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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서평/박동억/길을 올려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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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서평/박동억/길을 올려다보다
길을 올려다보다
―유재복 시인의 시집 『한밤의 진동』(토담미디어, 2018)
박동억
길이란 객관적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직관으로 현실에 부여하는 하나의 상상물이다. 태초의 길은 타자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동물이나 타인의 발자국이 숲의 행로를 만들면, 그것을 발견하는 자는 낯선 타자의 체중을 느꼈으리라. 타자의 체취와 몸짓을 회고할 수 있는 수많은 길이 맴도는 원무圓舞와 같은 장소를 우리는 고향이라 부른다. 한편 그러한 고향을 떠나게 되는 순간도 있다. 탐험가 또는 순례자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로 향한다. 순례하는 자의 정신은 채울 수 없는 허기로 가득하다. 세계 곳곳에 놓인 실제 순례지와 무관하게, 그가 정녕 이르고 싶은 성소가 이를 수 없는 정신적 충만함인 한, 순례의 길은 사막이자 신기루다. 순례하는 자의 발걸음이 지나는 길은 진실한 욕망을 모색하며 만들어진다.
현대성은 길에 관한 실감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더는 길로부터 타인의 체중을 발견하지 않는다. 아스팔트 도로와 보도블록으로부터 발견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편익이다. 현대의 길은 집과 직장을 잇고, 반복되는 일상을 양육하는 매개다. 그러한 길은 타성에 젖은 채 반복되는 일상인의 시선에 스쳐 갈 뿐이며,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지 않는다. 길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되는 시간과 계량된 영토에 봉사한다. 영토의 부속인 교통로에는 출구가 없다. 패스트푸드와 백화점, 스펙터클이라는 소실점으로 되돌아올 뿐인 거리의 교차로에는 덧씌울 신비가 없다. 현대의 길은 정돈된 화려함과 행복, 앙상한 실감만을 거머쥘 뿐이다. 현대의 길은 너무나 완벽하기에, 상상이 침범할 여백이 없다.
“아 여기는 어디인가?/어디부터,/무엇이 잘못된 것일까?”(「극락강역」)라는 질문은, 문득 자신의 길로부터 물러나서, 자신이 잘못된 길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의 질문이다. 유재복 시인의 시는 현대의 협소한 길에 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욕망하고 고뇌하는 자에게 준비된 시적인 길의 출발점이다. “과학 같은 소리”(「그놈 아니여」)라는 합리적 사고에 갇혀 오직 단 하나의 삶에 갇혀있던 자는 문득 그것이 단조로운 일상을 경영하는 타율임을 깨닫는다. 자연에 눈을 돌리는 것은 타율적 시간을 벗어던지는 성찰의 계기가 된다. “처음 나섰던 길까지 오래 더듬는/ 마루 위 눈길”에 시인이 눈길을 맞추어볼 때, 순백의 눈[雪]은 자신의 최초까지 반추하고 있는 시간, 그것의 상징적 매개물이다. 따라서 그의 길은 곧 자신이 놓친 길들의 가능성, 무수한 삶의 가능태를 떠올리며 지금까지는 그저 ‘살아만’ 왔을 뿐인 자신의 정신을 벼려내는 아픈 수양론을 품고 있다.
어느 쪽이 서울 쪽인지
가늠 안 되는 길 한가운데
낯선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망초꽃 흥건한 길가에 차를 세운다
차창을 열고 시동을 끈다
새는 한 번 돌아봤을 뿐,
한낮의 아스팔트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
갑자기 주머니 속에 넣어진 길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
가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 길이지만
뒤돌아가는 길은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첫 아이 출산 소식 듣고 달리던 길과
위독하시다는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던 길이 같았다
길은 늘 같은 표정이지만
길 끝에 부푼 기대 하나 세워두면 새로운 길이 된다
이런 길은 몇 개의 농로를 업고 있다
그 농로 끝엔 또 다른 길이 얹혀 있기도 하다
나는 기다린다 저 새는 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더라도 오늘 한 번쯤
새가 가는 쪽에서 내 길을 찾기로 한다
새가 날아오른다
나는 시동을 켠다
―「낯선 새에게 길을 묻다」 부분
위 시에 “망초꽃”과 하늘의 “새”라는 자연물은 길 밖에 놓여있는 또 다른 길의 매개다. 그러나 꽃의 향기와 새의 날갯짓은 아직 시인의 감각을 뚫고, 그의 정신을 깨트리는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은 채, 조심스럽게 현실의 탈출구를 모색하는 시인에게 사색의 대상으로 머문다. 따라서 이 시는 자연물을 매개로 “부푼 기대”로 예감되는 시적인 예감에 관해 진술하고 있다. 그 예감은 문득 “새”의 높은 시선을 자각하며 발생한다. 저 높은 위치에서 볼 때, 인간의 길은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고 왜소할 것이다. “첫 아이 출산 소식”의 기쁨과 “위독하시다는 아버지”의 고통을 견디며 걷는 시인을 새는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반대로 시인은 자신이 새의 길을 올려다본다. 새의 길이란 방향도 속도도 제한되지 않은 창공蒼空이다. “새로운 길”이란 시의 백지가 도달해야 하는 길, 곧 자유이다.
올려다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경하는 자를 높은 데 두고, 자신을 낮게 놓아두는 겸허함이다. 우러러보는 마음은 결코 객관적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상승운동에 새는 위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간을 여는, 그 마음의 기원은 무엇일까. 추측건대, “결국은 그냥 두고 나왔네/다락방/먼 하늘/아버지”(「아버지의 집」)라는 구절에 담겨 있듯,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아버지를 우러러보는 마음일 것이다. 버릴 수 없는 아버지의 유품이 놓여 있는 곳은 “다락방”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다락방’이란 기억이자, 시인의 혈관에 유전되는 누대의 온기이다. 자기 육체와 기억 속의 아버지를 반추하는 동안 하늘은 높아지고 높아져, 가없는 존경의 대상인 “먼 하늘”로 상승한 것이다.
이 시집의 가장 아름다운 높이는 그러한 하늘로부터 온다. “어느 늦은 가을 커피향 나는 빗소리”(「빗소리」)처럼, “첫눈 내리면, 했던 약속” 「간다 겨울」처럼 창공의 높이로부터 찾아오는 소리는 모두 투명한 날갯짓과 다락방의 변형이다. 새가 몰고 올 순결한 약속, 순결한 계절에 관해 시인은 누설한다. 이제 시인의 시선은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던진, 조금 다른 높이에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단조로운 노동과 같은 길을 하늘로 이어놓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올려다봄의 반복은 “색 다 벗겨진 단청을 덮은 오래된 기와에서 오래전에 내린 것 같은 빗방울 하나가 천천히 떨어져, 오래 멈춰 있는 목덜미를 놀라게 한다”(「선암사」)라는 탁월한 표현에 이른다. 이 구절은 시인이 창공과 지상의 헤아릴 수 없는 간격에 “오래된 기와”와 “오래 멈춰 있는 목덜미”의 시간적 깊이를 마련하고 있다. 단청을 문지르며 목덜미까지 미끄러진 빗방울의 서늘함은 하나의 문장 속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새를 올려다보는 순간은, 바로 이 목덜미에 닿는 서늘한 물기와 같은 생동하는 감각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가슴에 큰 돌 하나 얹혀 있다고 했다
손을 맞잡을 때 그 무게와 습기가 함께 전해졌다
짠물 밖으로 떠오르지 못한
그의 지난 시간은
오이지처럼 쪼글쪼글했다
그의 세상은 늘 납작하고 아슬아슬했다
굽혀 내려다보던 허리를 펼 때라야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늘 무거운 걸음은 그를 먼 데로 데려가지 못한다
무거움은 늘 시선을 낮게 했고
그 시선은 낮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얘기에 귀 기울이게 했다
착한 이들의 여러 개 마음을 겹쳐 담은
그의 가슴의 돌은 더 무겁다
슬픔 끝까지 가 본 사람만이
거기 어디쯤 가고 있는 사람 마음을 안다고 했다
빛이 가려도 하늘엔 늘 별이 떠 있고
풀벌레가 아니어도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누름돌」 부분
한편 우리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이르려는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도 알고 있다. 쥘 수 없는 것을 쥐려 하는 마음은 “지난 시간”으로 누적되어, 몇 번이나 마음을 짓이길 것이다. 그러나 위 시에 시인은 그러한 마음이 절망이 아님을, “낮은 얘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겸허한 발견임을 말하고 있다. 낮은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자신처럼 무엇에 이르고자 했으나 절망하고 쓰러진 자들, 고통받는 자들의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마저 헤아리며 “착한 이들의 여러 개 마음을 겹쳐 담은/그의 가슴의 돌”은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따라서 올려다봄과 내려다봄은 사실 같은 것이다. 무언가를 존경하는 마음은, 존경하는 데에 이르지 못한 마음을 연민할 줄 안다. “별”에 이르려는 모든 마음을 그러모아 시로 쓴다는 것은, “풀벌레”의 연약한 울음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시 「달력」에는 “한 장 남은 달력을 떼어내니/뒷벽에 노린재 두 마리 웅크리고 있다//노린재가 덮고 있던 홑이불 걷어내고/열두 장 두꺼운 이불 덮어준다”는 다정한 표현이 나타난다. 헌 달력을 새 달력으로 바꾸는 것이 노린재의 살림을 마련하는 행동이라는 표현에는 웃음이 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집을 읽다보면, 다정한 마음이 결코 쉽게 오지 않는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아주 작은 벌레를 아끼는 마음으로부터 그 사소한 아픔까지도 뭉쳐놓은 누름돌의 무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아픈 정신이, 아프게 붙들고 있는 길이 어떻게 하늘에 이를 수 있을까. 계단 하나, 아니 한 뼘의 높이를 오르기도 벅차 보이는 위태로움에 관한 고백은 시 「가을 고백」에 드러난다. 이 시를 살피면, 시인은 중환자실에서 병마와 싸우며 긴 시간을 보내었던 것 같다. 죽음을 달래며, 시인은 “작은 공만큼이라도 작은 하루라도/통통 튀는 하루를 손안에 쥐고 싶었다”(「가을 입원」)고 고백한다. 이렇듯 시인이 소유하려 한 하늘은, 보석처럼 견고한, 한 줌의 하루, 한 줌의 높이인 것이다. 그것의 기원은 좁고 견고한 다락방이며, 그것이 이를 장소는 “통통” 튀어 오르는 육체, 둥근 공처럼 쓰러지지 않는 탄력이다.
가시 하나 숨겨두지 않으면
들여다 봐주지 않는 곳
눈물을 바닥까지 밀어 넣고 숨겨
늘 축축한 곳
다져진 딱딱한 눈물 딛고 건너는 날이 많으니
언제 한번 발바닥 내보이며 울어 보겠는가?
저녁이면 길게 늘어진 그림자 안고 들어와
발등에 얹힌 비눗물 조금 얻어 쓰고
비로소 일으켜진다
어떤 바닥에도 닿아 있지 않은 시간
꿈에 쫓기는 몸이 뒤척인다
무거운 내일을 받치려면
접힌 오늘을 팽팽하게 펴두어야 한다
멀리 보는 마음과 눈을 밀치고
원하는 곳에 제일 가까운 건
발바닥이다
―「발바닥」 부분
유재복 시인은 육체의 탄력을 관조하는 눈이나 제작하는 손이 아닌, 바로 가장 낮은 육체인 가장 하부下部인 발바닥으로부터 발견한다. 따라서 그가 초점화하는 인간의 상태는 창조하고 제작하는 자가 아닌, 노동하는 존재에 가깝다. 모든 인간은 ‘걷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가시”라도 박히지 않는 한 발바닥을 쳐다보지 않는다. 발바닥이란 죽을 때까지 체중을 운반하는 노동이자, 망각된 노동이다. 시인은 그러한 발바닥에 굳은살 대신 “딱딱한 눈물”이 응집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슬픔은 감정을 느끼고 기억하는 순간이 아닌, 그러한 슬픔을 짊어지고 끈질기게 지속되는 노동이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2연에 “발등에 얹힌 비눗물”로 발바닥의 발을 씻는 세족의 모티프는 과거의 기억을 성찰하여, “무거운 내일”을 위한 탄력의 회복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진정한 마음, 즉 “원하는 곳”에 제일 가까운 것이 발바닥이라는 시구가 성립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의 탄력은 더는 발바닥과 시간이 경주하지 않을 때, 시간을 돌아보고 지금까지의 삶과 마주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다. 유재복 시인의 시집에는 “산목숨 하나쯤 물어 죽여 본 개와/한겨울은 닮았다 사납다 그러나/눈싸움에서 이기면 된다”(「간다 겨울」)라는 투쟁의 태도와 “겹친 뿌리처럼 싸울 일은/애초에 없는 거야”(「삶은」)라는 화해의 태도가 상존한다. 그러한 태도들은 시간을 회고하는 방식의 갈래들이다. 그중에서도 시인이 진정성 있게 좇고 있는 태도는 바로 현실과 화해하고, 타인을 환대하는 태도로 보인다. 시 「옛집」, 「처마,」 「메뚜기 강」 등에는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지고자 하는 “옛집”과 “처마”, “안개”가 등장한다. 이 공간들은 타인을 끌어안으며 설마 그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녹 조각 하나를 재빨리”(「옛집」) 감추는 아스라한 포옹들이다. 바로 이로부터 소박하면서도 진실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따, 가시가 기둥이여”(「가시」)하고 구수한 사투리로 전해오는 상냥한 마음씨는, 가시처럼 사소해 보이는 모든 아픔을 기둥으로 여기도록 요청한다. 시집 『한밤의 진동』에 맴도는 따스함은 조금씩이나마 세상의 모든 가시를 밀어 올린다. 그 목소리는 말뚝처럼 인간을 옥죄는 현대의 길로부터 우리의 아픈 발바닥을 들어 올리기 위해, 겸허하게 자신을 낮춘 자리로부터 들려온다.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분 당선. 현재 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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