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문학상
제14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 허청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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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청미 시인은 경기 화성에서 출생했다. 2002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승역』이 있다.
상식 변방에서
나는 무지해서
상식 변방에서
서성거리는 이방이어서
거기 누구 없소
소리 지르고 있어
아무도 못 듣는
나는 성대결절
고요하다
진공으로 든 듯 고요하다
벙어리 영혼을 태운 열기구가
상승한다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세상이라는 허구
몽돌이 있는 바닷가에서
차르륵 철썩,
파도는 오대양 육대륙의 파란만장 둘둘 말아
달가닥 달가닥, 이석증으로 아픈
몽돌 귀에 전언하는 듯,
포연 같은 회색구름 황혼을 가린다
먼 저편에선 포화 속에 생떼로 생이 무너지고
수백 살 나이테 두른 채 생나무들 뜬금없이 화형에 들고
단단하다 믿었던 땅이 뒤집어지고 생떼로 생이 수장되고
인면수심 하이에나들 피 냄새나는 하울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천지의 일그러지는 비명이
내 눈과 귀에 당도한 네트워크가 윙윙댄다
아직 나는 육신에 사지 붙어 있어
쪽파 한 단 사러 수퍼마켓에 간다
이 지구별의 실록을 사경하는
파도야 몽돌아,
나는 지금 멀쩡하다고 말해도 되나
나무의 문장
천 개의 혀를 휘둘러 바람이 애무했다
바람은 새디스트
나무의 통점마다 돋아난 부스럼을
꽃이라 했다
꽃이라 말하고 사람들이 환호한다
항 우울제가 지천이다
하르르 바람이 기술을 부려
허공에 흩뿌리고 땅 위에 쌓이는
꽃잎은 상처의 낱말이다
나무는, 죽어서도 눕지 못하는 나무는
저항이 매몰된 잔인에 대하여
하르르 추락하는 허무에 대하여
은유로 말하는
꽃은 나무의 말이다
나무는 바람의 식민植民이다
바람의 강점기를 버텨내는
나무는, 바람제국 괄호 안에 있다
괄호 안에서 수형의 문장을 쓰고 있다
곧 절판될 길 위에 베스트셀러 ‘나무의 문장’
신발들이 읽고 또 읽고, 지우고 또 지운다
선정평
바람의 강점기를 버텨내는 이방의 시, 이방의 시인
열네 번째 시상하는 올해의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로 허청미 시인을 선정하였다. 허청미 시인은 계간 《리토피아》 창간 이듬해인 2002년에 등단하였다.
기억하건대 등단 당시 시인은 60대로 들어서는 나이로 늦깎이였다. 기대수명이 83.3세이고 건강수명이 73.1세(2019년 기준)로 백세시대 운운하는 요즈음에야 예순의 나이를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나이라고 치지만, 기대수명이 76.0세이고 건강수명이 67.4세(2000년 기준)로 40대쯤을 늦깎이로 보던 당시로서는 무엇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매우 벅찬 나이로 시인의 등단은 늦깎이라도 매우 늦은 늦깎이였다.
하니 등단의 나이로 치자면 육갑을 이미 다 채운 나이였으니 생을 초탈한 몸짓으로 세상을 관조하며 회고에 안주하여 현실에서 한 발 물러선 시선을 보여주어도 무방했지만, “내 중심은 늘 사선이”라며 되려 비켜서지 않고, “울증이 돋는” “멀쩡하던 하늘”과 “검은 수유의 뿌리처럼” “오늘도 온몸에 돋는 쥐젖”과 “빈 가지에 매달렸던 산수유 열매 몇 알의 마침표”와 “부정맥으로 출렁이”는 “그녀의 바다”와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혈을 받”는 “전류가 안 통”하는 몸 등 여성의 삶과 몸을 목격자이자 증인으로서 증언하는 시인의 시선은 결코 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고도 그동안 시인은 시인의 “안에 잠자고 있”던 “칼 하나”를 “수천 번”을 벼려 “시퍼렇게 날 세”웠던 것일까(이상, 시집 『꽃무늬파자마가 있는 환승역』에서 인용). 시인의 나이 80대에 내보인 올해의 리토피아문학상 수상 시편들도 여전히 현장을 버티며 지키고 있다. “먼 저편에선 포화 속에 생떼로 생이 무너지고/수백 살 나이테 두른 채 생나무들 뜬금없이 화형에 들고/단단하다 믿었던 땅이 뒤집어지고 생떼로 생이 수장되”는 시대를 증언하는 시선들은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넒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졌으며 시의 완성도는 더 높아졌고 긴장감은 더 팽팽해졌다. “괄호 안에서 수형의 문장을 쓰고 있”는 나무와 “21세기 순장에 드”는 “생나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보라. 80대에도 여전히 지금 이곳을 꼿꼿이 지키고 선 시인을 보라. “무지해서/상식 변방에서/서성거리는 이방”이라고 시인은 자조하듯 하나 “이방”이야말로 시인의 조건이니 “성대결절”의 시인이야말로 “바람의 강점기를” 제대로 “버텨내는” “이방”의 시를 노래하는 천생 시인이다.
수상하는 허청미 시인에게 이제까지의 수상자들에게 드렸던 정진을 바란다는 인사는 감히 드릴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 상이 언젠가는 “절판될 길”이 끝날 때까지 시인이 시심을 놓지 않고 버티는 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허청미 시인의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장종권, 안성덕, 남태식(글)
수상소감
시는 육각수 같은 샘물
‘시와 예술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카타르시스 이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옛날에 설파했다고 한다. 이렇듯 시는 인생 고비 고비 삶에 지쳐 혼탁해진 영혼을 맑게 씻어줄 수 있는 육각수 같은 샘물로 비유될 것이다.
시를 쓰고 싶다고, 시를 쓰겠다고, 묵정밭 같은 내 가슴에 솟고 있었던 글에 대한 발심은 내 손에 잘 벼린 호미 같은 펜을 잡게 했다. 묵정밭에 박힌 돌들을 파내기 시작한 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지천명을 지나 이순을 바라볼 무렵 늦깎이로 《리토피아》 문예지에 투고를 했고 등단이라는 영예와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안았다. 일곱 식구 맏며느리라는 전업주부에서 35년 만에 시인이라는 낯설고 놀라운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다.
지난한 세월 속에 채석강처럼 켜켜이 쌓인 묵은 씨앗들이 발아한 언어들을 주련처럼 이어 첫 시집을 냈다. 어쩌다 우수도서로 선정이 되고 너무 벅찬 기쁨으로 설레기도 했다.
그 후 ‘나’의 마음 속 다락방은 견고했고 언제나 닫혀 있는 문틈으로 바람소리 빗소리 풀들의 숨소리 차들의 경적소리, 또 소리 없이 비추는 해와 달과 새벽별빛이 스며들기도 하는 나는 아나로그의 맞춤인 귀와 눈으로 세상을 걸어왔다. 어느새 흑단 같던 머리에 흰 서리 내리고 골수에 베어 익숙했던 아날로그 세기는 황혼으로 지고 있다. ‘아이 티’니 ‘에이 아이’니 사람의 온기 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 자판에 숫자 하나 잘못 누를까봐 홈뱅킹이 겁나서 다리가 아파도 은행을 찾아가는 나의 비애가 새로운 채석강으로 쌓인다.
‘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에도 부응 못하는 뒤처짐으로 또 남편의 중환으로 주변이 모두 회색인데, 모지母誌인 《리토피아》에서 문학상 수상 소식 받고 망설임과 감사한 마음 교차한다. 심신의 중심이 휘청거리는 이즈음에 모지로부터 큰 위로를 받는다. 소설 속 양로원에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처럼은 아니어도 미세먼지 쌓여 뿌옇게 탁한 창문을 이제 닦아야겠다.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허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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