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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특집Ⅱ 설한 속의시/천세진/겨울, 동면冬眠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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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65회 작성일 19-07-0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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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특집Ⅱ 설한 속의시/천세진/겨울, 동면冬眠의 언어


겨울, 동면冬眠의 언어


천세진



  1. 순환의 비밀
  태어나는 것들, 살아가는 과정을 의미화하려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음을 필요로 한다. 영원히 사는 것들이 이 세계를 채우고 있었다면, 어떤 창작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 창작이란 한 순간을 보내는 놀이에 불과할 것이고, 그 놀이는 기록될 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죽고, 태어나는 존재에게만 그 놀이는 놀이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죽음이 있었기에, 멈춤이 있었기에 무수한 겹의 삶의 지층이 만들어졌고, 언어의 집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땅은 더 무거워지지 않았고, 더 가벼워지지도 않았다. 너무 가벼워질 뻔 했던 것들과 너무 무거워질 뻔 했던 것들은 순환 속에서 무거움을 더하거나 덜어냈다. 언어는 사계四季를 지나는 동안 그렇게 균형을 이루었다.
  누군가 물었다. 여름이 지독하고, 겨울이 지독한 땅의 언어는 어떻게 균형을 맞추느냐고. 그곳이라고 사계四季가 없었을까. 다만 두드러짐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들의 언어는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주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균형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언어라는 것을. 세계의 균형을 위하여 스스로 불균형을 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오로지 단 하나의 계절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극지의 언어와 적도의 언어에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도시의 거리에 가득 찬 언어가 봄에 경도되고, 여름에 경도되고, 가을, 겨울에 경도된 유행으로 물들어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때, 한 계절에 영원히 묶인 것처럼 보이는 극지의 언어와 적도의 언어가 있었기에 세계의 언어는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2. 이누이트의 언어 피라항의 언어
  콜롬버스의 탐욕스런 후예들이 부유浮游하는 광포狂暴의 언어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언어를 파괴하고, 또 다른 탐욕스런 후예들이 아프리카의 언어와 잉카의 언어를 비롯한 무수한 언어를 파괴했을 때, 동토凍土의 언어가, 밀림의 언어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균형을 맞추었겠는가. 그 누가 탐욕의 살을 태우는 열기와 잔혹한 냉기를 덥히고 식혔겠는가. 
  이누이트Innuit족의 땅에서 언어는 별처럼 응결되어 흰곰과 일각고래와 함께 누대를 흘러갔다.  피라항족의 땅에서는 언어가 다가올 시간을 지칭하는 얼굴을 갖지 않았으나, 삶을 이어가는 약속이 어려움 없이 이루어냈다. 색깔을 밝음과 어둠만으로 구분했으나, 형형색색의 자연 속에서 그들은 문화의 대代를 이었다. 이처럼 세계 도처에서 우리가 모르는 언어가 얼음과 강, 숲속에서 깨어나 순환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언어들은 반드시 죽음이 시간이나 죽음 같은 시간이 필요했으나, 현 세계의 언어들은 언 땅 속에서 순서를 기다렸다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언어공장에서 인공수정이 되어 태어났다. 피와 함께 흐르지 않고 거품 속에서 흐르는 언어들 때문에 세계는 부유한다. 현 세계의 빛나는 언어들이 그토록 가벼운 것은 하나의 언어가 겨울을 거치며 가져야 했던 무게를 수십, 수백이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오, 저 몸서리처지도록 가벼운 무게들이라니!
  멸종해 가는 극지의 언어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천 번의 겨울이 합쳐진 것 같은 심판의 겨울이 오면 거짓 언어들로 이루어진 순환은 단 하나의 고리도 남기지 않고 낱낱이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3. 오래된 것들의 언어
  지상의 생명들 중 가장 오래된 언어를 갖고 있는 것들은 겨울의 땅에 몰려 있다. 남극에 사는 6,500년 살 된 이끼 ‘부엘리아 후리기다’는 고작 24밀리미터를 자랐을 뿐이다. 1년에 0.004밀리미터를 자랐을 뿐이다. 북극해의 차가운 물을 견디며 그린란드 상어는 600년을 살아간다. 고작 일 년에 1센티미터를 자랄 뿐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자람’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언어를 가졌다. 그 차가운 바다에서 킹 크랩도, 엘로우 아이Yellow eye rockfish도 120년을 살아간다.
  그들의 언어를 누가 들었는가. 일 년에 한 단어나 단 한 문장씩만을 차곡차곡 쌓아 기록한 그들의 두꺼운 ‘생의 책’을 누가 읽었는가. 얼음을 깨고 몇 백 년 된 책이 유영하고 있는 것을 누가 지켜보았는가. 인내심과 겸허함이 아니고서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그들의 언어를 그 누가 다 이해했노라고 소리치고 있는가. 거짓 선지자의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언어는 천천히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늙어가고, 죽어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몇 백 년을 두고 그 과정을 밟아야 했다. 겨울은, 봄과 여름, 가을에 너무나 성급하게 언어를 토해내던 인간들에게 미숙함을 참회할 시간을 준 것이었다. 언어의 나이테를 성급하게 불려 몸이 부유하는 것을 막아주는 선물이었다.
  그런데 누가 누대累代의 계절에서 보내온 선물의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겨울의 인내심을 폐기했는가. 포장을 뜯어 그 안의 것들로 문자를 한 땀 한 땀 수놓아야 했는데, 누가 편의점에서, 스크린에서, 액정화면에서 차용한 ‘대박’의 언어를, ‘힐링’의 언어를, ‘워라밸’의 언어를, ‘소확행’의 언어를 타고 겨울의 강을 쉽게 건너려 하는가.
  그대는 알아야 했다. 겨울 강으로 가서 견고하고 차가운 얼음에 귀를 대보면 물결의 소리가 아주 낮게 들려오는 것을. 여름이면 소리를 내며 그토록 거칠게 흐르던 물결이 아주 낮게 침잠해 흐르고 있는 것을. 밤이 되면 물결이 조금 더 얼어붙을 뿐, 심연에서는 여전히 물결이 흐르고, 낮이 되면 얼었던 것들이 아주 조금만 다시 살아나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것을. 그 차갑고 천천히 흘러가는 흐름 속에서 그대는 언어를 얻어야 했다. 얼어붙었다가 명命을 겨우 이어가는 만큼만 다시 살아나는 물결 속에서 언어를 얻어야 했다.
  묻는다. 그대가 재빨리 차용한 언어들, ‘대박’, ‘힐링’, ‘워라밸’,  ‘소확행’의 언어들은 어느 계절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그대는 보리처럼 겨울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주 천천히 자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들뜬 것들을 눌려 밟히는 것으로 더 단단하게 살아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성숙함은 겨울에서 태어난다. 성숙하려는 자여, 얼음장 밑에서 겨울을 온전히 보내고서 말하라!           


  4. 계절 없는 언어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너무 빨리 자란 것들이 토해낸 언어가 가로수만큼 자라있었다. 그대들은 아는가? 언어가 저 높은 빌딩을 세웠다는 것을. 언어의 키가 점점 부풀어, 빌딩의 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누가 언어의 키를 보았는가?
  높은 것들을 창조해 낸 언어들이 진정으로 너도밤나무처럼 성장하여 높아졌다면, 빌딩의 언어들은 결코 단층 가옥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무리 몸을 구겨도 구겨 넣어지지 않으리라. 오, 그러나 놀랍게도 저 높은 빌딩을 만든 언어들은 구기면 단 한줌이다. 그런 언어가 이 도시를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계절에서도 탄생하지 않은 언어가 이 도시를 점점 높여주고 있지 않은가!
  도시의 키를 높인 언어들이 드리운 그림자에서는 속성速成의 냄새가 났다. 속도의 그림자들의 냄새를 맡지 못했다면 그대는 언어의 향을 가릴 후각을 아직 제대로 갖지 못한 것이다. 속성의 냄새는 다음 단계로 숙성되지 않는다. 속성의 언어는 냄새가 변하지 않는다. 속성의 언어이자, 키가 높이 부풀어 오르는 언어는 놀랍게도 단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몸 안의 여러 세포 안에 여러 계절의 미학들이 들어가 몸피가 자란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세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다.
  언어의 냄새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겨울의 언어와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겨울 강을 덮은 얼음의 냄새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가 놓친 것이다. 얼음의 언어는 차츰 깊이를 더해갔다가 서서히 깊이를 놓아주고 있다는 것을 그대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재빨리 부풀어 가는 것들에만 익숙해지려고 하면 그대의 코는 피노키오의 코처럼 쑥쑥 자라게 될 것이다. 세계의 거짓말을 그대가 배울 것이고, 그 말들을 되뇔 때마다 코가 자랄 것이다. 속성速成의 언어는 매혹적인 유행이다. 조금 더 높은 코를 가지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변용한다. “계절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그 계절을 살아낸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겨울의 언어는 오로지 겨울을 체험한 경험으로서만 상상할 수 있다. 체험하지 않고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 브런치에 떠도는 정보들을 모아 상상하는 것으로는 ‘겨울의 언어’를 탄생시킬 수 없다. 광랜과 전자우주의 거리에서 팔고 있는 겨울의 언어는, 겨울을 체험하지 않고 거짓 상상한 유행상품 언어에 불과한 것이다.
   
  5. 얼어버린 언어
  강이 있었다. 봄에는 자작거리는 소리가 물결보다 더 아름다운 강이었고, 발목에 차는 깊이의 강이었다. 미동微動의 언어가 서서히 자랐다. 여름에는 모든 것이 흘러넘치던 강이었다. 감히 몸을 담그기 어려웠다. 가을에는 낙엽이 물결 위에 무수히 떨어져 실려 갔다. 어느 계절이든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발을 적셔야 했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감정의 언어가 물결 속에서 떠올랐다.
  그대는 겨울에 다시 강을 건너게 될 것이다. 표층의 언어들은 흐르다 멈추고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걸어도 물결은 그대의 바람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겨울의 언어는 그대의 발밑에 있지만, 그대는 더 이상 흐름을 바꾸어놓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도 시간은 흐를 것이다. 시간이 흐르는데도 말해지지 않는 언어는 겨울이어서 가능한 것이다.
  겨울이지만 한낮의 햇살이 강의 표면을 살짝 녹이는 것을 그대는 보게 될 것이다. 햇살이 하얀 성에를 잠시 걷어내 단단한 얼음 밑에서 물결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쉽게 끄집어내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겨울의 언어인 것이다.
  그대는 몇 번의 겨울을 보냈는가? 그때마다 그대의 언어는 단단하게 얼고, 죽은 듯 멈췄다가 차가운 숙성의 기간을 거쳐 다시 살아났는가? 진정으로 그랬는가? 모닥불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혹독한 겨울을 온몸으로 견뎠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태어난 언어는 발효되어야 한다. 언어는 어떻게 발효되는가. 누군가 와인냉장고를 열자, 그 안에 언어가 가득 진열되어 있다. 라벨은 현란하고, 저마다 태어난 연도가 다르다. 그는 와인 병 하나를 선택한다. 언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냉장고에서 인스턴트 안주를 꺼내든다.
  아, 물론 그런 식으로도 언어는 얼마든지 선택될 수 있다. 냉장고에서 다른 계절의 화신들과 보관되어 있다가 선택되는 일이 이 시대에는 전혀 낯설지 않다. 냉장고에서 얼마든지 언어는 얼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공급된 언어를 들여다보면 숫자들이 적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겨울의 언어는 냉장고가 필요하지 않다. 냉장고에서 언어를 얼리는 것은 겨울의 추위가 아니다. ‘대박’, ‘힐링’이 언어를 얼리고 있다. 그러나 냉장고에서 얼어버린 언어는 미래의 어떤 기술로도 깨어나지 않는다. 언어의 정수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얼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미 가공되는 동안 언어의 조직이 모조리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6. 겨울의 언어를 다시 언명한다 
  ‘겨울의 언어’는 윤곽의 언어라고 말했다. 겉치레의 것들을 말려버리고, 높낮이가 명확한 등고선等高線을 보여주는 언어라고 말했다. 겨울은 개별자의 언어가 아니라, 윤곽의 언어라고 말했다. 세계를 구획하고 있는 적나라赤裸裸를 보여주는 언어라고 말했다.
  하여 누구도 겨울의 언어를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도 차가운 거시巨視에서 탄생한 ‘겨울의 언어’를 토해내는 시인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신이 쌓은 낭만적인 부유浮游의 거품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냉철의 언어’를 누가 사랑할 것인가. 누가 이 화려한 유행의 시대가 ‘상품商品의 언어’의 등을 타고 종말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싶을 것인가.
  겨울은 개별자가 아닌 무리의 언어요, 집단의 언어이자 형상의 언어라고 말했다. 다시 언명한다. 그 모든 규정을,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의 얼음 밑에서 올려다 볼 것을 언명한다. 우리는 세계를 내려다 볼 위치에 있지 않다. 인간이 세계에 언어를 내린 것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에게 언어를 내렸다. 겨울에 우리는 언어를 지켜볼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 앞에서 겨울의 언어를 내려 받을 것인지, 3중창으로 외기를 차단한 고층 아파트의 거실에서 내려 받을 것인지, 얼음장 아래서 내려 받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말했다. 겨울의 언어는 죽은 거시의 언어요, 심연의 언어라고. 부연한다. 죽은 것은 탄생을 위한 것이라고, 탄생은 심연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라고. 벽난로 앞, 아파트의 거실, 겨울 들판 중 어느 것을 그대의 배경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그대의 언어가 한계지어질 것이다.
  나는 들판으로 나가 겨울의 윤곽을 볼 것이다. 세계의 등고선은 겨울의 등고선이 가장 정확하다. 치장을 걷어낸 윤곽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헐벗은 겨울의 언어를 농축시킬 것이다.





*천세진 2005년 계간 《애지》 신인문학상. 『순간의 젤리』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천년의 시작). 문화비평가.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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