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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기획탐방/정미소/월미산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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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42회 작성일 19-07-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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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기획탐방/정미소/월미산 둘레길


월미산 둘레길


정미소



  막비시동인들과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에 있는 ‘월미공원’ 내 월미산 둘레 길을 걸었다. 날씨가 포근하여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며 걷기에 좋았다. 월미산은 산새가 아담하고 몇 갈래의 아름다운 길을 열어두고 있었다. 달빛누리길, 월미둘레길, 산마루길, 돈대길, 숲 열림 길, 숲 오름길, 숲속의 쉼터길, 노을 길. 일행은 월미둘레길 쪽으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길의 구간마다 월미산에 서식하는 곤충과 동물, 식물, 역사를 안내하는 사진과 글이 발길을 끌었다.


  월미산은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지키던 군사기지였고 개항기에는 조선에 들어오기 위한 배들이 머무는 첫 기착지였다고 한다. 6.25전쟁 시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 지점이었으며, 그 후 50년 동안 군부대가 주둔하다가 2001년도에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고 한다. 월미산은 사면을 바다로 에두른 풍광이 빼어난 곳이지만, 지정학적 위치 때문인지 큰 상처를 안고 있었다. 6.25당시 연합군과 맥아더장군이 이끄는 인천상륙작전의 돌격부대인 미 해병1사단이, 8월 중순 미국본토의 서해안에서 출발하여 9월 3일에는 일본 고베에 도착하여 전투 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을 탑재한 후, 9월11일에 인천으로 출항하였다. 그리고 미해병5연대와 한국해병대는 부산에서 전투병력과 장비 및 보급품을 싣고 9월 12일에 인천으로 출항하였다. 9월 14일, 인천 앞바다 해상 목표지점에 집결하여 9월 15일 오전 5시 45분, 아침 밀물시간을 이용하여 항공모함이 선두로 공중폭격과 함께 함포사격을 실시하면서 오전 8시에 월미도를 탈취하였다고 한다.


  며칠 동안의 포격이 끝난 후 월미산에는 사람은 물론 개미도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함포사격이 우박처럼 쏟아졌다고 하니, 화염 속에 민가와 나무는 물론 풀 한 포기조차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상상되었다. 일행은 ‘평화의 어머니나무’라고 명명하는 노구의 느티나무 아래서 폐허의 땅에도 봄이 움트는 강인한 뿌리의 근성을 읽었다. 고통은 느티나무가 더욱 깊게 뿌리를 박도록 한 것일까? 지렛대에 몸을 의지한 우듬지에 평수 넓은 까치집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해풍으로 집 안팎을 소독하고 있었다. 조금 더 오르니 인천시의 산림녹화로, 초토화된 월미산을 사계절 꽃길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월미산에 자생하고 있는 야생화의 종류를 안내해 주는 안내판의 세심함이 있었다. 말나리, 맥문동, 바위취, 흰젖제비꽃, 노랑조팝나무…… 하얀 꽃을 쌀 튀밥처럼 열어 허리를 휜 조팝나무의 흰 꽃만 보았던 터라, 노랑 조팝나무와 개나리를 연상해 보았다.


  돈대삼거리에서 월미돈대와 월미포대의 둥근 원형의 방어벽에 기대어  바다를 보았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말끔하게 사라진 하늘과 바다가 한 몸이 되어, 집채만 한 배를 예인하고 있었다. 붉은 깃발과 한자로 적힌 배의 국적을 보아 중국에서 오는 배 같았다. 배의 이름이 궁금하여 곁에 있는 장 종권 선생님께 한자를 좀 읽어달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안 보여서 못 읽고, 나는 몰라서 못 읽어서 순간 까막눈으로 통했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기 곤란한 능선이나 계곡, 또는 해안가에 흙이나 돌을 쌓아서 만든 작은 규모의 방어물을 일컫는다고 한다. 월미돈대의 축조연도는 외국세력의 접근이 활발하던 조선조 후기 숙종 때로 추정한다. 당시대의 인천과 월미도를 지키는 중요한 군사시설의 기능 중 하나였다고 하여, 일행은 돈대의 방어벽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월미산 정상으로 오르는 팻말을 따라 숨고르기를 했다. 걷기도 바쁜데 입도 쉬지 않아서 겨우내 얼었던 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전망대의 아치형층계를 따라서 오르니 사면四面의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멀리 인천대교와 청라신도시, 월미선착장에 정박한 유람선과 한국이민사박물관, 부둣가 승선장에 도열한 승용차의 출국에 부푼 꿈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해사고등학교와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있는 쪽을 기웃거리니 배낭 속의 오렌지와 캔맥주 생각이 났다. 전망대를 내려와 파라솔을 걷어낸 탁자에 모여앉아 목을 축였다. 포근한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축복이라는 덕담을 나누었다. 가벼워진  배낭을 어깨에 걸며, 예포대와 무궁화동산이 있는 숲 오름길로 행선지를 잡았다. 예포대는 인천항에 입항하는 선박을 환영하기 위하여 포를 발사하던 곳으로 서해번창과 안녕을 기원한 곳이었다. 예포대와 걸맞게 길의 양쪽으로 무궁화동산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조성된 무궁화의 품종은 우리나라 고유품종인 옥선, 옥토끼, 선덕, 원화, 칠보, 한사랑, 파랑새, 자배, 아사달, 새아사달의 품종을 식수하였다고 한다. 무궁화는 수많은 외세의 침입에도 면면히 살아남는 우리민족의 민족성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활엽수종으로 병충해에 강한 생명력의 꽃대에 슬쩍 입맞춤 했다.


  월미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 왼쪽으로 ‘아타고신사’가 자리했던 흔적이 있었다. 일본은 식민지로 획득하는 나라에는 예외 없이 신사를 세우고 숭배하였다고 한다. 인천에도 1889년 일본거류민 중 유력자인 14인이 발기하여 ‘인천대신궁’을 착수하여, 일본의 수호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인천신사의 경외사인 월미산 정상의 아타고신사는 교토의 아타고야마에 있는 아타고신사가 총본산이며, 해방 후 파괴되었다고 한다. 봉안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남아 있었는데, 그나마 한국전쟁 후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신사를 세울 때, 한국의 뿌리가 되는 곳이나 한국의 정기를 누를 수 있는 산봉우리의 정상에 있는 터를 주로 잡았다고 한다. 씁쓸한 마음으로 월미산 정상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두 팔 벌려 바다를 불렀다. 인천대교 아래로 섬처럼 바다에 몸을 맡긴 모래 채취선과 통통배가 느긋한 정오의 햇살에 일렁이고 있었다. 일행은 인천시에서 월미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 ‘산과 바다를 품어라!’라는 슬로건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남겼다.


  아무리 좋은 풍광도 식후경이다. 일행은 점심식사를 예약한 월미도선착장의 음식점 위치를 점검하며 산마루길을 따라 하산했다. 월미산에 맹꽁이와 뱀이 서식한다는 안내표지판에 눈길이 갔다. 구한 말, 풀밭만 있어서 대머리섬으로 불렸던 기록과 함께 당시의 민초들이 살아가는 생활상이 그려졌다. 초가와 부뚜막과 아궁이와 굴뚝의 연기와 땔감으로 사용되었을 검불과 나무들의 훼손이 짐작이 갔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전쟁물자의 조달을 목적으로 산림녹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아까시나무가 심어졌고, 유원지의 조성을 위해 벚나무와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다. 이 나무들도 1950년 인천상륙작전의 집중포화로 벌거숭이산이 되고 말았는데, 맹꽁이와 뱀이 서식한다는 말은 놀라웠다. 살모사와 아무르장지뱀, 청개구리, 참개구리, 유혈목이. 개인적으로 동물 중 가장 무서운 동물이 뱀인데, 인천시에서는 개구리와 뱀은 혐오동물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과 같이 살아가야 할 생명으로 보호해야 할 동물이라고 하며, 걷다가 뱀이 보이면 놀라지 말고 생김새를 살펴보라고 한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뱀을 만나면 “안녕, 잘 살아!” 인사도 할 것 같았다.


  월미산에는 지난 100여년을 건너오면서 깊은 상처와 아픔을 딛고 일어 선 아홉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었다. 치유의 나무(은행나무),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은행나무), 평화의 어머니 나무(느티나무), 영원한 친구나무(상수리나무), 다시 일어 선 나무(벚나무), 향기로 이야기하는 나무(화백), 장군나무(소나무), 사랑의 나무(연리지소나무), 학자나무(쉬나무). 한결 같이 오래 된 풍상과 고초가 한 몸에 느껴지는 뿌리가 깊은 나무들이었다. 뿌리가 한 몸인 연리지 소나무 곁에는 사랑의 포토존이 설치되어, 둘레길로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무한대의 하트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일행들도 포토존에 빼곡히 모여 “월미산, 파이팅! 막비시동인, 파이팅!”을 외쳤다. 대머리섬, 천둥벌거숭이산이 양서류와 파충류의 서식지가 되었고, 야생화와 무궁화가 피는 아름다운 산이 되었다. 새들이 둥지를 짓고, 곤충과 이름을 알 수 없는 미물들이 목숨을 이어가는 땅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땅에 국가재건의 산림녹화운동이 떠올랐다. 한 그루, 한 그루, 식수를 하였던 온 국민의 나라 살리는 손길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월미산에 주둔하였던 군군장병들의 노고가 느껴졌다. 오늘의 월미공원과 월미산의 신화는 인천시와 인천시민과 월미공원의 관계자들이 만들어 낸 ‘생명의 녹색왕관’이라고 생각한다. 월미산에 올라, 산과 바다를 품고 하산하는 길에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로움을 기억했다. 





*정미소 2011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구상나무 광배』,『벼락의 꼬리』. 막비시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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