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2호/권두칼럼/백인덕/불가피한 모든 ‘결별’을 위하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58회 작성일 19-07-09 16:52

본문

22호/권두칼럼/백인덕/불가피한 모든 ‘결별’을 위하여


불가피한 모든 ‘결별’을 위하여


백인덕



  1.
  추석 연후, TV에서 방영된 영화 중에 심드렁하게 채널을 돌려가며 본 <남한산성>이 생각났다. 사실 이런 유형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적史的 인식 없이 극적劇的 요소만 부각시켜 결국은 역사에 대한 오해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몰지각을 부추길 뿐이라는 오래고 질긴 편견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되돌아 생각해보면 나처럼 문화 활동이 빈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굳이 영화관을 찾아가 직접 관람한 영화들이 죄다, <최종병기 활>, <명량>, <관상> 등 그런 유형에 속한다. 아이러니라면 그럴 것이다. 어쨌든, 갑자기 <남한산성>이 생각난 이유는 주전파인 김상헌(김윤식 분)과 주화파인 최명길(이병헌 분)의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는 ‘주청’(사실은 교설에 가깝지만)의 끝, 그 둘의 낮고 겸허하고 사적인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눈빛이나 어조에서는 이병헌이 압도했다고 보인다. 순전히 개인 판단으로) 최후의 항전과 죽음을 각오한 예조판서의 집을 이조판서가 찾아간다. 이판은 ‘살 길이 있는데 어찌 죽으려고만 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예판은 대답 끝머리에 ‘진정한 살 길은 옛 것이 다 죽어 없어지고 난 후에 새로 열리는 것이다’와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다. 유일하게 감동적인 한 장면이었다. 극적 효과를 위해 각색된 것이든 어쨌든 말이다.
  아무리 극적으로 꾸몄다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것에 정치적 함의가 들어있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설령 제작은 그렇더라도 해석은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엣 것’을 굳이 정치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창발성의 아이콘인 스티븐 잡스도 그의 한 연설(‘스탠포드대학 졸업 축하연설’)에서 ‘인생의 최대의 발명은 죽음’이라고 했다. 옛 것이 다 스러지고 그렇게 빈자리, 공터, 일종의 공허가 남을 때 새 생명, 새 사고, 새 희망이 저절로 싹을 틔운다. 누가 다독이고 끌어내야 만들어지고 열리는 ‘축제’가 아니다. 우리 인류는 비교적 불을 능숙하게 사용하지만, 그 이전 훨씬 전부터 자연은 스스로 불을 내뱉거나 불러오는 방식으로 지표면을 태우고 늘 새로운 기운에 휩싸이게 했다. 사족이지만 ‘옛 것’이 시간적으로 과거의 것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먼저 된 것은 일단 시-공간적으로 기회를 우선 접한 것이고, 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지금 절정에 이른 것이 연속성이 있는가, 일회적인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


  2.
  최근 외국으로 책을 부칠 일이 있어 시 우체국에 갔다. 책은 서류가 아니라서 소포로 분류되고 거기에 맞는 포장 박스를 구입했다. 내가 아니라 직원이 눈대중으로 박스 호수를 알려줬고 구입해 포장하니 딱 맞았다. 부착할 EMS 전포에 기입해 포장박스와 넘겨주었다. 어쨌든 5분 정도의 시간과 약간의 경비로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얼마 전 TV에서 인도 우체국에서 소포를 부치는 일이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처럼 방영된 것을 보았다. 워낙 크고 바쁜 나라지만, 신기한 것은 포장된 모든 우편물을 면으로 된 천으로 다시 감싸야 한다는 것인데, 다른 방식도 아니고 굳이 바느질로 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체국 앞에는 바느질 하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그 앞에는 고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8억이 넘는 유권자가 전자투표로 총선을 하는 나라에서 참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우체국 직원도, 고객도, 바느질공도 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유래에 대한 생각도 없고, 표준화나 효율성에 대한 압력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소위 고객들은 번거롭고 이중으로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 하나 같이 불만을 드러냈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이런 일종의 비표준화, 비효율성을 감내하는 것은 인도 사회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자리 창출도 어려운 나라에서 기왕에 있는 일자리를 굳이 소멸시킬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카스트나 영국 식민 정책의 잔재 운운하는 것은 정말 본령을 벗어나는 것이므로 참는다. 어쨌든 ‘옛 것’은 이렇게 우리 주변에 살아 있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것들을 찾아본다면 열 손가락이 부족해 발가락을 동원하고 심지어 주변 사람의 손발을 다 동원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더 고약한 것은 이런 것들이 ‘옛 것’이 아니라 ‘기득권’이란 이름으로 현재적 가치와 위상을 뽐내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정말 다 주지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우리는 ‘수요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수요가 경제를 이끄는(지표상) 형국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급-수요-소비’이라 믿었던 체제는 이미 진즉에 무너졌다. 갑자기 복잡해졌다. 자본주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왜, 문학은 수요 창출에 실패했는가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3.
  진즉부터 ‘권력’은 ‘연미복’을 입지 않았다. 짜 맞춘 것 같은 예복에 치렁치렁 훈장을 매달고 도열해 있거나 누가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양복차림의 단체사진 속에서 이미 권력은 떠났다. 전시용 프레임들은 결국 그 안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시’를 말하고 있다. 현대시는 일상어가 가장 큰 자산임을 선언하는 순간, 모든 이전에 있었거나 앞으로 제기될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게 내가 아는 현대시의 가장 큰 미덕이다.(나는 ‘낯설게 하기’의 ‘전경화/후경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구어와 가까우면서도 문어로서 늘 통찰과 새 인식에 가 닿고자 하는 것이 현대시의 열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 시, 문학은 애초부터 권력이 없었고, 그것을 생성할 이유나 동력도 없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시는 자기 정서에서 출발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동시대에 그걸 소통하고자 몸부림 칠 뿐이지, 위계를 쌓고 그 안에서 사다리 게임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쩌다 보니 싫어하는 것만 자꾸 밝히게 되는데, 사실 나는 천체물리학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갈릴레이가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신의 소중한 피조물로 우주의 중심에 서 있다 믿으며 어쩌면 보다 경건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최근 그들은 이 우주가 암흑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우주는 가속팽창하고 일반 물질의 법칙과는 달리 암흑에너지는 계속 커진다. 결국 모든 은하들을 빛이 닿지 못할 정도까지 밀어내버릴 것이다. 밤하늘은 오직 순수한 어둠에 묻혀버릴 것이다. 이 불가피한 ‘결별’은 그러나 영겁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현실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할 일은 이빨 새에 낀 고기 맛을 혀로 되살리며 스산한 거리를 배회하는 것뿐이다. 혹여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면 슬쩍 오던 길을 되돌아가면 된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