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문학상
제13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 이외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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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리토피아문학상/수상자 이외현
수상작품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외
이외현 시인은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하여 시집 '안심하고 절망하기'를 출간했다. 전국계간지작품상을 수상했으며, 계간 아라문학 편집장을 맡고 있다. 현재 막비시동인과 리토피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심사평
개성적인 리듬이 형상화하는 선명한 이미지의 수월성(秀越性)
제13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로 이외현 시인이 선정되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리토피아문학상은 계간 리토피아의 창간 정신인 “현실을 냉철히 응시하고, 독자의 곁에서 호흡을 같이하는 문학”, “지금-여기의 문학과 문화를 향한 패기 어리고 참신한 글쓰기 주체의 존중”이라는 취지를 확인하고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지난 12명의 기 수상자들의 면모와 작품 활동을 비추어볼 때 이 상의 가치는 충분히 스스로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시와 산문, 부문을 가릴 것 없이 개성적이면서 충분히 인식될 만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시인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리토피아문학상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설 것으로 기대된다.
이외현 시인은 2012년 등단 초기부터 최근의 전국계간지문학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인 소재를 개성적인 리듬과 독특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활달한 성향의 작품을 줄곧 보여주었다. 이번 수상 작품들에서는 기존의 상황에서 한 걸음 더 진보한 리듬과 선명해진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파도가 무너지는 밤에 토담이 쿨럭쿨럭 몸살을 하고
주인 잃은 초가집은 맥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가느다란 문살이 바람에 떨고 녹슨 대문은 삐걱삐걱
지붕에는 잡초가 가득하고 마당에는 소문만 무성하다
참새가 비를 물어오면 가지마다 하얀 감꽃이 매달리고
선착장에 아른대는 그림자가 밤새 바다에 꽃을 심는다
-「그림자, 바다에 꽃을 심다」 전문
비록 연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두 행이 한 개의 복합문장이 되어 세 차례 반복되면서 속도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리듬을 부여한다. 이 리듬은 ‘파도’, ‘토담’, ‘초가집’, ‘문살’, ‘대문‘, ’지붕‘, ’마당‘ ’감나무(가지+감꽃)‘ 등의 이미지를 정물(靜物)이 아니라 영상(映像)처럼 흐르게 한다. 그러면서도 개개의 상(像)이 흐려지지 않고 더욱 선명하게 떠올라 “선착장에 아른대는 그림자”를, 그림자의 의미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이를 통해 “그림자가 밤새 바다에 꽃을 심는다”가 밤바다의 풍경이 아니라 어떤 내면의 형질을 반영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 의미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비단 이 한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도 같은 형식의 발전된 수법들이 충분히 녹아들어 있다.
이번 리토피아문학상의 수상을 계기로 이외현 시인의 시 세계가 방법적으로 발전하는 것 못지않게 심오한 의미를 담아내면서 무르익기를 기대한다./백인덕 남태식 장종권
수상소감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소식에 기쁨보다는 리토피아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부담감이 더 크다. 등단 이후 10년이 훌쩍 넘는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시를 항상 뒷전에 두어 송구할 따름이다. 나의 시를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러워 아쉬움과 자기 비하가 공존하는 시간이 많았다.
첫 시집을 발간하고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부족한 공부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더는 상처 받지 않으려고 안으로 숨고 나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시에 대한 의욕 또한 저하되고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왔다. 두 번째 시집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그래서 미루고 미뤄 내가 낳은 시를 애써 무시하며 묵혀두었다. 하지만, 간혹 가뭄에 콩 나듯이 시가 기발하다는 둥, 시집을 가끔 읽고 있다는 둥, 시노래의 가사가 좋다는 둥,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뭐라고’ 하며 내심 뿌듯함이 밀려오며 몇 명의 우군에게 큰 위로와 힘을 받는다
시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려운 세상을 시 때문에 버티며 살았다.’ ‘시가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등 시에 진심인 분들을 많이 만난다. 나는 정말로 그들처럼 시에 진심이었는가 하고 자문해 볼 때 절대 아니라고 가슴이 도리질한다. 많이 부족하지만, 조금 진정성 있게 시에 다가가라고 주는 채찍이라고 생각하며 이 큰 상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으려고 한다. 부족한 저를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모 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지인이 평소에 삼류시인들을 비하하고 그들이 쓴 시에 대해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작정하고 시를 써보려고 하였더니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너무 막막하고 문장 한 줄에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고 조사만 바꿔도 시가 확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단어 하나만 해도 이것저것 수없이 바꿔 넣으면서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며 ‘시인들이 이렇게 힘들게 시를 쓰는구나.’를 깨닫고 이제는 유명시인 무명시인 상관없이 모든 시인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무명 시인들은 유명시인들의 시집을 읽는 독자가 되어 그들을 경외하며 시의 꿈을 키우기도 하고 더욱 빛나게 하는 뒷배가 되기도 한다. 무명시인들은 자기가 좋아서 시의 길을 가며 시작 활동을 통해 자기 위안과 희열을 얻는다. 이들처럼 진정으로 시를 사랑하는 독자 겸 시인들이 있어 그나마 우리 시의 명맥이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다시 용기 내어 이마에 무명천 질끈 동여매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둘둘 말아 숨겨 두었던 두루마리 속의 시를 펼쳐 들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냉정한 현실에 마음이 다시 얼어붙을지라도 세 명의 나의 절대 독자들을 위하여, 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웃으며 파이팅./수상자 이외현
수상작품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그녀는 애인처럼 살가운 남자를 원한다. 친구처럼 편안한 여자를 원한다. 만날 때면 그녀는 후미진 구석을 찾는다. 그는 늘 당당하게 가운데 자리를 고집한다. 그녀는 낯선 공간에 들어서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야릇한 분위기가 된다. 그는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메뉴판을 먼저 찾는다.
그녀는 그가 너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길 바란다. 그는 간지러운 소리는 못한다면서 뜬구름 잡는 허세만 두둑하다. 그는 뜬금없이 나타났다가 총총히 사라진다.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아무 꼬투리도 남기지 않는다.
그녀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걸지만 그는 여자에게 실오라기 하나 걸지 않는다. 말없이 연락이 끊겨 전화를 기다리는 그녀는 박제가 되어간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머리를 콩콩 쥐어박고 환장한 심장을 쥐어뜯는다. 울다가 웃다가, 방안 가득 생각이 떠다니는 말풍선에 채인다. 비비 꼬인 이불에 뒤채이며 지새는 밤들이 가을 뙤약볕에 영근다.
애초부터 시선이 달랐다. 그녀는 의문의 꼬리를 자르고 끊임없이 재생되는 생각의 테이프를 지운다. 웃기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애인 같은 남자를 원하지만 파도 소리만 가득한 동굴에 갇히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 남자는 하룻밤 친구 같은 애인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맨다.
그가 그녀에게로 다시 오기만 한다면, 애써 지운 테이프들은 찌걱찌걱 복원이 되고, 필시 아무 것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의 맘이 변하기 전에 여자들의 손이 타지 않는 깊은 산속 외딴집에 숨겨둘 것이다. 불룩한 허리에 깍지 끼고 두툼한 입술을 부비부비할 것이다. 홍시처럼 빨고 싶은 창시 빠진 그녀는, 그만 보면 사지가 풀리는,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미친 심장을 가졌다.
해가 발라당 까무러친 날
하루살이 연못 속에 알을 까고
섬잣나무 모래 위에 침을 뱉는다.
실잠자리 풀잎 위에 현을 켜고
산벚나무 뒷동산에 토악질 한다.
박새가 빠지직 뻐꾸기알 껍질을 깨고
암탉은 꼬꼬댁 횃대에서 배앓이 한다.
해를 훔친 박쥐가 동굴로 달아나다가 해를 놓치고,
발정이 난 누렁이는 떨어진 해를 따라 빙빙 돌고,
누렁이에게 밟힌 해가 수평선에 발라당 까무러친다.
아이스케키
창대 오빠가 골목에서 아이스케키 얼음과자를 판다.
울타리 넘는 소리에 손이 엄마 치마꼬리를 잡는다.
꿀밤 맞은 동전을 쥐고 창대 오빠에게 달려간다.
색소와 사카린을 섞은 문화당표 얼음과자가 기다린다.
아이스케키통 곁에서 얼음과자를 혀로 핥는 사이에,
경철이가 아이스케키, 하고 치마를 들치고 도망간다.
그림자, 바다에 꽃을 심다
파도가 무너지는 밤에 토담이 쿨럭쿨럭 몸살을 하고,
주인 잃은 초가집은 맥이 풀려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가느다란 문살이 바람에 떨고 녹슨 대문은 삐걱삐걱,
지붕에는 잡초가 가득하고 마당에는 소문만 무성하다.
참새가 비를 물어오면 가지마다 하얀 감꽃이 매달리고,
선착장에 아른대는 그림자가 밤새 바다에 꽃을 심는다.
참새의 하루
날개 접고 자울자울 조는 사이 숲에 데려갈 하루가 도착한다.
짹짹거리는 참새 떼 속에서 간혹 지지배배 낯선 소리 들리고.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부리로 할 일을 콕, 콕, 날개에 적는다.
가을볕에 은행이 툭, 떨어지고 참새 떼가 부스럭, 날아오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먹이를 찾는 짹짹 소리 요란한데,
가상공간 허방을 짚으며 깃을 치던 날개가 지쳐 고단하다.
해질녘 은행을 쪼다가 퉤퉤 뱉고는 숲을 나갈 준비를 한다.
작아진 하루가 타작마당에 내리고 곡식 낱알이 흩어져 있다.
허기를 물고 내려앉은 참새 떼 허겁지겁 코 박고 입을 맞추고,
오늘이 잘리며 뜨는 달이 지는 해에게 가위표를 한다.
아빠와 고모
아빠는 인천에 직장이 있지만 집에서 다니는 게 멀어 고모집에 산다. 가끔 집에 와 빨래를 하고 집도 치우지만 잠은 자지 않는다. 삼년 전부터 혼자 살기 시작하여 홀로서기에 익숙해진 초등학교 3학년생에게 아빠는 엄마가 미국에 있다고 말해주었다. 미국 간 엄마는 가끔 전화가 오지만 찾아오지는 않는다. 오늘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웠는데 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팔을 물어 분노를 씹었다. 이주일 째 아빠가 오지 않는 집은 더 이상 들어앉을 공간이 없다. 이불은 그냥 펼쳐져 있고, 옷가지가 널브려져 있고, 과자봉지가 뒹굴어 다닌다. 발로 톡톡 차며, 질겅질겅 밟으며, 후미진 자리로 가 티브이를 본다. 며칠째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밤을 웅크린 채 홀로 견딘다. 아빠는 오늘도 전화만 하고 아는 고모집에서 잔다.
물봉선·1
꼬리박각시나방이 공중부양 하다가 퍼덕거리며 꿀을 빤다.
암만 봐도 화냥년이여 아무 놈에게나 몸을 배배 꼰다니까.
도깨비바늘 막말을 박새가 물어오자 풀꽃들이 까르르 웃는다.
따가운 침 한 움큼을 떼어내고 혀로 찌꺼기 쓰윽쓱 닦는다.
점, 점, 이, 붉은 해마가 핀다.
고객 만능시대
고객님, 사랑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얼굴이 곰보인데 제 얼굴은 어떻게 생겼냐구요?
밉상은 아닙니다. 재생 불능 콘크리트 팩 보내드릴께요.
고객님, 배달 기사가 현관문을 쾅 닫아 아이가 깼다구요?
죄송합니다. 고객님이 드실 수면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애인이 없어 외로우니 진한 대화나 하자구요?
좀 바쁘네요. 입 냄새 제거할 수 있는 세정제 보내드리죠.
고객님, 고객센터에 불만 접수를 하면 선물을 주냐구요?
맞습니다. 진상 고객 거짓말탐지기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고객님, 통화 중에 왜 자꾸 기침을 하냐구요?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제가 쓰던 마스크 보내드리죠.
고객님, 마구 지껄이는 쌍욕이 거슬리지 않냐구요?
그럴 리가요 욕설 재생용 이어폰 보내드리겠습니다.
헛소리 그만하고 책임자나 바꾸라구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를 드릴께요.
사과 상자에 꿀밤과 감자를 같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우라질 고객님아)
드디어 오늘 나는 나에게 사표를 선물했어요.
* 피로회복제 광고를 패러디함.
이 좀 저 좀
이 좀은 스웨터, 저 좀은 털 코트를 사랑해.
좀은 입맛에 맞는 옷을 골라 먹고 자라지.
난전에 다녀오신 어머니 이 좀 저 좀에게 약을 먹인다.
좀은 야금야금 약을 갉아먹으며 껍질만 남기고 사라진다.
산수유 백일홍 지고 들국화 핀다.
들국화 지고 금세 복수초 핀다.
스웨터는 겨드랑이 알약에 취해 잠들었고
털 코트도 호주머니 알약에 취해 몽롱하다.
수은주가 영하로 곤두박질친 날
스웨터가 털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선다.
골목길은 나프탈렌에 취하여 어질어질하고
갓 깨어난 좀비들 캉캉 뛰어 버스에 오른다.
진달래는 피고
언 땅에 입김 불어 군불 지핀다.
불티 날아올라 찬바람을 재운다.
마디마다 새살 돋고 꽃눈에 바람이 머문다.
골짜기에서 부는 휘파람이 등성이로 퍼진다.
메아리 흘러가는 곳마다 꽃망울이 맺힌다.
새가 내려앉은 가지마다 입덧하듯
분홍분홍 분홍 진달래를 게워내고
아롱아롱 꽃 몸살 난 가지 어깨춤을 춘다.
감나무
이 나무와 저 나무 큰 가지와 작은 가지가
몸살을 풀어내며 애쓴 흔적이 도드라진다.
나뭇가지 사이로 눈이 오고 비가 내린다.
먹빛 구름이 흐르고 거센 바람이 지난다.
나무는 가지를 늘리고 싹을 틔워서 열매를
매달고 허공에 점점 많은 별자리를 그린다.
별자리들이 밤하늘에 총총 자리 잡으면
사람들은 장대를 메고 숲으로 몰려간다.
소문만 무성할 뿐 돌아오는 이가 없다.
아버지는 어디서 장대 툭툭 치며
저 별을 올려다볼까 내려다볼까.
동이 트려는지 별이 사위어간다.
밤새 장대로 후려친 감나무 밑이 소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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