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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권두칼럼/백인덕/순리順理와 천지불인天地不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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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34회 작성일 19-07-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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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권두칼럼/백인덕/순리順理와 천지불인天地不仁


순리順理와 천지불인天地不仁


백인덕



  올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역대 급 폭염, 기상관측 이후 기록적으로 지속된 열대야 등 요란하게 더웠다. 사실 모든 여름이 그랬을 것이다. 다만 내 몸은 지난여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리 영상과 통계의 증거를 디밀더라도 몸은 현재에 격렬하게 반응할 뿐, 이미 지나간 자극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는다. 무더웠다는 건 기후에 대한 느낌이지만, 뜨거웠다고 말해야 하는 건 사정이 좀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적폐 청산, 미투 운동, 양극화 해소 등 몸 밖이 아니라 안에서 열을 차오르게 하는 숱한 이슈들에 둘러싸여 있다. 뜨겁다는 건 에너지가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고, 에너지가 순환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격렬함이 주는 피로도 분명 존재한다. 무더위 때문에 에어컨 사용시간이 늘어 다음 달의 전기료 폭탄을 짜증과 함께 기다려야 하듯, 터져 나오는 온갖 이슈들 때문에 성숙하기도 전에 지쳐 늙어버리게 하지는 않을까 내심 두렵다. 모든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거리로 나서 격렬하게 부딪히고 또 다른 지점에 가 닿아 더 커다란 동요를 초래하는 것을 민주주의 산 증거라 한다면 사실 별로 할 말은 없다. 입 다물라는 강요가 끝나자 입 다물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 숨통을 죄어드는 느낌, 그냥 한 개인으로서 우리 사회가 너무 불필요한 피로까지 공유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닌지 참으려 해도 볼멘소리가 이죽이죽 삐져나온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한 분의 은사가 있다. 올 초 열반에 드신 이승훈 시인이다. 시를 배우고, 힘입어 등단하고, 연구에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기록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고, 그 밖에는 음으로 양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곰곰 돌아보니 최근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은 ‘천지불인’이라는 한마디다. 어려서 처음 뵀을 때부터 당신은 늘 무언가에 중독된 상태였다. 가령 박카스, 사과, 담배, 커피, 맥주와 두통, 기침, 배호 같은 것들이었다. 박카스는 꼭 한 병을 따서 정확하게 반병을 드시고, 창가에 두었다(그 연구실에는 냉장고가 없었다)가 해질 무렵에 나머지 반을 비웠다. 학부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방에 불려갔을 때는 십중팔구 오전에 인사드리러 갔다 그때 딴 박카스 반병을 내가 마셨을 때였다. 즉 반병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당신에게는 새로운 한 병이 있을 뿐이고 정작 필요한 건 반병이고 내일은 내일의 박카스가 있으므로 그 나머지 반병을 처리할 수단이 필요했는데 오전에 반병을 마신 내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승훈 선생님의 중독은 좀 강박적인 데가 있었다. 시력을 보더라도 ‘비대상’, ‘비빔밥시론’, ‘선시론’이 다 언어에 대한 일종의 강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시’가 아니라 진짜 문제는 ‘언어’라는 것이다.
  뜬금없는 얘기, 자세하게 밝힐 수도 없는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그저 추측해 보자면 중독은 병으로 연결되고, 병듦에 대한 인식은 곧바로 종말에 대해 사유하게 하고, 그 사유는 일종의 인생관을 만든다. 늦은 것 같지만, 결코 이런 행보는 늦는 법이 없다.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완성의 바로 한 발 앞에서는 누구나 죽음을 예감하고, 그 죽음의 가치를 스스로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지불인’이란 인생관이고 세계관이다. 자연이 너그럽지 않다는 데서 페시미즘을 읽든 호의호식의 궁색한 핑계라고 치부하든 그것은 순전히 읽는 이의 권한이고 자유다. 어쨌든 올 여름은 유난히 ‘천지불인’이 입속을 맴돌았다. 이 폭염 속에서도 사람들은 싸우고, 일하고, 유람에 나서고, 공부하고, 아이를 낳고 심지어 이런저런 이유와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죽기까지 했다. 한반도 전체가 딱 멈춰 설 것 같았지만 단 한 순간도 짐짓 멈추는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이 치열함 속에서 나는 한가롭게 가혹함을 읽어내려 끙끙대고 있었고, 끊임없이 천지불인을 되뇌이고 있었다.


일찍이, “여기 묻힌 이 사람/그냥 태어나 살다 죽다”//고 쓴 ‘사람’도 죽었다.//고 쓴 ‘사람’도 죽었다.//고 쓴 ‘사람’도 죽었다//고 쓴 ‘사람’도 죽었다.//… … … …//이 시를 쓰는 ‘사람’도/필경에는 죽을 것이다.//이 시를 읽는 ‘사람’도/언젠가는 죽을 것이다.//모두, 기뻐하라!/이 놀라운 평등과 화해. -졸시, 「기쁜 묘비명」 전문


  폭염의 여파로 아직도 멍한 머리를 마구 흔들어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약』(리토피아, 2004)에 수록된 시 한 편을 찾아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죽은 자가 기억되는 몇 가지 방식에 대한 책을 읽고 ‘죽으면 다 끝’이라는 반발심 때문에 이 시를 썼던 것 같다. 어쨌든 천지불인이니 자연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는 방식은 나의 불멸이나 역사에 기록될 명예를 주장하기보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을 자연이 주는 선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낳지 않을까. 유리병에 갇힌 파리가 아무리 세차게 윙윙대도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지구라는 먼지 위에 앉아 윙윙거려봤자 백 년을 가지 못한다. 천 년의 욕심으로 살 이유가 없다.
  애타게 기다렸던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가자 바람은 잔뜩 가을 냄새를 묻혀 찾아온다. 저절로 계절이 이우는 게 느껴진다. 물론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신의 심술’(모기; 어떤 신부께서 ‘모든 피조물에는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취지의 주일 강론을 하시는데 모기 한 마리가 들어와 윙윙대자 참다못한 한 성도가 신부님께 모기에겐 어떤 뜻이 담겨있냐고 묻자 ‘신의 조크’라고 대답했다는 애기를 듣고 이를 변형했다) 밤마다 신경전을 벌이느라 꿀잠에 들지 못하고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좀 부족하다 싶어도 가지 수가 모자라는 결실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시의 현장도 마찬가지일 거라 믿는다. 자연이 그렇듯 문단도 ‘불인’이니까, 그러나 그 끝은 하나같을 테니까.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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