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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시집속의 시/권순/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엿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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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시집속의 시/권순/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엿보다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엿보다
―김설희 『산이 건너오다』 중에서
권순
그는 삼십년 째 무대에서 염을 한다
사자의 밥으로 쓸 쌀을 찾으러 간다며 병풍 뒤로 가서는
붉은 모자를 쓴 아들이 되었다가
백발의 아비가 되었다가
허공에 두 사람의 유령으로 펄럭이다가
꺼이꺼이 곡을 하다가
한탄을 하다가 문득
넋 놓고 보는 관객을 불러 세워 한풀이를 하기도 한다
그의 소품은
사람의 형상 하나
알코올
쌀 한 줌
소주 몇 잔
수의 한 벌
한 움큼의 솜
그가 형상의 뻣뻣한 몸을 꾹꾹 놀러 관절마다 반듯하게 펴는 동안
관객들은 한낮처럼 고요해지고
형상의 몸, 여덟 개 구멍마다 흘러나오는 한 생 썩은 물은
솜으로 틀어막고 마지막으로 항문까지 막을 때
곡소리 곡소리
관객의 웃음 같은 곡소리
여보게 이 몸뚱이가 썩은 물이었네 그려
이 퀴퀴한 냄새를 막고 있는 피부는 사기였네 그려
수천 년 썩은 물이 걸어다니며
학생이 되고 선생이 되고 계장 되고 과장 되고 부장 되고
마침내는 송장이 되었네 그려
제 형상 앞에서 그가 운다
오늘치의 각본대로 운다
―김설희 「염쟁이 유씨」 전문
「염쟁이 유씨」는 김설희 시인의 시 이전에 2006년부터 10년 넘게 국민모노드라마라는 칭송을 받으며 지방 순회공연을 지속하고 있는 1인극이다. 긴 시간 1인극을 지속적으로 끌어오는 배우의 역량에 대한 칭찬과 더불어 매회 관객들로부터 먹먹한 감상평을 쏟아내게 하는 유명한 공연이기도 하다. 김설희 시인의 「염쟁이 유씨」는 바로 공연 속의 무대와 주인공이 배경으로 설정된 작품이다. 무대 위 염쟁이 앞에 놓인 죽음의 형상들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를 앞에 둔 기분이 들게 한다. 그렇지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순서를 예측할 수 없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다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유명인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옆자리로 찾아든다. 누군가의 부재는 내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 순간, 혼자 슬그머니 꺼내보는 무거운 청동 거울 속에 저마다의 죽음이 보이기도 한다.
죽은 사람의 마지막 몸을 닦아주는 염쟁이의 작업은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의식에 가깝게 여겨진다. 그가 형상의 뻣뻣한 몸을 꾹꾹 눌러 관절마다 반듯하게 펴는 동안/여덟 개의 구멍마다 흘러나오는 한 생 썩은 물은/솜으로 틀어막고 마지막으로 항문까지 막을 때/곡소리 곡소리/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그렇게 지어진다. 시 속에서 염쟁이는 죽은 이가 온 곳을 생각하다가 가는 곳을 생각하다 퀴퀴하게 썩은 냄새를 맡으며 사람의 몸뚱이가 썩은 물에 불과함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또한 무대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 근디 땅에만 묻혀 버리고 살아남은 사람 가슴에 묻히지 못하면 그게 진짜 죽는 거여.“ 라며 극을 마무리 한다. 공연으로 회자된 작품을 김설희의 시로 다시 만나며 먹먹한 감동에 젖는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며 삶을 돌아본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소품은 쌀 한 줌, 소주 몇 잔, 수의 한 벌, 솜 한 큼으로 정말 간단하다. 수많은 시간 동안 죽은 자가 지나왔을 삶의 풍경들은 항문을 막음으로 마감이 된다. 죽음을 통해 새롭게 열리는 시간들은 짐작할 길이 없다. 다만 스스로 지나온 시간의 모습을 되짚어 보며 삶의 자리를 다독일 수밖에 도리가 없다. 시의 마지막 행처럼 오늘 치 각본을 떠올리며 죽어서 누구의 가슴에 묻힐 수 있을지를 궁금해 할 뿐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삶의 자리를 비워 놓고 염쟁이 앞에 놓일 것이다.
*권 순 2014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사과밭에서 그가 온다』. 아라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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