과 이렇게 얘기한다.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존귀하게 대접받고, 나는 아무리 부자라도 비천하지 않느냐. 말도 못 타고, 양반만 보면 굽신굽신 두려워 떨어야 하고, 엉금엉금 기어가서 뜰아래 엎드려 절을 하는데 코를 땅에 박고 무릎으로 기는 등 우리는 늘 이런 수모를 받으며 산다.


정선 양반의 처지와는 반대로 서민 부자가 생각하는 양반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결국 서민 부자는 쌀 천석(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3억 5천만 원 정도)을 주고 그 대단한 양반의 지위를 사기에 이른다. 돈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는 권력과 명예를 누려보려고 한 것이다. 요즘도 돈을 벌면 정치를 하려고 하는 것처럼.


‘양반매매증서’에 나타난 양반의 실상과 허상
하지만 서민 부자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첫 번째 양반매매증서부터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양반은 대단할 거라 기대했는데 껍데기만 남은 꾀죄죄한 양반의 실상이 등장한다. 양반이 지켜야 할 별 볼일 없는 관행을 열거하는 가운데 깐깐한 듯하면서 실상은 헛된 명분에 사로잡혀 시대에 뒤떨어진 양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더러운 일을 딱 끊어 버리고, 옛것을 본받고 뜻을 고상하게 할 것이며, 늘 오경五更(새벽 3시~5시)만 되면 일어나 황에 불을 당겨 등잔을 켜고서 눈은 가만히 코끝을 내려다보며, 발꿈치를 궁둥이에 모으고 『동래박의東萊博義』를 얼음 위에 박 밀 듯이 줄줄 외워야 한다.”는 식이다. 그 증서에는 양반들이 지켜야 할 행실이 등장하는데, 그 사항을 열거하면 이렇다.
주림을 참고 추위를 견딜 것. 입으로 가난하다고 얘기하지 말 것. 세수할 때 주먹을 비비지 말 것. 양치질해서 입내를 내지 말 것. 손에 돈을 만지지 말 것. 쌀값을 묻지 말 것.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 것. 맨상투 바람으로 밥을 먹지 말 것. 국을 먼저 먹지 말 것. 국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가 나게 마시지 말 것. 젓가락으로 방아를 찧지 말 것. 생파를 먹지 말 것(냄새가 나니). 막걸리를 마신 다음 수염을 쭉 빨지 말 것. 담배를 필 때 볼우물이 파이게 하지 말 것. 화난다고 아내를 두들기지 말 것. 성난다고 그릇을 내던지지 말 것. 아이들에게 주먹질 하지 말 것. 종들을 “죽어라”고 야단치지 말 것. 마소를 꾸짖되 판 주인을 욕하지 말 것. 아파도 무당을 부르지 말 것. 제사지낼 때 중을 불러다 재齋를 올리지 말 것. 추워도 화로에 곁불을 쬐지 말 것. 말할 때 이빨 사이로 침을 뱉지 말 것. 소 잡는 일을 하지 말 것. 도박을 하지 말 것 등이다.
대부분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닌데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 “이와 같은 모든 품행이 양반의 지위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증서를 가지고 관가에 나와 변정할 것이다.” 했으니 이야말로 그 자체가 이미 풍자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을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양반의 지위를 들먹이니 이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닌가.
오죽했으면 서민 부자가 “양반이 신선 같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렇다면 너무 재미가 없다.”고 했을까? 부자는 양반이 대단한 줄 알고 천 석이나 되는 쌀을 주고 양반지위를 샀지만 온통 하지 말라는 금지사항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모습은 정선의 양반과 일치하는데 이런 쓸 데 없는 것을 신봉하는 양반에 대해 부인의 입을 통해 ‘한 푼어치도 안 되는不直一錢’ 양반이라고 풍자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매매증서를 고쳐 이익이 되게 만든 것이 두 번째 양반매매증서다. 여기에는 당시 그릇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뻔뻔한 양반의 모습이 등장한다. “문과의 홍패紅牌(붉은 장지에 쓴 과거 합격증)는 백물이 구비되어 있어 그야말로 돈자루錢之橐”라거나, 진사 급제 후 음관蔭官(과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집안문벌을 따라 벼슬을 내리는 것)이 되어 나가더라도 온갖 사치를 행할 수 있고, 심지어 가난한 양반으로 시골에 묻혀 있어도 양반신분을 이용해 이웃 소를 끌어다 자기 땅을 먼저 갈게 하고 마을의 일꾼을 잡아다 자기 논의 김을 매게 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하도 기가 막혀 천민 부자는 문서를 중지시키며 “장차 나를 도둑놈으로 만들 작정이오.將使我爲盜耶”라고 소리를 지르기에 이른다. 당시의 특권을 남용하던 양반이 도둑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참으로 통렬한 풍자가 아닐 수 없다.
말하자면 양반이란 것은 ‘한 푼 어치도 안 되거나’ 심지어 ‘도둑놈’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연암의 풍자는 한 마디 말로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방식이다. 연암이 글쓰기 방식을 설명한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이란 글에서 “진실로 한마디의 말로도 요령을 잡게 되면 적의 아성으로 질풍같이 돌격하는 것과 같고, 한 조각의 말로써도 핵심을 찌른다면 북이 세 번 울리자 적의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과 같다.”고 한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연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긍정적인 인물인 서민 부자를 조우하게 된다. 처음에는 돈을 가지고 양반의 명예와 특권을 누릴 요량으로 쌀 천석을 주고 그 지위를 샀지만, 그것이 ‘도둑놈’과 다를 바 없는 일임을 깨닫고 일거에 거절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와 건강한 여항인들의 삶
연암 박지원은 당대 명문가인 반남潘南 박씨로 조부인 박필균朴弼均(1685~1760)이 영조 즉위 후 정계에 진출, 노론에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 집안으로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 벌열의 일원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속한 양반계층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과 풍자를 가해댔다. 이는 마치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가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은 “귀족사회의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슬퍼하는 비가悲歌이며, 몰락하는 귀족들의 행태를 그릴 때만큼 그의 풍자가 신랄하고 그의 아이러니가 통렬한 적이 없었다.”고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가 「발자크론」에서 역설한 바와 유사하다. 이른바 ‘리얼리즘의 위대한 승리’인 셈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 어디에 있을까?
연암은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 서소문 밖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태어나 종로의 백탑白塔(지금의 파고다 공원)과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조계사 옆 우정국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에 서울의 활발한 도시적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다. 당시 18세기 서울은 가구 수가 무려 4만호를 넘을 정도로(당시가 대가족 중심인 것을 고려하여 가구당 10명씩만 잡아도 무려 40만 명이 넘는 인구다.)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고, 연암이 살던 종로는 이현梨峴, 칠패七牌(지금의 남대문시장)와 더불어 ‘3대 시장’으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이 때문에 연암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北學派 혹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실학적 경향도 이런 도시의 움직임 속에서 배태되어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유통의 확대 내지는 기술적 혁신으로 인한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시킬 것을 주장하게 된다. 상공업의 장려와 유통의 확대, 시장의 발달을 통해 도시 서민층의 시민적 생활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주력했던 셈이다.
연암이 당시 하찮게 여겼던 ‘패사소품稗史小品’인 소설과 산문을 통해 도시의 활발한 움직임과 인간 군상들을 기막히게 그려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도시의 움직임 속에서 긍정적인 시정인市井人 혹은 여항인閭巷人들은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양반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반면 오히려 여항인들은 역사의 주역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갔다. 『양반전』의 천부는 쌀 천석을 주고 산 양반의 지위를 ‘도둑놈’같다며 당당히 거절하고 자신의 원래 자리를 돌아갔으며, 『마장전』의 세 친구는 소위 마음은 없고 예의만 따지는 ‘군자의 사귐’은 않겠다고 다짐한다. 『예덕선생전』의 엄행수는 “이익을 독점해도 의롭지 못하거나 아무리 탐다무득貪多務得해도 양보할 줄 모른다거나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노동의 신성함과 더불어 여기서 비롯된 이윤추구를 긍정하기 때문이다.
연암은 양반과는 신분상 차이가 나는 여항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들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통해 거꾸로 양반을 풍자케 한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양반전』의 천부나 『예덕선생전』의 엄행수처럼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주역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흥부전』의 놀부와는 정반대로 자본의 긍정적인 힘을 보여준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중세 신분제사회가 무너지고 근대 자본주의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여항인들을 서구처럼 ‘시민bourgeois’으로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당시 18세기 조선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할 정도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적 모습의 단초를 보인 인물로 주목할 수는 있다. 작품에서의 활약은 미약하지만 중세의 무거운 빗장을 열고 근대로 나아가려는 인물로 주목할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연암이 『방경각외전』에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양반사회를 풍자케 한 것은 이들 여항인들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활발한 동태 속에서 역사의 발전방향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암은 상공업자도 중인도 아니다. 하지만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면서 여항인들의 움직임을 주목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 연암은 “슬프다 잃어버린 예법을 찾으려면 여항에서 구해야 할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들이 어쩌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암은 이들의 생활자세와 가치관 속에서 새로운 역사의 움직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연암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예실구야禮失求野’가 바로 그것이다.
연암은 글을 “장난으로 쓴다以文爲戱”고 했다. 그만큼 그의 글은 세상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가득하다. 연암은 이런 통렬한 풍자를 통하여 무너져가는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던 것이다. 연암의 말처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이루어 내는 방도를 이들 여항인에게서 찾은 것이다.





*권순긍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저서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2011, 공저), 『한국문학과 로컬리티』등. 평론집 『역사와 문학적 진실』. 고전소설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채봉감별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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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5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단편/엄광용/나무와 결혼한 남자 부관리자 2019.07.14 221
3524 제19권(73호-76호) 73호/장편연재5/김현숙/흐린 강 저편5/지평선 부관리자 2019.07.14 245
3523 제19권(73호-76호) 73호/미니서사/김혜정/녹나무 부관리자 2019.07.02 283
3522 제19권(73호-76호) 73호/미니서사/박금산/매일 매일 '퍽 큐!' 하기 부관리자 2019.07.02 263
3521 제19권(73호-76호) 73호/신인상/우중화/연애를 모르시네요, 벌님 외 4편 부관리자 2019.07.02 286
3520 제19권(73호-76호) 73호/고창수의 영역시/김다솜/백화산, 구수천 트레킹 부관리자 2019.07.02 227
3519 제19권(73호-76호) 73호/고창수의 영역시/박일/봉재산에 오르면·1 부관리자 2019.07.02 285
3518 제19권(73호-76호) 73호/고창수의 영역시/박찬선/갈퀴 The Rake 부관리자 2019.07.02 280
3517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채움/난독의 시간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2 255
3516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임인택/손금과 바다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2 292
3515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김형로/이 차숙 씨가 한 일 자 쓰는 법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2 242
3514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최은별/그냥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1 250
3513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김령/봄비 내리는 사이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1 234
3512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최자원/환희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1 239
3511 제19권(73호-76호) 73호/신작시/유계자/오래오래오래 외 1편 부관리자 2019.07.01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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