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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권(73호-76호)
2020.01.20 11:30

76호/신작단편/김종옥/다리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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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호/신작단편/김종옥/다리 위에서


김종옥


다리 위에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다리 밑은 괜찮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가 보는 곳에 비가 내리니까, 온 세상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보는 것은 비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이, 가능한 한 자기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들이 우산을 접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 몰랐다.
세찬 비를 맞으면서도 강물 위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터보트가 계속해서 오고 갔다. 보트의 측면에는 눈에 띄는 주황색으로 칠해진 구명튜브가 붙어 있었고, 같은 색깔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갑판에 선 채 곤란한 듯한, 아니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전기에 입을 댄 사람은 아예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서, 몇 분이나 몇 시간 뒤라 해도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땅에서는 유난히 희게 보이는 셔츠를 입은 경찰들이 강둑 앞으로 나오려는 사람들을 막아섰다. 사람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목소리를 낮췄다. 뒷줄에 있던 호기심 강한 몇몇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앞사람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뭡니까? 여자예요? 남자예요? 늙었나요? 젊었나요?
만일 나였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것 중 아무것도 아니라고. 죽은 자는 그저 죽은 자일뿐이다. 영원히.
강의 중심부를 향해 정확한 간격으로 늘어선 다리 기둥들은 어딘가로 통하는 문의 문설주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 문들을 전부 다 통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갈수록 좁아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리 위로 전철이 지나갔다. 레일의 이음매를 쇠로 된 바퀴가 지나가면서 반복되는 큰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그치자 갑자기 주위가 고요해졌다. 빗소리도 모터 소리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묵은 사람들이 펼친 우산들처럼 얼굴이 없었다.
무서워? 물론 무섭지. 문이 잠기는 소리를 확실히 들었나? 어떤 문?
나는 빈손을 들어 눈앞에 펼쳐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산을 접지 않았다. 마치 그 조그마한 우산이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 믿는 것처럼.


거대한 아치 형태의 푸른색 철골이 다리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리의 입구부터 끝까지, 아치 형태를 반복하며 물결 치듯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치 놀이기구의 레일처럼. 그러나 열차는 그 아래를 달렸다. 빛으로 가득 찬 길죽한 직사각형 형태의 운송기구. 아무도 그 안에서 웃거나 소리지르지 않았다. 때로 아주 선명하게 그들 하나하나의 표정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때로 그들이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다리를 쉽게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들이 즐거워 질 리도 행복해 질 리도 없다. 왜냐하면 열차는 놀이기구 같은 아치형태의 철골 아래를 달리기 때문이다.
놀이 기구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인지 다람쥐통이다.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인 위로 다람쥐통이 굴러간다. 다람쥐통도 빙글빙글 돈다.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기 때문에, 다람쥐통을 따라 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 처음처럼. 도는 건 사람이 아니라, 다람쥐통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바닥으로 자꾸만 떨어지는 동전들이었다. 다람쥐통이 멈추기 전까지 그것을 주울 수가 없다. 아슬아슬하게 주울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팔을 뻗어, 처음에 내 주머니에 있었지만 이제 마치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듯 머리 위에 저 혼자 떠 있는 동전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움켜쥐려 해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동전은 내 손가락 아주 가까이에 있다. 빙글. 다시 한번. 빙글. 만일 영원히 다람쥐통이 멈추지 않는다면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이 결국에는 멈출 것이기 때문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동전들을 보면서 웃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놀이는 언제나 끝나야 한다. 하지만 모든 끝나는 일들이 놀이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은 아주 위험하다. 모든 인생이 즐거운 여행이고, 소풍일 수는 없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생각이고,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생각이다. 또한 진짜 소풍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의 생각이다. 그렇게 보자면 인생에는 아무 보편성이 없다. 모든 인생은 각각 다르다.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만 여기에 이를 수 있다.
난간에 바짝 붙은, 바닥에 그려진 흰색 동그라미. 그것은 그가 밟았던 지상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동그라미는 물론 그 후에 그려졌다. 흔들면 딸가닥 딸가닥 소리가 나는 흰색 래커로. 치이익 소리와 함께 동그라미를 친다. 완벽한 동그라미일 필요는 없다. 어떤 사실을, 또 어떤 사물을 그대로 그릴 필요는 없다. 그래도 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니까. 마치 화장실 문에 붙어 있는 남녀의 픽토그램처럼. 그 정도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를 치워버린다. 과연 그걸로 충분할까? 정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응. 충분해. 괜찮아.
나는 입을 다문다. 괜히 난간에 손을 올려본다. 차가웠다. 그래도 다시 뭔가 얘기해본다.
날씨가 추워졌어.
이번에는 한 호흡 정도 사이가 있었다.
그건 날씨와 상관없이 차가운 거야. 바람이 세차게 부니까. 강이 바람의 거대한 통로인 거야.
그렇군. 바람이 심해. 난 그냥 저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소용돌이인 줄 알았어.
물론 그것도 있지. 하지만 가만히 느껴보면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구별할 수 있어.
오래 있었어?
여기에?
응.
글쎄, 잘 모르겠어. 아무리 오래 있었다 해도 짧은 거겠지.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그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오래 있어도 짧은 시간이다. 자꾸 어리석은 질문만 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다리 위는 환했다. 마치 무대 위 같다. 또 한 대 열차가 지나갔다. 아직 막차가 끊길 시간도 되지 않았다. 나는 다리 건너편 도시의 불빛을 보았다. 불빛 너머로 한 줄기 선으로 이어진 산등성이의 검은 실루엣이 도시를 지켜보고 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이편과 저편이었지만, 차이는 있었다. 더 환한 편이 있었고, 건물들의 높이도 미묘하게 달랐다.

저기 저 높은 건물 보여?
그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준다.
저기에 아버지의 집이 있어.
아버지의 집? 네 집은 아니고?
좀 복잡해.
부자인가 봐.
응. 저기 저 번쩍거리는 붉은 등 보여? 저걸 충돌방지등이라고 불러. 비행기나 헬리콥터 등이 밤에 건물을 보지 못하고 충돌할까 봐 저렇게 매일 밤 쉼 없이 번쩍거리는 거지. 한 번 저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는데, 밤새 창문으로 저 빛이 새어들어 와 번쩍거리더라고. 잠을 설치다가 문득 눈을 떴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왜 창문 밖에서 자꾸 붉은빛이 번쩍거리지. 조금 있다 그게 충돌방지등이란 걸 알았어. 근데 그걸 알고 나서도 무서움은 가시지 않았지. 마치 이 세계 전체에 저렇게 붉은 등이 번쩍거리는 것 같았어. 마치 비상등처럼. 마치 당장 이 세계를 벗어나라고. 도망치라고 하는 것 같았어.
그럼 나는 적절히 탈출한 건가?
그런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금방 내 말이 실수인지 알았다. 죽음이 어떻게 탈출이 될 수 있겠는가?
왜 죽었지?
그는 나를 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난간을 향해 조금 움직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태어남에 이유가 없는 것처럼, 죽음에도 이유가 없어. 때때로 죽음 뒤에 다시 태어남이 따르는 거야.
그건 그냥 하는 말이지.
그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있었다. 참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봐.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고.
산 자의 말은 모두 거짓이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잘 안됐어. 몇 개는 괜찮았는데, 몇 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어. 사실 이제 생각하면 감당한다는 게, 그런 게 아니었는데. 감당한다느니, 못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그것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사는 게 지옥이 되는 거지. 왜냐하면 …….
왜냐하면?
글쎄,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고통을 피해야지.
그래, 고통을 피해야지. 너무 많이 사랑하지 말고.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잘못이겠어.
그게 잘못이 되기도 해.
그건 무엇을 사랑하느냐의 문제겠지.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문제가 안 돼.
너도 아버지였나?
그런 건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는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나도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난간을 향해 한발 더 다가갔다. 그리고 난간 틀에 발을 걸치고 올라섰다. 나는 그냥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난간 밖으로 떨어트렸다. 강물에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들릴 만큼 커다란 무언가는 아니었다. 다리 위는 시끄러웠다. 나도 난간 틀에 발을 걸치고 올라섰다.
뭘 떨어트렸지?
지갑.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괜찮아?
별로. 참 이상하네. 고작 지갑일 뿐인데, 이렇게 마음이 아프네.
뭐가 들었는데?
그냥 일반적인 거.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회원카드, 돈 얼마, 영수증. 또…….
사진은?
그래, 사진도…… 사진 때문일까?
나는 화제를 바꿨다.
우와. 생각보다 강물이 머네.
나도 보이니까 굳이 알려줄 필요 없어.
나는 그의 뒤편을 가리켰다.
저기에 내 여자친구가 살았어. 이렇게 다리를 건너면 바로 그녀 집 앞이지.
네 지갑 안에 그녀 사진이 들어 있어?
아니, 없어. 내 지갑에는 여동생 사진이 들어 있지. 아주 예뻐. 보여줄까?
보고 싶지 않아. 예쁜 여자 사진은 아무래도 마음을 흔들리게 하니까.
우리는 난간에 상체를 걸친 채 계속 그대로 있었다.
정말 느낄 수 있네. 바람이 먼데서 불어와.
나 지금 막 아주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어.
그게 뭔데?
일요일 오전의 빵집. 어렸을 때 일요일마다 온 가족이 모여 있을 때면, 빵을 사먹었어. 내가 그 심부름을 가곤 했지. 주머니에 당시로써는 큰돈인 만 원짜리를 넣고. 그 돈이면 빵집의 모든 종류의 빵을 살 수 있었지. 항상 가던 똑같은 빵집이야. 주인아저씨도 내 얼굴을 알고, 어디에 사는지도 알았지. 그날은 무슨 국가대항 축구경기가 열렸던 것 같아. 빵집 벽면 선반에 올려져 있는 티브이에서 축구경기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오전이었으니까 아마 위성중계쯤 됐겠지. 나는 빵을 사러 갔다가 그것을 봤어. 주인아저씨는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축구 중계에 열심이었어. 나도 그 옆에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축구 중계를 보았어. 아주 조그마한 티브이였는데, 화면에는 아주 새파란 잔디밭이 깔려 있고, 원색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조그마한 모습으로 그 위를 계속 뛰어다녔지. 빵 냄새가 났어. 만원이면, 내 주머니에 든 만원이면 그 빵집의 모든 종류의 빵을 살 수 있었어. 가족들 모두가 먹고도 다음날까지 또 먹을 수 있는.
그 생각이 왜 부끄러워?
부끄러워. 부끄러워 죽겠어.
내가 복수해줄까?
누구한테?
누군가 있겠지. 분명 있어. 누군가 잘못한 거야.
넌 아니고?
그는 다시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반복될 때마다 점점 더 아름다워졌다. 이전에 지었던 미소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그는 난간 위로 한쪽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가 눈을 감자 세상 전체가 눈을 감았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 소리만이 남았다.


그는 젊은 군인이었다. 스무 살도 안 된 것처럼 앳돼 보였는데, 군인이었으므로 확실히 스무 살은 넘었다고 봐야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헌병이었다. 머리 위에 헌병이라고 쓰인 검은색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군복이나 헬멧이나 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군인이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래도 뒤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어깨만은 제대로 펴고 있었다. 그는 나로부터 두세 발짝 떨어져 서 있었는데, 그쯤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와 나 사이에는 마치 그것을 보기 위해 거리를 둔 것처럼, 바닥에 래커로 칠한 흰색 동그라미가 있었다.
“뭐하세요. 아저씨.” 젊은 군인이 물었다.
“뭐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내가 되물었다.
“난간에 기대있네요.”
“제가 왜 그런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강물을 더 잘 보려고?”
“그게 내가 하고 있는 일 같은데요.”
“앞으로는 어떡할 건데요?”
“얼마나 앞이요?”
그는 시계를 보았다.
“40분 정도?”
“40분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교대시간이거든요.”
“지금 몇 분인데요?”
“18분.”
“그거 알아요? 지금 전 세계가 18분이라는 거.”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네요.”
“그러니까 40분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겠군요.”
“그렇겠죠.”
“그래도 나한테는 의미가 없어요.”
“그럼 아저씨한테 의미 있는 시간은 몇 분이죠?”
“5분?”
“그건 무슨 의미가 있죠?”
“숨이 멎어도 5분 내에 심폐소생술을 받으면 살 수 있죠.”
“위험한 시간이네요.”
“가장 안전한 시간이죠.”
“같은 의미가 아닐까요?”
나는 젊은 군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떨어지면 당신은 그 무전기로 연락을 하나요?”
무전기는 그의 허리춤에 달려 있었다.
“그러겠죠.”
“한번 들어봐요.”
“뭘요?”
“무전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요.”
“그럼 무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죠.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데.”
“내가 연락을 하죠.”
“그땐 이미 늦잖아요. 아무리 빨라도 5분이 넘을 걸요.”
“대개는 그렇죠.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물에 빠져도 금방 정신을 잃으면 안 돼요. 단 몇 분이라도 숨을 쉬는 게 중요하죠.”
“그럼 구조대가 오나요?”
“예. 거의 5분이면 와요.”
“단 몇 분이라도 버티면…….”
“살 수 있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버틴 사람들이 왜 죽을까요?”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난간 받침대에서 내려왔다. 나는 흰 동그라미를 내려다보았다.
“이 사람 알아요?”
젊은 군인도 그것을 봤다.

“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에요.” 그가 말했다.
“그런가요?”
“몇 군데 더 있어요. 사람들이죠.”
“봤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 위로 와요. 대부분은 다리를 건너죠. 그 중 누가 건너지 않을 건지 알 수 없죠.”
“난 알아요.”
“그럼 아저씨가 여기서 근무를 해야겠네요.”
“아뇨. 당신도 알아요.” 나는 말했다. “지금은 몰라도 금방 알게 돼요. 단지 모르는 척할 뿐이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지 않으려 할 뿐이죠. 보지 않는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그저 많은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건 잘못된 거죠. 이건 아주 간단한 얘기에요. 너무 간단해서 의문을 품을 수도 없죠. 그러니까 누군가가 죽어야만 누군가가 사는 거에요. 그런 세상이죠. 누군가가 돈을 잃어야만 누군가가 돈을 따죠. 물론 중간에 굉장히 복잡한 과정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폭탄 돌리기 같아서, 결국에는 누군가의 손에서 터지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건 대개 처음부터 정해져 있죠.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지는 거에요. 사람들은 그걸 잘 알고 있죠. 다만 그들이 모르는 건, 이것이 흰색 래커로 칠해진 동그라미가 아니라는 거에요.”
나는 잠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가 물었다.
“그럼 뭔데요?”
“잘 봐요. 이건 그냥 바닥이에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곳과 아무 차이가 없어요. 이것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어요. 흰색 래커는 어디서나 살 수 있죠. 그러니까 잘 봐요. 잘 보지 않으면 당신도 모르는 새에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아무 의미 없는 흰색 동그라미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기분이 나빠지죠. 그래서 얼른 자리를 옮기죠. 옆에 누가 있다면 왜 그러냐고 물을지도 모르죠. 그럼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겠죠.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요? 당신은 아까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로 온다고 말했죠. 그건 당신 말처럼 그저 많은 사람들이죠. 그 중 어떤 사람들이 강으로 뛰어들까요? 많은 사람들과 어떤 사람들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어야 하죠. 만일 차이가 없다면, 당신도 나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요. 이건 그냥 아무 바닥에나 그려넣을 수 있는 흰색 동그라미죠. 하지만 이 안에서 세상 전부가 나타나죠. 아시겠어요? 이건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흰색 래커로 칠해진 단순한 동그라미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것을 치워버릴 수 없어요. 지울 수도 없어요. 누군가 이곳에서 강물로 떨어졌다면, 세상 전부가 떨어진 거에요. 누군가가 죽었다면, 세상이 죽은 거에요. 근데도 당신의 무전기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는 말없이 한참 동안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 참을 수 없는지 자신의 발 앞에 있는 흰색 동그라미를 힐끔 쳐다봤다. 그러나 금방 다시 눈을 들어 나를 본다.
“지금은 몇 분이죠?” 내가 물었다.
그는 시계를 봤다. “23분.”
“5분이 지났네요. 전 세계가 5분이 지나서, 23분이 되었네요.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요.”
“5분은 가장 안전한 시간이니까요.”
“가장 위험한 시간이기도 하고요.” 나는 말했다. “이제 살아야 할 시간이네요.”


짧은 계단을 올라가면 양쪽으로 여는 유리문이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이 바로 1층이었다. 정면으로 계단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 불이 켜졌다. 양옆으로 복도가 있었고 바깥 빛이 들어오는 창이 나있어서 불이 켜지지 않아도 그닥 어둡지는 않을 터였다. 우편함은 오른편 복도 입구 벽면에 붙어 있었다. 유리문 바로 옆이었다. 오른편 복도가 더 길었다. 나는 그곳에 세 개인가 네 개의 문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유리문 앞에선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물비린내 같은 냄새가 났는데, 아마도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이리라. 오래된 건물이었다. 오래된 건물은 무엇보다 냄새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그 긴 시간 동안 건물의 벽에 스며든 그늘 냄새 같은 것이었다. 건물 전체를 하나하나 분해해서 햇볕에 말리지 않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을 냄새였다. 그러나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크롬 색 우편함을 살펴보았다. 층별로 한 줄씩 되어 있었다. 1층, 2층, … 203호, 204호. 다행히 우편물이 꽂혀 있었다. 시사주간잡지였다. 그것을 뽑아들자 뒤에 또 하나의 우편물이 있었다. 도시가스요금청구서였다. 이게 더 확실했다. 나는 흐릿한 불빛 아래서 이름을 확인했다. 잡지에 붙은 주소지의 이름도 확인했다. 그리고나서 나는 다시 그것들을 처음처럼 우편함에 꽂아넣었다. 잠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복도의 동작감지등만이 나의 움직임에 따라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나는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다 내려갔을 때 즈음, 건물 안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가슴 한구석이 쓰윽 미끄러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계단 아래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도 유리문을 밀고 나오지 않았다. 나도 다시 계단을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골목 건너편에 셔터가 내려지고 간판에 불이 꺼진 상점을 보았다. 부엌가구 대리점이었다. 불이 켜져 있었다면, 그것이 1년 전부터 있던 건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곳에 어떤 상점이 있었든지, 나는 확실히 1년 전에 그 앞에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 앞에 쪼그려 앉아있기도 했다. 유리문을 보면서, 그것이 열리기를, 계단을 내려오기를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나는 골목을 따라 걷다가 코너를 돌아 반대편 골목길로 접어들어 다시 걸어 올라갔다. 건물의 뒤편이었다. 2층에 아직 불이 켜진 창이 있었다. 나는 하나하나 창들을 세어보았다. 모든 창에는 튼튼한 쇠창살이 박혀 있었고,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었다. 불이 켜진 창은 그녀의 창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창에 불이 꺼질 때까지 그곳에 서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이 참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불이 켜진 창 안에 사람이 없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빈집인 걸 들키기 싫어서, 혹은 혼자 집에 들어왔을 때 어두운 게 싫어서, 그냥 불을 켜놓았는지도 몰랐다.
나는 그녀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곳’이라서 다행인 건지, ‘살고 있어서’ 다행인 건지 몰랐다. 그리고 ‘그곳’이라면 그건 분명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도, 마치 어떤 창에 불이 꺼지기를, 그 안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보는 창이, 그 창인지 아닌지 그녀가 확실히 알고 있을까? 그건 어떤 창이 아니라, 그저 아무 창이 아닐까? 온 세상의 창에 불이 다 꺼져도, 그녀가 들어갈 집이 아무 데도 없다면….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그 창의 불이 꺼지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났다. 1년 전처럼.<끝>





*김종옥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창작집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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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1 제19권(73호-76호) 76호/고창수의 영역시/정미소/붉은 입 Red Mouth 부관리자 2020.01.20 16
3670 제19권(73호-76호) 76호/고창수의 영역시/박경순/불영사 가을 Autumn at Bulyongsa Temple 부관리자 2020.01.20 17
3669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정미영/상사화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3
3668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허유미/포도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1
3667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박혜정/코끼리의 여백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2
3666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김두례/칠성무당벌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6
3665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김영미/목이 마르다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0
3664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박은지/산책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0
3663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변선우/타이타늄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19
3662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윤은한/황세등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19
3661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김가령/토르소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0
3660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김은자/틈의 연대기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18
3659 제19권(73호-76호) 76호/신작시/강외숙/메가네우라*의 사랑 외 1편 부관리자 2020.01.2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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