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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아라세계/신연수/인천문학의 선구자 진우촌秦雨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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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아라세계/신연수/인천문학의 선구자 진우촌秦雨村
인천문학의 선구자 진우촌秦雨村
신연수
이광수의 「무정」과 주요한의 「불놀이」로 비롯된 현대문학이 인천에서 발아하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1920년 오천석이 《개척》을 창간할 때 일부 문학작품을 소개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7년 진우촌秦雨村이 인천 최초의 순문예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발간하면서 부터이다. 그런 면에서 우촌은 인천 현대문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먼저 우촌의 작품을 보자.
김씨: 저는 지금 당신의 마음속을 잘 압니다. 당신도 사람이신 이상 다소간 양심이 계실 테니까 당신이 저에게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하여 나려오신 그것과 또는 제가 모르는 줄 아시지만 얼마 전부터 따로 자미滋味스러운 가정생활을 하시지만 그것도 모두가 양심에는 부끄러우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 당신은 기회만 엿보고 계셨습니다. 한갓 사회의 여론을 꺼려서 남자답지 못하게 마음껏 괴로움을 느끼며 결단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핑계를 잡고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시지요. 저는 잘 이날을 미리 알고 왔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의 이렇게 떠나게 될 것은 피치 못할 사실입니다. 20년 동안에 나도 사람이 함께 괴로운 생활을 끌어온 것은 저의 깨닫지 못한 원인과 당신의 너무도 남자답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석준: (숨길 수 없이 얼굴의 부끄러워하는 빛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려 애를 쓰며) 무엇을 어찌했다고 변명이야 변명. 20년이니 30년이니 하고 20년 동안 불만을 준 것이 무어야? 내가 옷을 헐벗겼단 말이야, 밥을 굶겼단 말이야.
김씨: 그것으로써 당신은 항상 말막음이시지요. 당신뿐 아니라 남자란 누구나 다 그렇게 말합니다마는 지금으로 이전에 깨달음 없는 여자는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불만을 갖기는 가졌지만 그 불만은 전생으로서 가가지고 온 피치 못할 것으로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남자에게 빼앗겼던 자기의 성리性理를 찾아낸 우리는 그것으로 는 남자에게 속지 않습니다. 여자가 흙으로 만든 부처가 아닌 이상 어찌 꼼짝 않고 앉아서 먹고 입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석준: 그러니깐 여자도 이제는 남자와 같이 오입娛入도 하고 제 맘껏 지내볼 수 있단 말이야? 그것을 이 사회에서 허락할까.
김씨: 무엇을 하필 그리한 것으로만 말씀을 하셔요.
석준: 그러한 것으로만 (벌떡 다시 일어나서 주먹을 쥐고) 너 같은 것은 깨끗한 조선여자사회의 적이다. 더러운 물을 들여놓는 악마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로는 속을지 몰라도 그것을 아는 남자로서는 용서할 수 없어.
김씨: (침착한 어조로) 그럴 테지요. 이 사회는 정의를 부르짖는 이는 그 반면에서 그를 누르려는 것이 이 사회이니깐요. 그럼으로써 정의를 부르짖는 이의 마음은 더욱 더 굳어지고 그의 피는 더욱 끓습니다. 누를수록 한 번 깨달은 그 마음은 없어지지 않고 더욱 더 팽창하여지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만 하더라도 아까도 말씀한바 수십 년 동안을 두고 이 집의 한 손에 지나지 않는 생활, 그것을 맛없이 지내 왔습니다. 그러자 얼마 전 당신이 영영 다른 곳의 가정을 이룬 그 때부터 저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극단으로 당신과 같은 태도를 취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마는 그것보다도 더한층 우리 사회에 그같이 숨은 설움이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고 그를 구원해 보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저는 그의 무기로 먼저 배우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오늘까지 계속하여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저보다 먼저 깨달은 이의 지도 아래서 여자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그러니깐 당신 같은 생각을 가지신 이와는 영원히 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당신이 이 집을 나가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랴 합니다. 학봉이는 내가 데려다 가르치겠습니다. 학봉이를 당신 같으신 이의 아래서 역시 당신 같은 사람이 될 것을 나는 무서워합니다. (학봉이의 손을 잡으며) 자- 학봉아 외할머니한테 가자!
이때 석준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누르고 이마에 핏줄이 서 있고 침모와 하녀는 황황히 뛰어 올라가 김씨를 붙잡는다.
우촌이 1925년 2월 《조선문단》에 발표한 희곡 「구가정의 끝날」의 일부이다. 구시대의 잘못된 인습을 비판하고 여성도 깨어야 한다는 계몽적인 작품으로 「개혁」, 「시들어가는 무궁화」와 함께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우촌은 신문학 초기에 활동하던 인천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우촌은 예명이고 본명은 종혁宗爀이다. 초명은 태원泰源이었으나 1919년 종혁으로 개명했다. 우촌은 1904년 7월 22일 인천에서 풍기 진씨 수秀와 경주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여동생인 정옥貞玉과 문옥文玉이 있고, 배다른 동생인 정희와 문길도 있다. 이중 정옥은 1934년 3월 《신동아》 29호에 소설 「뻐꾸기 울 때」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개화된 곳이었다. 조부 학명學明이 구한국시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바 있고, 부친 역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운 후 인천 해관(오늘날의 세관)의 통역(幇判)을 하는가 하면 또 당시 유명한 독일계 무역상인 세창양행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촌의 조부 학명은 1920년대 최남선, 염상섭 등과 함께 활동하던 시대일보 발행인 진학문과 사촌간이 되어 진학문은 우촌의 재종조부가 된다.
우촌은 그의 부친이 인천에서 근무할 때인 190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58년 11월20일 북한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발간한 『현대조선문학선집 (7) 희곡집 진우촌편』을 보면 “1903년 인천 사무원 가정에서 출생”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1920년 서울 ‘배재중학’ 졸업. 1923년까지 강화도 ‘하별학교’에서 교원생활. 1924년 동경에 가서 방랑생활. 1925년 귀국 후 한 때 엄흥섭 등과 함께 동인잡지 《습작시대》를 편집하는 한편 창작생활. 1951년 입북 후 ‘산업예술극단’, ‘흥남질소비료공장’, ‘국립출판사’ 등에서 공작. 1953년 겨울 별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에는 몇 군데 오류가 보인다. 그는 1918년 4년제 ‘배제학당’ 본과에 입학, 1922년 졸업했는데 192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강화 ‘하별학교’에서의 교원생활도 잘못된 것이다. 강화에는 ‘하별학교’가 없다. 현재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합일초등학교’를 ‘하별학교’로 잘못 기록한 듯하다. ‘합일학교’는 1901년 4월 ‘잠두의숙’으로 설립돼 1909년 ‘합일보통학교’로 개명했는데, 현재 ‘합일초등학교’에는 1960년대 이전의 교원명부가 없어 우촌의 교원생활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우촌이 1925년 발표한 「대흥정 잔디에서」라는 시작품이 있어 합일학교에서의 교원생활을 추측할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흥정’은 ‘합일학교’ 근처에 있던 활터로 지금은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지만 우촌이 교원생활을 할 때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천 중구청에 남아 있는 우촌의 제적등본에는 1915년(대정4년) 12월 5일 인천부 율목리 180번지로 이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전 기록은 없다. 우촌이 인천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것은 확실한데 보통학교를 다닌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촌은 ‘배재학교’를 졸업하던 1922년 1월 서울 출신의 백용자와 결혼했다가 이듬해인 1923년 4월 이혼을 한다. 그리고 1942년 4월 23일 다시 의성 김씨인 판창영근板倉永根의 3녀 필노미弼老味와 재혼을 하는데 이 때 딸 소희가 함께 입적된다. 이는 김필노미와 사실혼 관계로 살다가 1938년 딸을 낳고 뒤늦게 호적에 입적시킨 것으로 보인다. 1942년 5월 우촌은 인천을 떠나 경성 부암정으로 이주, 해방 후인 1947년 봄 아내 필노미는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우촌의 호적은 무연고 호적으로 방치되고 만다.
아내는 병약한 몸으로 이 땅이 해방되던 이듬해 봄에 이 땅과 아울러 우리 집도 명랑明朗하자고 뒷산에서 저 불두화佛頭花 나무를 캐다가 심고서 OO로 물을 주고 가꾸면서 꽃이 피기를 바랐다. 물론 그 봄에는 꽃은 피지 않았으나 잎은 성성盛盛하였다. 그러나 그해 가을 불두화가 낙엽이 질 때 아내의 병은 짙어져서 몸져누웠다가 불두화가 눈 속에 있던 한겨울에 입원을 하고 그 이듬해 봄 불두화가 채 싹이 트기 전에 아내는 영영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수필 「불두화」 중에서)
우촌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배재학교 졸업 후 강화 합일학교에서 교원생활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1923년 인천에 거주하는 배제학생들의 모임인 ‘인배회仁培會’가 결성되었고 이에 앞서 1920년 전후로 시작된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가 ‘한용단’, ‘제물포청년회’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구성원들이 초창기 인천의 문화활동을 주도했는데 우촌도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는 물론 인배회에 소속, 활동을 이어갔다. 또 우촌은 인천의 대표적인 노동단체의 하나인 ‘인천 소성노동회’에도 가담,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1925년 12월에는 이비도, 박형남 등과 함께 ‘인천유성회’를 조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천유성회의 활동에서는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윤진현의 「진우촌의 생애와 문학」 참조. 2006.12 『진우촌전집, 구가정의 끝날』 pp. 293~326)
우촌이 문필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9년 12월 《신청년》 제2호에 「허위를 피하여」라는 수필을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우촌은 이후 한동안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23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1923년 4월 《어린이》에 번안 동화 「이태리伊太利 이야기, 노랑 수선水仙꽃」을 시작으로 같은 해 5월에는 〈동아일보〉 ‘1천호기념 작품공모’에 희곡 「개혁改革」이 당선된다. 이 때 동화부문에서도 「의좋은 3남매」가 동시에 당선되고 또 같은 해 9월에는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일보사에서 실시한 작품공모에 「시들어가는 무궁화」가 당선된다. 화려한 출발이었다. 그리고 1925년 2월에는 초기작 중 대표작이라 할 「구가정의 끝날」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였고, 1926년 5월 31일과 6월 3일 이틀간에 걸쳐 〈동아일보〉에 「보옥화」라는 동화와 1926년 12월 4일 〈매일신보〉에 소설 「개구녁바지」를 발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또 우촌은 희곡과 소설, 동화뿐만 아니라 시도 여러 편을 남겼다. 현재 확인된 것만 24편이나 된다, 그 중 22편은 1925~1927년 사이에 발표한 것이며, 나머지 2편은 10년도 더 지난 1939년에 발표했다. 이중 시 몇 편을 보자.
숲 사이를 거닐면
깊은 밤 홀로 숲 사이를 거닐면
새들은 잠들어 달빛을 꿈꾸고
내 마음 잠들어 내일을 꿈꾼다.
나무를 흔들어 새 꿈을 날리면
내 꿈도 나르고 달빛도 날러
꿈 품은 나래를 쉬일 곳 없어라.
―「산근정山根町」숲에서
저기 산속
까마득히 먼 저 산기슭에
우리 님 산다오. 뻐꾸기 운다오.
내 마음 있다오. 뻐꾸기 울면
적막도 하구요. 우리 님 살면
내 마음 즐거워 떠나기 싫다오.
―「경인선 차중京仁線 車中」에서
겨울 밤
바람이 분다. 깊은 이 밤에
바람은 무서운 꿈을 몰고 다닌다.
인가人家 저 멀리 별들이 떴다.
문풍지가 운다. 거리의 망령亡靈이 달려든다.
수채에 물찌기가 기절氣絶을 한다.
마당가에 피避할 곳 없는 종이쪽이 불쌍하다.
캄캄한 하늘에 의지가지없이 떠도는 구름장이 궁금하다.
오! 맑은 날에는 눈이 몇 자나 쌓이려노!
임자 없는 시체屍體는 몇이나 또 소문나려노!
「숲 사이를 거닐면」과 「저기 산속」 2편은 1925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것으로 초기시의 특장인 감상적이며, 무엇보다 시작을 하게된 장소를 밝히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1939년 《시건설》 7호에 발표된 「겨울 밤」은 앞의 2편보다는 더 성숙한 이미지를 보이지만 ‘구작舊作’이라는 밝히고 있는 것을 볼 때 저작시기는 앞의 두 작품과 큰 차이가 없는 1925년을 전후한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촌은 시나 희곡 등 창작 못지않게 1927년 《습작시대習作時代》를 편집, 발행한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습작시대』는 인천 최초의 순문예지로 총 4호까지 발행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는 창간호와 3호만 남아 있다. 1927년 2월 1일 발행된 창간호(화보 ‘인천의 책 (2)’ 참조)에 실린 시인 주요한의 창간사 격인 글 「습작시대」를 보면 이 문예지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습작시대」라는 말은 조선문단朝鮮文壇 전체를 지칭한 것이 아닐까. 근일近日에 소위 「기성문단旣成文壇 대 신흥문단新興文壇」의 논쟁까지 있어 흡사 「문단」이란 것이 조직된 감이 있는듯하나 냉정한 관찰자의 눈에는 조선의 문단이란 겨우 발을 땔까 말까한 것임이 분명히 간득看得될 것이다. (… 중략 …) 습작시대에 있는 우리 가운데 특히 ‘습작시대’라는 겸손한 「레벨」을 부치고 나오는 동료들에게 대하여 조금 일찍 습작을 시작한 우리들은 만공滿空의 환영을 아끼지 않는다.
반타블로이드판, 20면 내외의 창간호를 요즘 문예지와 비교하면 많이 초라해 보이지만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화백의 표지그림과 주요한, 김동환 등 당대의 유명 문인들의 창작시 11편과 창작소설 3편, 수필과 평론 6편 등이 실린 당시로는 당당한 문예지의 하나였다. 당시 《습작시대》는 엄흥섭, 박아지, 유도순, 염근수, 김도인, 한형택 등이 동인으로 참여해 우촌과 뜻을 같이 함으로써 청년 문인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습작시대》에 대해서는 필자의 「초창기의 인천문학 Ⅰ·Ⅱ」 참조)
현재까지 알려진 진우촌의 작품목록은 다음과 같다.
1. 희곡, 시나리오
개혁改革 1막, 1923.5.26 〈동아일보〉
시드러 가는 무궁화無窮花 1막, 1923.9.16. 〈동아일보〉
구가정舊家庭의 끗날 1막, 1925.2 《조선문단》 5호
(시나리오) 밀물이 들 때, 1929.11 《영화연구》 1호
두뇌수술頭腦手術 3막, 1945.12 《신문예》 1호
신념信念 1막, 1947.3 《백민》 7호
파도波濤 1막, 1950.1 《백민》 20호
(동극) 길남이의 꿈, 1950.4 《소학생》
2. 시
숲 사이를 거닐며, 1925.7.20 〈동아일보〉
저기 산山속, 1925.7.20 〈동아일보〉
그대의 생각生覺, 1925.8.30 〈동아일보〉
인생人生의 여로旅路, 1925.9.25 〈동아일보〉
외로운 몸, 1925.11.12 〈동아일보〉
눈오는 아츰에, 1925.12.30 〈동아일보〉
낙수落水지는 아침, 1926.1.15 〈동아일보〉
나의 시詩, 1926.1.20 〈동아일보〉
게집애, 1926.1.23 〈동아일보〉
내 학생들(산문시), 1926.1.28 〈동아일보〉
쫓겨난 문로門路, 1926.5.12 〈동아일보〉
귀곡鬼哭새 우름, 1926.5.29 〈동아일보〉
국화묘종菊花苗種, 1926.10.23 〈동아일보〉
옥잠화玉簪花, 1926.10.23 〈동아일보〉
어두운 밤의 꽃, 1925.1 《조선문단》 4호
작은 배 갑판甲板에서, 1925.1 《조선문단》 4호
대흥정大興亭 잔디에서, 1925.1 《조선문단》 4호
달뜨는 바다, 1925.1 《조선문단》 4호
가을비 끄치고 낙수落水지는 아츰, 1926.6 《조선문단》 17호
바다가에서 올린 기도祈禱, 1927.7 《동광》 15호
반성反省- 단오端午날에, 1927.7 《동광》 15호
님께 받은 마음- 단오端午날에, 1927.7 《동광》 15호
시월十月, 1939년 《시건설》 7호
겨울밤, 1939년 《시건설》 7호
3. 소설, 동화
(동화) 의좋은 삼남매, 1923.5.27 〈동아일보〉
(동화) 이태리이야기 노랑수선화水仙花, 1923.4.1 《어린이》 1권2호
(동화) 보옥화, 1926.5.31~6.3(2회) 〈동아일보〉
(단편) 개구녁바지, 1926.12.4 〈매일신보〉
(소설) 식모食母, 1938.3.11~18(8회) 〈매일신보〉
4. 평론, 잡문
허위虛僞를 피하여, 1919.12 《신청년》
소화10년도의 조선문단에 대한 희망, 1935.4 《예술》 2호
연극만필演劇漫筆, 1949.8.29~30(2회) 〈조선일보〉
(수필) 불두화佛頭花, 1949.9.28~30(3회) 〈조선일보〉
*신연수 시인. 인천문협 회원, 근대서지학회 회원. 법률신문사 이사 겸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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