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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산문/우성희/서울사람도 고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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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25회 작성일 19-07-0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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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산문/우성희/서울사람도 고향은 있다


서울사람도 고향은 있다


우성희



  강남의 P호텔에서 저녁 모임이 있어 중랑천 변을 따라 동부 간선 도로를 달렸다. 이른 저녁 태릉 나들목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천변의 둔치에는 여러 가지 운동시설이 잘 비치되어있어 많은 사람이 여유롭게 주말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코트에서 땀 흘리며 농구를 하는 젊은이들, 자전거 타는 이, 조깅하는 사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이, 그 외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냇물은 크게 S자를 그리며 유유히 흐르고 개울 한가운데 해오라기인지 이름 모를 물새가 한 다리로 서서 지는 해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이다. 생각은 거슬러 올라 과거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할아버지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어야 진짜 서울사람이라지만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어쩔 수 없이 서울 사람이다. 남에게 신세지기 싫어하고 내 것 남 주는 것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서울깍쟁이, 말 그대로 서울내기다. 어머니는 왕십리의 철도 관사에서 나를 낳으셨단다. 일제하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본인 회사에서 근무하시던 부친은 해방과 함께 실업자가 되었다. 어렵사리 서울 생활을 꾸려가던 아버지는 한국동란으로 고향인 대전으로 피난을 가셨다. 어린 나이에 공부 때문에, 홀로되신 할머니와 함께 떠나야 했던 그, 말뿐인 고향으로.


  유아기를 대전에서 보내긴 했지만 나는 그곳에 대한 추억이 없다.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시골 출신 동무들은 자랑 섞어 얘기한다. ‘가난했지만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자랐다고, 주위가 온통 들이고 산이었다고, 한 발짝 나서면 온통 논이고 밭인 그런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을 해 보지만 무리다. 그곳 대전도 도회지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피난살이 하던 그 집은 역전 동네여서 아무리 50년대였다지만 목가적인 풍경은 없다. 어릴 때부터 살아온 서울 역시 그렇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 고등학교까지 지방 출신 동무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지방 출신이라 해도 어릴 때 부모 따라 올라온 서울 거주자들이라 촌놈 냄새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시골 출신 지인들이 생겨나고 사회생활을 거치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생겼다. 초임 관리자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부하 직원에게 뭔가를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홀팡다예?”
  라고 되물어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전혀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 지방 선배 직원이,

  “전부 다요?’라고 묻는 겁니다.”
  하고 통역을 해주었다. 웃지 못할 촌극이었다. 군대 경험이 없는 나는 그즈음에야 영호남의 묘한 갈등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지만, 지금껏 어느 지방에 대해서든 호불호는   없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이런저런 술자리가 있다. 그중 많이 성공한 지방 출신 친구와의 만남도 있다. 그때, 거나해져 기분이 좋아지면 나는 가끔 웃으며 이런 말을 한다.
  “촌놈, 서울 올라와서 출세했네?”
  어쩔 수 없이 가끔씩 보이는 그의 순수함이랄까? 때 묻지 않은 촌스러움이 귀엽기도 하고 ‘촌놈 주제에 서울놈 보다 잘나가?’ 하는 텃세 비슷한 감정이 섞인 농이다. 상대방은 늘 허허 웃고 말므로, 그 속까지야 내가 알 수 없다. 그냥 ‘출세 못 한 서울놈의 푸념쯤으로 듣고 말겠지 하고 치부하고 만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 북새통인 서울역이나 꽉 막힌 고속도로를 보면서 지방 출신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이냐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헛일이다. 정지용의 ‘향수’가 그려내는 그런 그림같은고향이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감정 달래기’일 뿐이다. 시골 출신 지인들이 ‘서울사람들은 고향이 없다’고 단정하듯 말해도 뚜렷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잊고 있었을 뿐이다. 달리는 차 창 밖의 풍경이 스르르 그 옛날 강가로 변하기 시작한다.


  미아 사거리에 있는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는 지금의 노원구 월계동의 꿈의 숲 고개를 넘고 있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내리막길이 실뱀처럼 구불구불 가늘고 길게 이어져 내려간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오솔길엔 지게에 엿 목판을 지고 가위를 절그렁 거리는 엿장수 아저씨가 우리를 앞서가고 있고 꿈의 숲 입구쯤에 있던 초가지붕이 정겨운 주막에선 오가던 길손들이 탁배기 한사발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우리는 내처 걸어 강 같은 중랑천에 다다른다.


  자동차 전용도로도 둔치도 없는, 갈대와 잡풀만이 무성한 그 샛강의 모래는 말 그대로 은빛 이었다. 그 은빛 백사장위에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벌거숭이 우리들은 냇물로 뛰어들었다. 족대로 냇가 풀숲을 쑤셔대며 물고기를 잡았다. 개헤엄을 치면서 맑은 물 따라 흘러갔다가는 까르르 물보라를 일으키며 거슬러 뛰어 올라왔다. 해가 설핏 하도록 물장구치며, 고기 잡으며 놀았다. 배가 고프면 천변에 잘 자란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따먹고 목이 마르면 강물을 마셨다. 차가운 강물에 한기가 들면 냇가에 나란히 앉아 해바라기로 몸을 덥혔다. 잡은 물고기들은 됫병에 넣어 오지만 태반은 배를 허옇게 뒤집고 죽어버려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돌아가기 못내 아쉬워 뒤돌아보는 샛강에선 송사리가 튀고 은빛 백사장을 끼고 구불구불 냇물이 저녁 햇살에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지금 시골의 오염되지 않은 샛강 그대로다.  


  키 낮은 기와들이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는 골목안의 집에서는 놀이에 지치고 허기져 돌아온 우리를 늘 푸근한 어머니와 정다운 이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너무 늦었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저녁상은 반찬이 없어도 진수성창이었다. 꿀맛 같은 저녁밥을 달게 먹고 나면 곧바로 골목에 나와 닭쌈 등을 하며 어둡도록 어울려 놀았다. 
그랬다. 서울사람도 고향이 있다. 잊고 살았던 우리의 고향이!





*우성희 2013년 《한국산문》으로 등단. 수필집『내 인생의 작은 뜨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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