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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계간평/백인덕/시는 여전히 ‘반성’ 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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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계간평/백인덕/시는 여전히 ‘반성’ 중인가?
시는 여전히 ‘반성’ 중인가?
백인덕
1.
누가 뭐래도, 시는 일의적으로 ‘자전적 자기 독백’에서 시작했다. 시사에서 여러 경향이 충돌하고, 때로는 시 외적인 영향에 의해 의미와 가치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라지더라도 마치 오뚝이처럼 ‘시인(개인)’을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는 여러 사태가 이를 반증한다. 최근에 여러 의미 있는 소모임 중에 ‘김수영 다시읽기’를 주창하는 움직임은 눈여겨 볼만 하다. 필자는 이 움직임에서 하나의 우울과 여러 개의 희망을 본다. 우울의 근거는 김수영과 그의 시가 놓인 지점, 즉 1960년대에서 우리가 단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그를 숭상하거나 대척점이라 자인한 수많은 시인들이 있었지만 오늘을 비출 등불 하나 제대로 켜지 못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희망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시의 내적/외적 두 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외적 요인은 충분히 확보된 시인의 양과 그들의 질적 향상에 있다. 한글은 ‘시인공화국’을 만들만큼 풍부하고 효과적인 언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여러 유형의 시들이 충분하게 발표되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김수영이 던진 그 시대의 문제를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변화’와 관련한 것이다. 늘 변화를 찬양하고, 최전선이라 자부하는 경우에 눈여겨 볼 것은 실은 그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잘 모르는 청맹과니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가령, 연날리기를 생각해보자. 하늘 높이 치솟은 연은 어떻게 움직일지 지상에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연과 지상을 연결하는 끈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의 움직임은 보이지도 않는 가는 끈에 의해 지상과 연결 되어 있다. 하지만 줄이 끊어진 연은 보일 때까지는 자유와 최전방에 위치한 것 같지만 그것은 결국 지상의 것이 아니다. 하늘의 것이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다른 지점은 영향의 관계없음을 말할 뿐이다.
서툰 비유로 사족이 길었다. 하늘로 높이 띄운 연이 꼬리를 흔들며 다시 하강 하는 순간, 바로 그 지점이 지상에서 우리의 노력이 다하는 곳이다. 거기까지가 소위 ‘나’라고 하는 시인이 자전적 자기 독백을 풀어낼 수 있는 지점이다. 김수영은 시 「절망」에서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절망은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끝만 뒤집어 보자,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건 절망을 안고 있기 때문이고, 희망이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는 늘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시’라고 하는 ‘시’를 반성해야 한다. 다른 반성의 내용으로 가득 차 떠올라야만 시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자기로부터 출발한 시는 필연적으로 위기의 순간을 겪는다. 시간은 비체험적 차원이지만 몸을 바꿔놓는 것 이상으로 인식의 내용과 신념마저 변모시킨다. 그 대부분은 이른바 ‘쇠락’에 대한 감정인데, 자신의 구성 원칙이 기계적일 수 없고 유기적이라면 무한히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여타의 기록물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는 시에서만 허용되는 여러 한계들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황영선 시인의 작품은 일종의 ‘수락’을 통해 간접적으로 반성의 사유를 드러낸다.
아득한 듯
아득하지 않은 나를 들여다 본다
그리움도 아픔도 세월도 그냥 왔다 갔구나
곱게 저무는 것이 제 할 일인 양
소리없이 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세월 앞에 자꾸만 외로워지는
나를 다독인다
더는 단단할 수 없는 몸의 반응을
기꺼이 대견하다 쓸어주면서
잔물결 같은 사람 하나 만나
마음 누이고 싶은 봄밤이라고 흐드러진 꽃 보며
흔들린 나에게 꽃 같은
안부를 묻는다
―황영선, 「안부를 묻는다」 전문
나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십분 양보해도 반성하는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득한 듯/아득하지 않은’이라는 짧은 대치는 그 행위가 언표에 드러나는 것 이상의 간극을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는 단단할 수 없는 몸의 반응’은 중의적이다. 노화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한 가지 방식에 익숙해진 마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우이다. “세월 앞에서 자꾸만 외로워지는 나”는 아직 ‘아득하다/아득하지 않다’를 확정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곱게 저무는 것이 제 할 일인 양/소리 없이 지는 꽃잎”이 계기로 작용하기에는 충분하다. ‘진다’는 것의 의미가 시의 정조를 쓸쓸하게 하지만, 이를 ‘다독이고’, ‘안부를 묻는다’라는 자세를 내보임으로써 시인은 자신에 대한 긍정의 한 끝을 놓지 않는다.
목을 잘라도 또 자란다
허리를 베어도 또 자란다
발목을 끊어도 또 자란다
뿌리도 내리지 않은 생각들은
독초와 같이 잘도 자란다
그 생각들을 거느리는
나는 독초의 괴수
마음 깊이 전각한 문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선뜻 앝은 잠에 뒤척이는 밤이 지나면
그래도 혹 그 사람이 용서해 줄
광명한 새아침이 올라나
뿌리도 내리지 못한 허술한 죄들이
고사리처럼 순을 말아 올리는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
―전방욱, 「독초」 전문
우리가 비유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숨겨진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더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숨기기 위해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비유를 사용하면 직접 언술에서 드러나지 않은 이면까지 암시적으로 폭로할 수가 있다. 앞의 인용 작품은 바로 이런 비유의 효과를 그대로 체현한다. 전방욱 시인은 ‘독초’를 말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독초와 같이 잘도 자”라는 “뿌리도 내리지 않은 생각”에 대해 말한다. 독초와 같다는 것은 질긴 생명력만큼이나 외형으로는 구분이 어렵다는 것도 함축한다. 시인은 어떤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마음 깊이 전각한 문자” 만큼은 “심판의 날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욕망은 그 내용을 떠나 생성 자체를 경계하지만, 그것을 다른 표현 수단으로 승화했을 때를 충분히 예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시인은 아직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고 있다. 방법(수단)이 우선인지, 목적(의미)이 선행해야 하는지는 쉽게 판가름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 즉 “혹 그 사람이 용서해 줄/광명의 새아침”을 예상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곁은
살 냄새 물씬 나는
마음끼리 만나는 곳이지
항상 열려 있는 문
누구나 밀고 들어와
편안히 쉬어도 되는 그런 곳 말이야
그래도 곁은
언제나 겉이라서
서로 쳐다만 보고 사는 것이라서
터 잘 잡은 집에
군불 잘 드는 온돌방 하나 들이고
뜨근뜨근해지게
마음 마음 불 질러봐
결국 곁은
겉이 아닌 걸 알게 되지
―김미희, 「곁」 전문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주 공간에서는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생각하는 방위가 사라진다. 아니,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는 3차원이 다 무효화된다. 이건 그저 비유일 뿐이다. 진공 속에서 ‘나’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라는 자기 인식은 오직 타자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게 아니라 비로소 성립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관계의 존재다. 절해고도에서 고립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내 몸과 마음은 또는 마음의 옛 것과 지금은 끊임없이 길항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요구한다. 홀로 있다고 다 평화로운 건 아니다. 김미희 시인은 이런 사실은 ‘곁’이라는 조금은 사용빈도가 낮은 단 하나의 어휘를 사용해 명료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곁이 공간적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특별한 전제 없이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곁’이 ‘겉’이라는 걸 굳이 왜곡해서 비틀어 이해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자세다. 하지만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곁’과 ‘겉’의 차이 지움이란 것도 결국은 더 큰 범주의 시련 앞에 마주할 때 별게 아니란 것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3.
아무리 반성적 자세를 취한다고 해도 매번 ‘참회록’을 쓸 수는 없다. 게다가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반성’은 자기를 확고히 하기 위한, 과정에서의 성찰을 의미했다. 즉 목적이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보면 강시현의 작품은 흔한 신세타령 이상의 의미를 언표 아래서 출렁이게 하고 있다.
살아갈수록 뒤엉킴이 커지는 데요
누구나 꺼리는 숫자를
족보에 황급히 그려 넣고
죽은 조상에게 절을 합니다
비가 내리면 지하도가 젖고
生은 ‘살아있음의 위대한 번역’이라 쓰고
죽은 조상에게 또 절을 합니다
세상과 싸움을 잘하는 방법은 지치지 않는 것
빗물이 닳은 구두 어딘가로 들어와서
봉인된 발가락 여럿을 키웁니다
빗물은 우산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바쁜 발들이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웁니다
내 이목구비와 흔들리는 사지는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불량재산인데요
운수조차 가난한 사람에게 과연
치렁치렁한 사랑이란 것이 필요나 했겠습니까
여름을 등지고 긴 비가 내리고
강물 되어 넘치는 사랑이 오든
슬픔이 오든
모든 살아 있음에게
무슨 큰일이나 되겠습니까
―강시현, 「비 내리는 밤에」 전문
자기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죽은 조상에게 절을 합니다” 그리고 “또 절을 합니다”라고 밝히는 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저 끈 떨어진 연의 입장이 아니다. 우리는 횡적으로 동시대의 사태에 민감하지만, 사실 우리를 규정하는 건 횡적 연대가 아니라 종적 연관이다. 즉 조상이 문제인 것이다. 시인은 ‘족보’를 말하고 “내 이목구비와 흔들리는 사지”를 ‘불량재산’이라고 폄훼한다. 여기서 ‘족보’를 생각하게 한다. 비는 공평하게 내린다. 동시대인 누구나 내리는 비를 맞거나 보거나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비가 실어오는 감정은 나에게만 유용한데, 그것마저도 오롯이 나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족보에 구속되는 나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마지막 행에서 “사랑이 오든/슬픔이 오든/모든 살아있음에게/무슨 큰일이나 되겠습니까”라고 냉담한 감정을 드러낸다. 즉 비는 자연에 귀속하고 나는 나의 한계에 봉착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바로 이렇게 자신을 정위하는 지점에서 반성은 성찰이 되고, 새로운 가능성은 그만큼 접속면이 넓어진다.
축축한 몸이 가출을 시작한다
콘크리트 다리 위로 발바닥이 걸어간다
바바리코트와 안경테로 흘러내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숨은 달을 찾아 나선다
빗물은 검은 그림자를 씻어내며
새벽을 배달하고 땅속으로 스며든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지는 비가 쏟아지면
방바닥으로 쓰러져 고독의 몸살을 앓는다
지붕에서 쏟아지는 비애는
검은 구두에 가득 차서 흘러넘친다
동거부부가 금발의 나신을 걸어두고
로망스 선율에 긴 포옹으로 눈을 감는다
녹슨 곤로에서 라면이 끓고 있다
비가 그친 가시나무 숲으로 걸어간다
―윤은한, 「밤비」 전문
시인은 ‘밤비’ 속에서 생의 아픈 지점과 아프게 종결되는 생의 위기의 순간을 본다. 신문 벽지가 비에 젖어 쓰러진 방바닥엔 그때의 온갖 사건과 의미를 주장하는 언어 대신 ‘고독’이 누워 “몸살을 앓는다”. 뿐만 아니라 “지붕에서 쏟아지는 비애는/검은 구두에 가득 차서 흘러 넘친다”. 즉 비는 ‘비애’를 싣고 아니 그 자체가 비애가 되어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여기서 횡과 종으로 떨어지고 퍼지는 ‘비’를 통해 아직 어디에서도 자기를 정위하지 못한 시인의 비애가 읽힌다. 즉 라면이 끓고 있는 녹슨 곤로와 비가 그친 가시나무 숲, 시인은 어느 쪽으로든지 기울어야 함을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시는 아직도 ‘반성’ 중인가, 충분히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희망적인가, 그것은 ‘희망’을 정의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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