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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계간평/백인덕/이토록 다채로운 시의 ‘스펙트럼’을 펼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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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계간평/백인덕/이토록 다채로운 시의 ‘스펙트럼’을 펼치며
이토록 다채로운 시의 ‘스펙트럼’을 펼치며
백인덕
1.
엄밀한 의미에서 필자는 ‘본질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현상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이 보는 관점에 따라 의미가 끝없이 달라지기 때문에 난 그 자체의 의미나 본질적인 가치 따위를 믿지 않는다. ‘시’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 거듭 언급했지만, 개념으로서의 시poetry는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속성을 갖는다. 물론 그것은 개별 작품(poet)을 통해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변경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을 만날 때, 그것이 겨냥하는 바가 시 작품이 아니라 시, 또는 시작이라는 근본 행위와 관련된다는 것에 특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모리스 블량쇼는 그의 책, 『문학의 공간』에서 “시를 파고들어가는 자는 모든 우상을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과 결별해야 한다. 진리를 지평선으로 삼지도 말 것이며, 미래를 그가 머무를 곳으로 삼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희망을 가질 권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절망해야 한다. 시를 파고들어가 는 자는 죽은 자이다. 심연과 같은 자신의 죽음과 해후하는 자.”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심연’이라고 표현된 극한까지 자신을 끌고 가는 것, 그것이 시인의 첫째 자격이라는 것이다. ‘절망’, ‘죽은 자’, ‘자신의 죽음’ 등에서 누군가는 배타적 엘리트주의나 낭만적 천재성 등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뜻은 단 한 편의 작품을 위해서도 자신의 전 생을 걸 수 있어야 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기로 한다.
높아질수록 거칠어질수록
대화가, 마주보던 대원들의 표정이
돌부리에 채이며 쓰러질 뻔한 숨소리가
있지도 않았던 일처럼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침묵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어둠일까
눈뜰 수 없는 설원의 밝음일까
겹겹이 껴 입었지만
불편하도록 두꺼운 장갑과
삼중화를 스미고 들어오는
바라보는 눈빛을, 소리를,
만용과 깍지 꼈던 자신감까지 얼려버리는
저 비탈의 정리되지 않은 높이의 힘
처참한 사고의 상상
걸을수록 그만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 안 깊숙한 곳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덜그럭거리고 있는
새파랗게 질려서,
투명한 알몸처럼 감춰지지 않는
그러나 있지도 않았던 일 같았던
없을 곳에 대한 사라지지 못한 끌림이
없던 소리가, 없어진 소리가
오르기로 오르겠다고 결정했던 처음 그것이
걸음이 되어 걸음이 되어
여기를 오르고 있다.
―최영규, 「처음, 그것이-안데스·35」 전문
지난 호에 ‘오늘의 시인’을 장식한 최영규 시인은 조금은 시각을 달리해서 모리스 블랑쇼의 명제를 ‘체화體化’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재직 시 시협의 깃발을 들고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원정길에도 오른 적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렇다고 전문 산악인이나 산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와 산’을 두 개의 운명의 짝처럼 생각한다. 안데스 고원에서의 고투,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선 길이기에 어떤 변명이나 불만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그 행위 속에서도 고난이 주는 대화 단절의 순간을 “침묵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어둠일까/눈뜰 수 없는 설원의 밝음일까” 마음 한켠의 두려움을 숨길 수 없다. 비단 시인에게서 뿐만 아니라 시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서 바로 이런 순간이 반드시 찾아든다. 그때 우리는 ‘변명이나 불만’을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인용 작품의 마지막 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있지도 않았던 일 같았던/없을 곳에 대한 사라지지 못한 끌림이/없던 소리가, 없어진 소리가/오르기로 오르겠다고 결정했던 처음 그것이/걸음이 되어 걸음이 되어/여기를 오르고 있다.” 즉, 처음 결정이 고난에 직면한 순간에도 ‘걸음이 되어’ 극한의 끝으로 자신을 밀고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임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 행위 모두가 이처럼 비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인은 낮은 자세에서, 아니 자세를 낮춰 뭇 생명의 행위를 관찰, 해석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대신 반추해 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거미 한 마리 집안 곳곳을 스캔하고 있다
허공도 아닌데 긴 실타래로 길 만들며 숨을 곳 찾느라 여념이 없다
창문 밖 문틀 사이에 이십여 칸짜리 집 지어 놓고도
무슨 연유로 겁 없이 방을 헤집고 들어온 것인가
나는 손바닥 펴들고 내리치려다가
줄을 타고 어느 건물 벽에 납작 붙어 있던
한 사내를 떠올린다
그는 유리 닦다 말고 안쪽을 바라보며 일손을 멈추었다
누군가를 본 것인지, 그 안의 삶이 부러운 것인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거리는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공중에 매달린 채 그대로 생을 접으려 한 것인가
거미는 집안으로 들어와 허공의 생을 피하려 할 뿐
자기가 내쏟은 실타래로 몸을 감지 않는다
―강경애, 「거미」 전문
지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낯설고 먼 공간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대부분은 언제나 낯익고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곳에서 자동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단순한 행위들로 채워져 있다. 시인의 시선은 “집안 곳곳을 스캔하고 있”는 ‘커다란 거미’ 한 마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줄을 뽑아 허공에 길 만들며 그 거미는 방 안, 즉 나의 공간에 무단 침입해 “숨을 곳 찾느라 여념이 없다.” 그 침입이 반가울 리 만무하다. 게다가 거미는 이미 “창문 밖 문틀 사이에 이십여 칸짜리 집”을 지어놓았다. 언뜻 생각하면 욕심이 과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손바닥을 펴들고 내리치려다가” 문득 멈춘다. 왜, 여기서 생명이니 타자니 하는 생경한 담론이 등장한다면 이 작품은 순간 밸런스를 잃고 부조화의 늪으로 던져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시인은 자신의 경험, “줄을 타고 어느 건물 벽에 납작 붙어 있던/한 사내를 떠올린다: 그는 ”유리를 닦다 말고 안쪽을 바라보며 일손을 멈추“고 있다. 밖과 안이라는 공간의 대비 개념이 ‘거미’와 ‘한 사내’를 ‘줄’을 통해 단단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공간인 ‘방(안)’이 ”허공의 생을 피하려 할 뿐인“ 거미에게 잠시 내어주어도 괜찮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그 ‘한 사내’의 뒷이야기는 그저 상상으로 메워야 할 뿐이지만, 그가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오래도록 안의 공간, 또는 삶을 응시했다면 분명히 어떤 형태로든 결과에 도달했을 것이다. 또는 그렇게 믿는 것이 시의 최대한이다.
2.
지나치게 거대한 서사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소재’로 해서 시의 ‘위의威儀’를 증명하려고 하는 행위는 십분 양보하고 이해하려고 해도 두말할 나위 없이 속물적 근성이다. 그런데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같은 경우를 꾀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목격하게 된다. 이른바 일류잡지라고 대중매체에 선전된 지면에 작품을 게재하고 그것을 각종 전자매체에 전사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불행하게도 이 땅에는 자기 지향이나 주의를 가졌거나 뚜렷한 편집 방향을 천명하고 거기에 충실하게 지면을 꾸미는 문예지는 전무하다. 얘기가 좀 벗어났지만, 이 땅의 시는 다 도토리 알 만하고 그래서 빨리 썩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많이 열리기도 하지만 잘 떨어지기도 해서 도토리, 멧돼지 등 뭇 생명의 양식이 되기에 족하다. 뭐 그 정도면 시의 존재 이유가 하나쯤 설명되고도 남지 않겠는가.
일찍이 옥타비오 파스는 저서, 『활과 리라』에서 “시 쓰기가 보여주는 것은,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 조건의 양면성 중의 한 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한 면은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태어남은 죽음을 포함한다. 그러나 죽음과 삶이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태어남은 부족과 형벌의 동의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시를 쓴다는 것의 최종적 의미.”라고 정의했다. ‘죽음’이 아니라 ‘삶’을, 쇠락이 끝내는 다시 올 번성의 약속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부드럽게 쏙 빠질 때가 있다.
느낌 아니까
되돌아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오호! 예술이군
아주 멋진 구성
이럴 땐 물도 내리기 아깝지
어느 설치미술 작가라도 부르고 싶다.
인생도 때때로 멋진 똥빨처럼
잘 쏟아져 내릴 때가 있지
가끔 뒤를 한 번 보자
어제 통쾌하게 먹어치운 보고서의 힘
그 색 그 냄새가 내 속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하, 오늘 똥빨 좋군
참 꼬들꼬들한 아침이다.
―임호상, 「똥빨」 전문
시인은 돌발적인 소재를 통해, 정말 그의 표현처럼 ‘꼬들꼬들한 ’ 작품을 완성했다. 소재도 소재지만 이를 위트 있게 뽑아 낸 솜씨가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시인의 ‘시빨’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다. “오호, 예술이군/아주 멋진 구성/…/어느 설치미술 작가라도 부르고 싶다.”는 것은 결국 과장이고, 이 과장은 ‘해학적 뉘앙스’를 의도한 것이고, 이 의도는 매일 아침, 즉 일상의 하루를 한번 쯤 별다르게 만들고 싶은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몸마저 소화불량과 변비에 시달리는 필자도 이렇게 '부드럽게 쏙 빠‘져 주는 어떤 “참 꼬들꼬들한 아침’을 꼭 한번 쯤 맞이하고 싶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이점 때문에 이 땅의 시인들은 ‘아침’이라는 시간 단위만큼이나 ‘가을’이라는 계절에 자연스럽게 많은 소회를 품게 된다.
나뭇잎이 살을 스치며 속삭인다.
허공에 바람소리로 번진다.
노쇠한 햇살이 기러기 무리 따라 선을 그리고
선은 너울대며 길게 사연을 뿌리고 있다.
아직 잊지 않았지. 너와의 속삭임
잎잎마다 불콰한 모습으로 마무리되고
아무 일도 알 수 없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으로 풍경만이 자리를 잇는다.
해야 할 일을 다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얼룩진 잎을 떠나야 한다.
언제나처럼
사랑하는 사이의 기약이 되니
애써 건조한 소리로 바람에게 부탁한다.
잎이 부딪히며 서로의 곁을 어루만진다.
―정무현, 「뱀이 동면에 들려고」 전문 (《리토피아》, 2018, 봄호)
시인은 계절의 소회를 ‘나뭇잎’, ‘기러기’, ‘건조한 바람’ 등을 통해 가을임을 환기하면서 어떤 ‘약속’의 불발不發과 유효성을 되묻고 있다. 가을 단상으로서 자칫 지나친 자기 감상에 빠져들 위험이 있었지만, 정무현 시인은 예의 그의 돌발적인 사유와 입담으로 이 위험을 지워낸다. 낙엽을 ‘잎마다 불콰한’이라고 표현한 것은 전조前兆일 뿐이고, 제목에서 시인의 참 능력이 드러난다. 가을의 쇠락이 결국은 “뱀이 동면에 들려고”, 아 낙엽이 지는 시기가 또한 뱀이 동면에 드는 시기와 얼추 같다는 것을 다 알았겠지만, 이렇게 시의 제목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던가. 필자가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색다르고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삶’과 비록 죽음과 꼬리를 문 형국이지만 살아간다는 것의 경쾌함을 노래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지난 호도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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