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22호/신작특선/이외현/나른한 오후, 갸르릉 끼잉낑 외 4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50회 작성일 19-07-09 17:19

본문

22호/신작특선/이외현/나른한 오후, 갸르릉 끼잉낑 외 4편


나른한 오후, 갸르릉 끼잉낑 외 4편


이외현



  고양이가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일격을 가한다. 숨죽이던 토사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털이 엉겨 붙은 눈썹 커튼 강아지가 한 쪽 다리를 절며 터진 오물 주변을 맴돈다. 고양이가 갸르릉거리며 강아지를 위협한다. 강아지는 달아났다가 이내 끼잉낑 다가온다. 고양이가 한 번 더 이빨을 세워 위협한다. 강아지는 더 멀리 달아났다가 다시 끼잉낑 다가온다. 어미가 버렸는지, 제가 집을 나왔는지, 주인에게 쫓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고양이는 몇 개의 생선뼈와 햄을 주워 먹고, 빳빳한 수염 내리고, 치켜세운 꼬리 내리고 슬며시 물러난다.


  물러가면서 자꾸 돌아본다. 모퉁이를 돌면서 또 돌아본다.





포도 한 알 구르고



포도 한 알이 굴러가더니 거름망 속으로 빠진다.
썩어가는 채소 퀴퀴한 잡냄새가 함께 버무려진다.
물기 빠진 찌꺼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린다.
고양이가 뚜껑을 열고 슬그머니 포도를 꺼낸다.


포도는 자동차 경적에 놀란 고양이 손을 빠져나온다.
강아지가 잡으려다가 놓치고 경비원 가랑이를 지나
자전거 사이를 지나고, 아파트 정문을 지나더니,
도로를 구르다가 달려오는 버스 바퀴를 피하고


더 굴러 맞은편 하수구로 떼구르르 굴러 떨어진다.
아무도 관심 없는 포도 한 알의 그저 그런 질주다.





개미의 오지랖



  벽지 접시꽃 줄기를 부지런히 타고 올라간다. 벽 틈에 먹이를 감추고 내려오는 녀석과 외길에서 만난다. 둘 다 앞만 보고 전진하다가 쾅, 하고 부딪힌다. 잠시 주춤한다.


  천장 몰딩을 가로지른 페로몬 길을 따라 구멍으로 간다. 마주 오는 녀석과 쾅, 하고 부딪힌다. 잠시 멈칫거리다가 한 뼘 길을 열어주고 또 제 갈 길을 간다.


  수개미가 여왕개미의 페로몬을 따라 사랑을 배달하러 간다. 일개미는 길잡이 친구의 페로몬을 따라 부스러기를 나른다. 병정개미가 동료 개미들에게 비상경보 페로몬을 발사하며 개미귀신의 침입을 알린다.


  개미는 다른 개미를 위해 길을 내어주고 기꺼이 페로몬을 방사한다. 오지랖이 넓다.





메모의 달인



  오늘 살 것을 메모하지. 마트에 가면 빛을 발하지. 나, 메모하는 여자야, 으스대면서. 메모하지 않은 것은 어김없이 깜빡, 하지. 진열대에 고스란히 놓아두고 돌아오지. 나, 충동구매 안 하는 여자야. 음, 음, 콧노래가 나오지. 참, 계획적이지. 메모하지 않은 것은 절대 사지 않는 알뜰함.


  모월 모일 메모, 선크림이 적혀있네. 50% 세일 횡재한 기분이었지. 글쎄, 집에 와보니 전신용이야. 얼굴에 발라주어 미안해, 메모에 충실하느라 깨알 같은 글씨를 놓쳤어. 요즘은, 스치는 번개의 트림도 메모해. 때로는, 꿈 저편으로 달아나는 미르의 잔상도 붙잡지. 입신의 경지야.


  모월 모일 메모, 갈매기 날고, 울돌목, 바위 뒤에 숨고, 갯바람, 봄동을 캐고, 이런 조각 말이 적혀있네. 이걸로 한 편의 시를 엮을 수 있지. 내가 기억이 없어도 메모장은 기억해. 그런데, 아무리 살을 붙여도 신파야.


  이제, 뭘 적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려. 이제, 뭘 살까. 주방을 두리번거려. 아무리 둘러봐도 더 이상 메모할 것이 없다고 메모하는, 날이었다는 것을 너는 알기나 할까.





왜?



구름이 남긴 찐빵을 먹으면 점점 배가 부풀어 오른다. 왜?
까치가 남긴 홍시를 빨면 자꾸 입술이 뾰쪽해진다. 왜?
천사가 남긴 낮잠을 자면 겨드랑이가 가려워진다. 왜?
시인이 남긴 시집을 읽으면 시가 자꾸 흩어진다. 왜?
왜, 라는 말을 넘기려고 강제로 입을 틀어막으면
자꾸자꾸 꺽꺽, 말 시래기를 토하게 된다. 왜?





<시작메모>


  하늘이 너무 맑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다. 구름이 너무 예뻐 만지고 싶은 오후다. 훌훌 털고 자연의 품에 안기는 일탈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자꾸 나에게 딴지를 걸어온다. 엄마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기억이 옅어지는 중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며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누가’ 그녀의 말을 낚아채가고, 기억의 실타래마저 감고 있는 것일까? 자식들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좀 전에 한 말도 금세 까먹는다. 묻는 말에 가끔 아이처럼 엉뚱하고 천진난만한 대답을 한다. 그녀에게 남은 단어가 몇 개나 될까? 그나마 잊지 않고 있는 것은 고향이다. 나서 자라고 살던 곳으로 향하는 귀소본능이 집요하다. 덩달아, 나 또한 멍하고 매사 무기력하다. 꽤 오랜 시간 시에 대한 갈증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시는커녕 시 시래기도 토하지 못하고 있다. 단풍이 물들어가고 있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야겠다. 폐 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그녀가 잃어버린 언어의 실타래를 찾아와야겠다. 다시, 그 실타래를 풀어 그녀에게 입혀줄 따듯한 시를 짜야겠다.





*이외현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안심하고 절망하기』.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장.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