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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특집Ⅱ 설한 속의시/정미소/시인과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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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86회 작성일 19-07-0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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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특집Ⅱ 설한 속의시/정미소/시인과 외투


시인과 외투


정미소



시집 『가을인생』을 출간한 강우식 시인을 울리는 일은 의외로 쉽다. 별다른 안주 없이 술자리에서, 막걸리나 호프가 손등을 타고 취기를 탈 쯤 말문을 연다.
“선생님. 부모님 중 시인의 기질은 어느 쪽을 닮으셨어요?”
“아버지야. 내 아버지가 시를 쓰고 싶어 하셨지.”
선생님은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목소리가 울컥하시며, 잠시 심호흡을 하시다가 주르륵 눈물부터 흘리신다.
“내 아버지가 온양 갑부집 독선생 밑에서 한학을 배우셨어. 몸이 약해서, 장가나 들게 하려고 가난한 집 어머니를 돈 주고 사 오셨대. 부모님 돌아가시고, 막내인 아버지는 형님들이 놀음 빚으로 전답이며, 유산을 날리는 바람에 장돌뱅이가 되셨대. 함경도 단천이라는 곳에서, 양반들이 풍류로 시제를 여는 곳을 기웃거리다가, 제가 한번 써 봐도 되겠습니까? 하니 써 보라고 하더래.”
봇물 터진 이야기는 눈물 콧물을 섞어가며 좌중을 제압한다.
“내 아버지가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가난 때문에 못되셨어. 그날 시제에 적어낸 시를 보고, 놀란 양반이 자기가 하는 포목점에 총무서기로 앉혔어. 그 길로 어머니를 불러들여 물감장사를 시켰는데,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벌이로 생계를 꾸렸지.”
“선생님은 어떻게 시인이 되셨어요?”
“주문진수산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국 남녀학생문예작품 공모전에 응모를 했어.”
“당선이 되셨군요.”
“응. 시와 평론 모두 3등으로. 1등은 이수아, 2등은 박석준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인 태동철과 인천고 동기동창이더라.”
“심사는 누가 하셨어요?”
“시는 서정주, 평론은 양주동. 그 때 전교생 앞에서 상 받을 때의 기분은 잊을 수가 없어. 문교부장관이 주는 상은 학교의 영광이기도 했지. 부상으로 독일제 탁상시계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머리맡에 두시고 아침저녁으로 보물처럼 닦으셨어.”
잠시 진정되었던 눈물이 탁상시계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까지 치며 애간장 울음이다.
“내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시인이 못 되셨어. 주문진에서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이 상여 뒤에 들고 가는 만장을 아버지에게 와서 부탁했대. 주문진의 만장은 한학을 하신 아버지가 거의 써 주셨대.”
“그럼, 선생님께서 큰 효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내 놓은 자식인데, 시를 써서 상을 받아오니까, 좋아하시더라. 우식아, 대학에 진학하고 싶으면 하라고 하셨어. 그래서, 지금은 고려대학교인 국학대학국문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
“본격적으로 시인 입문을 하셨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당시에는 시인이 되려면 《현대문학》에 3회 추천완료를 해야 했어. 작품을 써 가지고,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미당집을 찾아갔어. 미당에게 작품을 보여주면, 보는 척만 하고 무더기로 쌓인 원고뭉치 위에 올려놓으며, 자네 작품이 조금만 나아지면 《현대문학》에 추천해 주겠네. 해서 죽기 살기로 시를 썼지. 그 칭찬에.”
“대학교 재학시절에 이미 시인이 되신 거네요.”
“아니야. 1회 추천 받고, 2회, 3회를 받는데 4년이 걸렸어. 작품을 미당에게 보내놓고 군 입대를 했는데, 군에서 3회 추천완료 소식을 받았어.”
“무척 기쁘셨겠어요.”
“미당이, 추천을 안 해줘서 서운하기도 했지만, 나를 참 아끼셨어.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를 마치면 내 강의자리라도 주겠네 하셨지. 미당을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외투가 생각 나.”
“외투요?”
“응.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겨울방학이 되어 미당집에 인사를 하러 갔어. 선생님 시골에 내려갔다가 오겠습니다 했더니, 미당이 내 홑겹의 행색을 살피시더니 외투를 내어주시며 입고 갔다가 오게, 해서 미당의 외투를 입고 주문진에 와서 개폼 잡고 다녔어.”
“외투는 돌려 주셨어요?”
“그럼. 그땐 너무 가난해서 옷이라고 할 것 없이 단벌로 살았어. 신발 밑창이 닳아서 신문지를 깔기도 했었지. 물이 질벅거리는 신발을 신고 통금이 있는 시절, 서울역에서 상도동까지 걸어와서 지친 보름달을 보면 눈물이 나더라.”
가난이란 그런 것이라며 미당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등록금 마련이 어려워 1학기만 마치고 군 입대를 하였다는 선생님의 눈물콧물이 바닥난 듯했다.
“대학원 복학은 하셨어요?”
“아니. 내가 군에 있을 때,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돌아가셨어. 아버지는 신장투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이듬해에.”
갑자기 선생님의 울음이 탁자에 쏟아지며 듣는 사람의 눈자위를 붉힌다.
“내가, 내 손으로 벌어서, 부모님께, 밥 한 끼 대접을 못하고….”
술자리 분위기가 애간장을 끓이며 각자의 부모님을 떠올릴 쯤, 말머리를 돌린다.
“선생님. 저승에 계신 부모님께서 시집 출간 기특해 하시겠어요. 최근 해마다 새 시집을 내시잖아요.”
“시는, 내 컴퓨터에 2백편쯤 더 있어.”
선생님의 시집 『가을인생』에 상재된 작품들을 낭독하면서, 남은 술잔도 비워낸다. 시로서 장인이 된 선생님의 브렌드를 떠올린다. 몇 해 전 여름, 아라포럼에 강사로 초빙되어 하셨던 말씀을 떠올린다.


  어쨌든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남이 아닌 자기만의 시 세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끊임없이 자기의 시 세계를 개발해야 되고, 자기의 색깔과 자기의 언어로써 시를 쓸 수 있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는 요즘 시를 읽으면서 감성으로 읽던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시를 읽다보면 전혀 모르는 외래어나 시어를 접하거든요. 상식으로 시를 읽는 시대가 된 것이지요. 저는 모르는 시어가 나오면 검색창을 두드려서 긍정적으로 이해하려고합니다.


  시인으로 사는 길은 두 갈래의 길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생활인으로서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 말입니다. 시로써는 생계가 안 되지만 평생 시를 버릴 수는 없고, 일상생활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 같습니다. 저는 행복은 일생 돈 안 되는 시로, 생계는 40년 동안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면서 꾸렸습니다. 돈만 몇 푼 더 준다고 하면 바로 다음 날 직장을 옮겼지요. 그렇게 옮겨 다닌 직장이 출판사였습니다. 어문각에서는 국어사전 교정을 보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배웠고, 삼성출판사에서는 ‘한국단편문학대계’라는 전집의 교정을 보면서 문학작품들에 동원된 단어들의 다양성에 적응했습니다. 다음에 옮긴 현암사에서 『한국의 명저』 편집을 하며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다산의 말처럼 “나는 조선인이니까 즐겨 조선의 시를 쓰겠다.”는 자각이 왔습니다.]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면에서 본다면 자기성찰입니다. 좀 더 크게 보면 사물과의 교감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이웃을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며, 시를 통하여 감정의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넓게는 인간 존재에 대한 내 안의 많은 것을 담아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철저한 자기고민이며 순전히 개인적인 작업이지 시대성이나 사회성으로 뭉쳐 부수고, 몰아내고, 혁명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언어를 무엇보다 자유자재로 주무를 줄 아는 장인이어야 합니다.


  일생 시를 쓰시며 시의 장인으로서 한국문단에 굳건히 뿌리내린 어마무시한 선생님의 눈물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강원도 주문진이라는 조그마한 항구에서, 여러 형제들의 가운데에서 있어도 없어도 무방한 서열의 덤덤함이 담력을 키웠을까?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고, 중학교시절엔 신발 뒤 축 접어신고, 교문이 아닌 뒤 철조망 뚫어진 틈으로 등하교를 하던 삐딱한 사춘기였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수업은 건성이고 수시로 아버지를 교무실로 오시게 했던 무던히도 속을 끓인 아들이었다는 회고담도 모두 2차, 3차로 옮겨가는 술자리에서 울려가며 듣는 이야기다.


  겨울은 외투가 필요한 계절이다. 선생님 혈기왕성한 문학청년시절 1960년대 강원도 지방의 추위는 짐작이 간다. 선생님께서 미당의 추천을 받으려고 공덕동을 드나들던 시기를 어림잡으니,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정도이다. 그때의 기억은 눈이 몇날 며칠 와서, 내 키를 훌쩍 넘겨 강원도의 학교는 무작정 휴교령이 내려졌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궁핍한 눈 위를 구르는 바람만 살 판 난 조그만 어촌의 풍경이다. 미당이 추위가 걱정되어 외투를 내어주는 방안과, 그 외투를 서부영화의 주인공 크린트이스트우드의 외투인 양 걸치고, 주문진 포구며 더 나아가 강릉의 경포대 솔밭길을 구름 위를 걷듯 외출이 즐거웠을 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은 시를 써서 상을 받고, 시를 써서 대학에 가고, 시를 써서 직장을 얻고, 시를 써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시를 쓴다고 아버지에게 된소리를 들었고, 시를 쓴다고 형님에게 각목으로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시는 예나 지금이나 밥벌이와는 먼, 굶어 빌빌거리려고 작정한 길이다. 그러나 그 시를 통하여 미당에게 칭찬 같은 “작품이 조금만 나아지면……”이라는 막연한 꿈에 부풀어 죽기 살기로 시만 쓴 시인의 여력이 무한존경이다. 가난한 제자의 추위를 걱정하여 내어준 미당의 외투는 얼마나 포근하였을까. 





*정미소 2011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벼락의 꼬리』. 제7회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 《아라문학》 부주간.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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