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문학상
제8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 안성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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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리토피아문학상/안성덕 시인
<심사평>
압축된 ‘시어’를 통해 보여주는 ‘서정적 인식’의 힘
시를 발화 양식 또는 표현 형태에 따라 짧은 글, 또는 운문(韻文)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말을 단순히 ‘리듬’을 위해 수사(修辭)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시가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하려는 거의 무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고 이렇게 압축해서 짧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발견한 유용한 수단이 바로 ‘리듬’에 싣는 것이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결국 시는 ‘서정적 인식’을 다루는 개별적인 고유한 방식에 의해서 단문이나 운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정형적으로 짧게 압축된 시 형태가 마치 고루(古壘)한 것처럼 치부(恥部)되는 경향이 강할수록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 중 하나이다.
안성덕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정확한 어휘의 선택’에 의해 한결 같은 ‘시다운 어조와 의미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혹자는 「적막」, 「장대비를 가르는 법」, 「별」 등의 작품을 소재주의 측면에서 지나치게 개인 미시사에 집중한 소품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정적 인식의 힘’이란 바로 개인 미시사, 아니 풀잎 하나에서 우주의 역사를 발견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송장인 듯 못 박힌 잿빛 적막 한 마리, 제 숨통 틀어쥐고 눈 밖의 과녁을 겨누고 있다 바들바들 시위를 견디고 있다”(「적막」)처럼 ‘적막’이라는 찰나적 기운(분위기, 또는 시적 무드(mood))을 살아있는 그 무엇으로 만드는 힘은 몇 만 년 전에 멸종된 동물의 화석에서 유전자를 추출해 그 개체를 오늘에 복제해내는 것만큼이나 대단한 인간적 성취이고 한 종(種)으로써 우리가 진보한다는 증거까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시인은 자연의 한 사태, 즉 오후 한 나절 쏟아지는 장대비에서 “빗발을 뚫는 저 안간힘은/등골 깊숙이 메워진 막막함이다 허기다/웅크린 제 등이”(「장대비를 가르는 법」)라는 것을 읽어 낸다. 활처럼 척추를 휜 ‘고양이’를 떠올렸다가 이내 “처마 밑,/번개보다 빠르게” 웅크리는 사내를 그려낸다. 이를 통해 적막할 정도로 빠짝 당겨진 한 여름 오후,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는 온도와 습도, 기압골 등이 만드는 자연현상에서 벗어나 하나의 이야기로 인간의 역사에 스며들게 된다. 바로 이렇게 자연이면서 동시에 그 사실을 잊기 좋아하는 인간 존재를 다시 자연과 우주 속에 저절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서정적 인식의 힘’이다. 이런 점만 살펴봐도 안성덕 시인은 리토피아 문학상에 걸 맞는 시적 역량을 충분히 입증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인은 그의 ‘서정적 인식의 힘’, 그 동력(動力)을 보편성을 지향하는 개인 미시사(微示史)까지 확장하고자 기획한다. 「별」의 2연, “영창대신 월남에 간 형, 먼 남쪽 십자성 아래 메콩 강가에서 장남답게 꼬박꼬박 집안 걱정을 했다 유난히 긴 장마에 그해 우리 집은 내내 눅눅했다 아오자이 자락에 친친 감겼던 걸까 형은 끝내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 육사 수석이면 별 서너 개는 따 놓은 당상이라던, 면내에 자자한 소문 귓등으로 흘렸다 장전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제 머리통에 격발 확인한 별똥별이었다”에서 드러나듯이 가족사를 통해 한 인간 존재의 보편적 비애(“사라진 새벽잠에 물리게 별 구경이나 하는, 별 볼 일 없는 나날”)를 환기하고 또한 그 둘의 겹침과 넘어섬을 지향하고 있다. 「고래사냥」도 이와 같은 기획이 엿보인다. 이러한 작품들은 안성덕 시인의 시세계가 보다 깊이 있게, 다양하게 연출될 것임을 자못 큰 기대를 안고 지켜보게 하기에 충분하다./장종권, 백인덕
<수상 소감>
그 많던 피라미와 버들치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콩콩 건너던 아이들 행여 미끄러질세라 걱정이 깊던 징검돌도 훤히 몸피를 드러냈네요. 거슬러 오르는 삼천(三川), 겨울가뭄에 아흔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밭았네요. 바싹 마른 가슴팍 풀어 헤치고, 수만 리 멀다 않고 찾아든 철새들을 품고 있네요.
냇가 느티나무는 이미 오래 전 넉넉하던 그늘을 거둬들였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 세상 온갖 것 다 몸피를 줄이지요. 춥고 긴 계절을 건너기 위한 고육지책이겠지요. 그래요 게으른 나도 가뜩이나 좁아터진 어깨를 더 웅크려봅니다.
모래톱에 발 붉은 쇠오리 몇 동동거립니다. 목을 축이려는지 자꾸만 물가로 나섭니다. 거꾸로 찍히는 화살표가 꼭, 버들치 마실 물도 모자라다 제 조갈 다스리는 마음만 같네요. 내딛는 살얼음 위험하다 붙드는 마음의 닻만 같네요.
오늘밤엔 펑펑 천지간에 눈이 내려 삼천의 가뭄도 덮어주면 좋겠습니다. 돌아오는 길, 바짓가랑이에 도꼬마리 씨 몇 따라붙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덥석 받겠습니다. 껴입고 긴 겨울을 건너 새 봄을 맞겠습니다.
<수상작품>
적막
못을 쳤다 냇바닥에 박혀있다 겹겹 노을을 껴입은 박제다
눈 코 귀 활짝, 지상의 복판에 몸뚱이 죄 열어놓고 금시라도 시위를 박찰 듯 꼿꼿하다
행여 깃털 흘릴세라 몸내 샐세라 단단히 조인 저 한 개 살촉, 살여울에 죄여드는 발목쯤 애저녁 잊은 거다
송장인 듯 못 박힌 잿빛 적막 한 마리, 제 숨통 틀어쥐고 눈 밖의 과녁을 겨누고 있다 바들바들 시위를 견디고 있다
냇물에 얼비친 산 그림자 속, 뻐꾹 뻑 뻐꾹 어디로 귀띔을 넣는 건지 오금 저린 뻐꾸기 울음 이따금 영을 넘는다
밥숟가락 놓치듯 툭 떨어지는 해, 핏빛 노을, 왜가리 희미하게 어깨 추스른다
장대비를 가르는 법
처마 밑이 순간 환하다
활처럼 둥그렇게 등줄기를 당기던 고양이
튕겨 나간다
쏜살이다
어둠을 쏘던 눈빛이
장대비를 가른다
당길수록 더 재고 더 멀리 날아가는 법
스스로 터득 했던 거다
살촉처럼 꽂히는 빗발 속으로
말았던 제 몸뚱이를 놓는다
빗발을 뚫는 저 안간힘은
등골 깊숙이 메워진 막막함이다 허기다
웅크린 제 등이다
번개와 우레 사이
과녁을 확인한 고양이가 시위를 박찬다
기다렸다는 듯 또다시 장대 쪼개지는 소리
우르릉 콰쾅!
처마 밑,
번개보다 빠르게 사내가 웅크린다 뻑뻑
젖은 담배를 빤다
목어
감을수록 더 아른거리는 법
닿을 듯 닿을 듯 손닿지 않는 등 뒤가 더욱, 안타까운 법
잎 가버린 뒤 번쩍 피는 일주문 밖 상사화
감았던 눈 다시 뜨는 것이다 그만 잊자, 부릅뜨는 것이다
떨군 고개 들어 목젖에 걸린 낮달을 삼키는
돌탑 뒤 저 사미니
눈물을 감추는 게 아니다 어룽어룽 자꾸만 따라붙는 그림자
산문 밖으로 밀어내는 거다
눈 감으면 다시 또렷해
위봉사 목어는 스스로 제 눈꺼풀 잘라버렸다
고래사냥
아빠 아빠 잡아온 사람이 그린 거야 잡으러 가고 싶었던 사람이 그린 거야, 들어앉아 제 숙제나 봐주고 있던 내게 대곡천 반구대 암각화를 물었다
세탁기 속 빨래 엉킨 듯 청소기 줄 꼬인 듯 내내 풀리지 않았다 동아세계대백과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답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이빨 사이 멸치 뼈 뽑아 손에 피가 나게 절벽을 팠을 거야 장승포 앞 큰 바다에 나가 집채만 한 고래 등에 작살 꽂고 싶은 팔다리 어디 부러진 어느 병신 애비가 새겼을 거야, 답해 줄 수 없었다
고래 잡아오겠다고 큰소리 뻥뻥 노량진 큰물에 간 놈이 짐 싸들고 내려왔다 서른 살 그 꼬맹이가 십 년 세월 허공에 새겼을 고래 한 마리, 너끈히 수천 년은 살아남을 한 마리 고래
후련하게 대답해주지 못한 이십 년 전의 숙제, 놈은 기특하게 스스로 풀었다
별
1
별도 달도 다 따주마 꽁무니에 얼쩡거렸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맨눈에 해 들어온 듯 캄캄했다 길목을 지키던 그 애 오빠에게 걸려 피도 안 마른 마빡에 딱밤깨나 맞았다 꽃도 안 피고 또록또록 알밤이 여물었다 그날 밤 꿈속 내 사타구니에 뭉클 밤꽃이 피었다 대처로 가야한다, 여름 내내 수제비를 뜨던 어머니의 국자 끝을 따라가면 여드름 자국처럼 북극성이 박혀있었다
2
방아쇠 잘못 당기고 도망쳤다 영창대신 월남에 간 형, 먼 남쪽 십자성 아래 메콩 강가에서 장남답게 꼬박꼬박 집안 걱정을 했다 유난히 긴 장마에 그해 우리 집은 내내 눅눅했다 아오자이 자락에 친친 감겼던 걸까 형은 끝내 귀국선을 타지 않았다 육사 수석이면 별 서너 개는 따 놓은 당상이라던, 면내에 자자한 소문 귓등으로 흘렸다 장전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제 머리통에 격발 확인한 별똥별이었다 좌표가 지워졌다
3
이정표를 잃고 자주 길을 놓쳤다 이 핑계 저 핑계 핑계는 잔별보다 많아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았다 대낮에도 머리 위에서 별이 빛난다는 걸 까막눈 나만 까맣게 몰랐다 먼동 트면 지는 줄 알았던 샛별이 초저녁 서산마루의 개밥바라기라는 걸 다 저녁에야 알았다 장대처럼 크면 어른만 되면 망태 가득 따 담을 줄 알았던 별…… 검둥개 밥 주라고 개밥바라기는 뜬다
4
별이 지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동사무소 문화센터에 갔다 무료로 시간을 죽였다 오늘도 코드가 안 맞아 더듬거렸다 저 별은 나에 별 저 별은 너에 별, 수십 수백 번 고쳐 불러도 이제 세상 그 어디에도 내 별은 없었다 별이 지니 꿈도 졌다 한번 가면 영영 끝장인 것이 별똥별만이 아니었다 사라진 새벽잠에 물리게 별 구경이나 하는, 별 볼 일 없는 나날이다
<프로필>
전북 정읍 출생. 2009년<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몸붓』이 있음. 원광대학교 대학원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원광대 출강 중.《아라문학》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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