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문학상
제5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 천선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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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 천선자 시인
수상작 도시의 원숭이
약력
2010년 리토피아 신인상. 시집 도시의 원숭이.
심사평
섬세한 감각에서 혁신적 비유를 발견하는 힘
시적 개성이란 불가피하게 시적 주체의 확립을 전제하게 된다. 자아나 의식, 정신과는 다른 의미에서 ‘개성’, 즉 한 개체의 환원불가능한 개별성이란 ‘대상/주체’의 변증법적 길항 속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개성이란, 특히 시인에게 있어 개성이란 그 시인을 시인답게 할 뿐, 그것 자체가 시적 위상이나 성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많은 비개성적인 시인들이 엄청난 영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이를 반증한다. 만약 시인으로서의 ‘개성’을 그의 진정한 ‘특질’로 각인시키고자 한다면, ‘대상/주체’의 변증법 속에서 확산하는 또는 응집하는 시적 인식의 맹아(萌芽)를 반드시 키워낼 수 있어야만 한다.
천선자 시인은 2010년 『리토피아』 신인상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왔고, 2013년 첫 시집 『도시의 원숭이』를 상재한 바 있다. 이제 만 5년에 다다른 문단활동기간 중에 여러 유의미한 행보들을 내딛은 바 있고, 활동에 비해 풍성하다고는 할 수 없는 비평의 대상으로서 몇 가지 특색을 일관되게 상찬 받은 바 있다. 그중 하나는 섬세한 감각으로 일상의 여러 사태들을 찬찬히 살피는 끈기의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상재된 시집의 차례만 일별해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판콜A 씨」, 「초코파이」, 「콘솔」, 「하모니카」, 「시계」 등의 사물들은 우리의 일상을 알게 모르게 채우고 있는 것들이지만, 정작 시의 모티프로 전환시키기에는 쉽지 않은 것들이다. 이런 여러 형질의 사물들을 테마로 삼을 수 있다는 점, 또한 그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다는 점은 천선자 시인이 일단은 감각적으로 매우 섬세하다는, 다시 말해 자신의 감각적 촉수의 성질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하나는 여러 비평가에 의해 적확하게 읽은 바 있지만, 감각적 지각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시적 의미로 전환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표적으로 「맹지」라는 작품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시인은 ‘묶인 땅’이라는 원래의 의미에서 출발해서 ‘묶인 자루→ 포대 자루→ 무명자루’라는 비유를 거처 끝내는 ‘닳아빠진 자루→ 풀리지 않는 자루’라는 즉 감각적 내용물에서 인식적 내용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을 통해 ‘맹지’ 자체, 즉 이미저리 전체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시를 개성적으로 만드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천선자 시인은 시집의 상재 이후에도 조용하지만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맹지에서 맹아(萌芽)들이 쑥쑥 올라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이번 수상은 그 첫 번째 작은 개화(開花)일지 모르고, 또 어쩌면 더 큰 시의 꽃밭에 내리는 한 차례 소나기일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라도 좋다. 무엇보다 시인의 시적 열정이 이 상을 끌어안게 된 첫 요인일 것이다.
소감
오늘도 하늘에서 흰 똥이 내립니다. 하얀 똥이 몇 칠 내내 내립니다.
일기예보는 예보일 뿐, 주먹만큼 큰 흰 똥이 데굴데굴 굴러서 떨어집니다.
엉덩이가 큰 하나님이 누신 흰 똥, 마을이 흰 똥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가 빠진 호랑이가 흰 똥을 보고 놀라서 뒷산으로 도망을 갑니다.
배가 고픈 고라니가 텃밭까지 내려와 흰 똥 속에서 채소를 찾고 있습니다.
흰 똥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토끼 굴을 하나씩 파고 들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집토끼, 산토끼는 보이지 않고 토끼 발자국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바퀴가 달린 삽으로 한참을 치우고 돌아보면 그새 흰 똥이 넘치고 있습니다.
무거운 하루를 써레로 밀고 대빗자루로 쓸고 함지박에 담아 조금씩 치웁니다.
영하의 온도인데 땀이 비 오듯 쏟아지네요. 모자를 벗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습니다.
구멍 뚫린 장갑사이로 새끼손가락이 머리를 내밀고 춥다고 야단법석입니다.
지난여름 흐드러지게 핀 장미의 향기가 담긴 장독대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뭇잎, 꽃잎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던 작은 연못도 온통 흰 똥 천지입니다.
흰 똥에 묻힌 장독대를 쓸어내자 항아리에 그려진 미녀가 빙그레 웃고 있습니다.
하나 둘씩 흰 똥을 털고나온 미녀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수북하게 쌓여갑니다.
썰매장를 찾은 도시의 아이들이 흰 똥을 뭉쳐서 던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추억 한 장을 만들어 선명하게 인화하고 있습니다.
강아지 나타샤은 흰 똥을 뒤집어쓰고 털이 젖었는데, 이리저리 뒹굴고 있습니다.
벽에 그려진 흰 당나귀는 엉덩이에 감시카메라를 달고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뮤지컬 캣츠의 여주인공처럼 생긴 미녀가 그림 속에서 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렌즈 속 육각형의 흰 똥은 불꽃놀이를 하고 사람, 동물이 모두 춤을 춥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선물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겹고 힘든 일이지만,
쌓여가는 흰 똥으로 세상의 온갖 만물이 잘 자라나려고 기지개를 펴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단 한 사람이라도 제 시를 보신다면 갓난아기 귀저기에 묻은 밤톨만큼 작은 흰 똥이라도 열심히 뭉쳐서 굴리고 만들어 보겠습니다.
심사평을 해주신 선생님과 장종권 선생님, 그리고 막비동인들께 감사드리고, 또 추운 날씨에 먼 곳까지 오셔서 축하해주시는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수상작품
맹지
타인의 지번으로 팔과 다리를 묶인 자루형 토지이다. 메아리가 염장된 통조림통을 끌어안고 있는 포대자루이다. 불안만 발효시키고, 있는 무명자루이다. 어둠으로 꾹꾹 밟아 놓은 길이 없는 자루 위에 부드러운 햇살 한 점 물고 온 바람이 실없이 끈 자락을 흔들고 있다. 뽀얀 뺨을 부비며 서성거리는 두려움이 자루 속을 채우면 잘잘하게 접힌 웃음들이 텅 빈 허공을 두드리는 닳아빠진 자루이다. 꿰맨 자리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자루의 곳곳을 타고 기억들이 흘러내린다. 돌돌 말린 슬픔이 별처럼 반짝이는 풀리지 않는 자루이다. 현재가치가 없는 자루이다. 미래가치가 없는 자루이다. 혹시, 한 귀퉁이 터진다면 빌딩 하나 세워질 자루이다.
콘솔
유럽황실가구들의발은모두사자의발을하고있다긴갈기와황금빛털을펄럭이는사자들콘솔에달린네개의발이달리자수많은발들이달린다가구점에가구들은없고온통사자들뿐이다진열장을박차고달리는사자들숲을달린다초원을달린다케냐의광야를달린다나도지프차를타고비포장도로를달린다평화롭던초원에울리는총소리황혼속으로사자의왕이쓰러진다황폐해진광야엔총소리만달린다마사이마라국립공원앞마사이족들유창한영어로관광객들을따라다니며외친다.
둥글려보면
미움도 둥글려보면 모나지 않는다. 저기 좀 봐. 미움을 먹고 잘 자란 내 키가 담장을 넘고 있잖아. 둥근 세상 밖. 둥근 비행접시를 타고, 둥근 꿈속에서 본 둥근 별을 찾아서 둥글게 떠나. 둥근 달을 좀 봐. 둥근 토끼가 둥근 쪽문을 열어 둥근 머리를 내밀고 둥글게 반기네. 둥근 웃음이야. 수많은 둥근 별을 지나 둥근 우주정거장에 둥글게 착륙해. 둥근 세발자전거를 타던 둥근 귀를 가진 아이들이 둥근 무지개나무를 심어. 벌써 둥근 열매가 익어. 어른들의 둥근 마음을 찾아주려고 둥근 어린왕자를 데리고 둥근 지구로 돌아와. 둥근 놀이동산에서 둥근 회전목마를 타고, 둥근 컵을 타고 둥근 축구를 하다 둥근 농구를 해. 종일 둥글게 노는 아이들의 둥근 눈동자가 둥근 나무에 열리는 둥근 지구의 한 가운데, 둥근 자동차들이 둥근 얼굴의 사람들을 태우고, 둥근 광장을 돌아오잖아. 둥근 빌딩의 둥근 창문을 열고, 둥근 웃음을 지으며 둥글게 몸을 말아 가슴이 따스한 사람들 속의 나.
탈박각시나방, 도시의 원숭이
폐교로 만든 곤충박물관 긴 복도를 따라 놓인 유리 상자 안에 집을 짓고 있는 왕거미, 교미를 끝내고 수놈을 잡아먹는 암사마귀, 먹이를 먹는 장수하늘소, 딱정벌레, 광대노린재를 지나 여러 나라의 나비와 나방이 전시된 이학년 오반 교실로 들어간다. 지중해 바닷빛의 날개를 가진 열대우림에 사는 모르포 나비 뒤의 나방, 뒷목덜미에 그려진 원숭이의 얼굴, 뚫어져라 쳐다보는 우수에 젖은 눈빛, 축 져진 어깨, 낯익은 얼굴은 거울 속 나의 얼굴, 밤마다 깡술로 비굴함을 삼키고,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걷는 도시 뒤에 몸을 숨긴 탈을 쓴 원숭이, 눈물이 없는 원숭이, 생의 부패한 조각들을 파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뱃가죽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속에서 내장도 쓸개도 빼주고 사는 원숭이, 아름다운 도시의 원숭이.
집착
넌 사랑과 연민, 그 중간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거야. 기억의 조각들 끊임없이 뇌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문턱, 밤새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뜰. 눈물의 뜰에 갇힌 문턱, 며칠 밤 자면 온다던 엄마의 목소리가 귀울음 하는 문턱, 너의 첫사랑이 떠나고 그 후 몇몇 여자들이 떠나간 문턱, 까치발을 하고 눈물콧물을 흘리며 너의 여자들을 기다리는 문턱, 닳아버린 문턱엔 어린 네가 살아가고 너의 여자들이 살아가지. 문턱은 세월의 수레바퀴를 멈추었고, 텅 빈 뜰에 켜켜이 쌓인 적막, 무성한 칡넝쿨이 기둥을 감고, 지붕을 감고, 내 온몸을 감아서, 너의 여자들이 살아가는 그 슬픈 문턱으로 데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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