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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권(73호-76호)
2020.01.15 09:51

76호/신작시/박선경/몽타주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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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시/박선경/몽타주 외 1편


박선경


몽타주

―저녁



어둠 속에서 너의 얼굴을 그린다
검은 먹으로 잘 빚은 네가
어둠 안에 있다
깎아낸 검은 얼굴에 눈을 그리고
눈동자를 그리기 위해 어둠은 집중한다


햇살을 등진 너의 얼굴


풍경은 헤메이듯 너를 좇는다
등진 너의 얼굴이 집요해진다
웃기도
울기도 하던 목소리
먹빛은 너의 얼굴을 뚫고
뒷모습을 새겨 넣은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
너는 아주 먼 먹빛으로 깊어진다
너는 아주 먼 곳으로 어두워진다





나비



라일락이 필 때쯤 눈앞에 일렁이는 나만 알던 비포장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오르막 언덕길이 끝날 때쯤이면 붉은 벽돌이 아닌 반질한 은빛 돌로 쌓아 올린 집 동네에서 가장 신식이라던 양식 건물 질척이던 바닥엔 어느새 시멘트 도로가 펼쳐지고 그동안 달려온 모든 풍경을 지우고 어느새 내 앞엔 초록색 양철 대문 집 플라스틱 미제 나비 핀을 꽂은 소녀,
가슴이 두근거릴 때면 라일락이 피고 기억은 냄새를 맡는다 대문 안에 어둠 속 낮고 음습한 곳에 엎디어 있던 도사견 흙 묻은 손을 닦아내고 누르던 초인종 소리 낡은 금성사 세계 전집 사이 단 한 장의 삽화처럼 너도밤나무 위에 숨은 아이의 표정으로 수없이 펼쳐보던 페이지의 그림 한 장처럼 오래도록 바라보던 소녀의 방 플라스틱 냄새 가득한 디즈니 동화책 요정들의 호박 마차는 과연 잘 달릴까 황홀한 기억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꽃잎이 바람을 따라 나뭇잎으로 물들고 하얗게 흔들리던 눈발이 되도록 나는 지치도록 흔들 그네 위에 앉아 있다 초록의 잔디 위 발가락을 간지럽히던 소녀의 흰 맨발을 본다 물방울무늬 수영복 나비 핀을 꽂은 소녀는 우산을 쓴 채 햇살을 등에 지고 웃고 있다 소녀의 표정이 검게 지워져 있다 빛 냄새 기억 자꾸만 교차되며 생겨나는 초록 양철 대문을 열고 나는 그토록 문 앞에서 문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은 초록의 대문 앞을 여전히 서성이는 이유,


가파르던 길엔 어느새 반질반질한 은빛 돌석이 펼쳐지고 그동안 하나씩 지워진 풍경 안으로 나비 핀을 꽂은 소녀, 그녀가 일주문 앞에 서 있다 미제 나비 핀 대신 나비처럼 모은 두 손으로 합장하는 동안 나는 언덕 아래를 올라온 나의 맨발이 부끄러워 쉬 가라앉지 않던 호흡 그녀의 방에선 나무 냄새가 났다 라일락도 호박 마차도 흔들 그네도 나는 오래된 책의 한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와 나 사이 단 한 장의 삽화 너도밤나무 사이에 올라온 작은 아이처럼,





*박선경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사물의 겹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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