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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특집 오늘의시인/장순금/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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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1회 작성일 19-07-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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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특집 오늘의시인/장순금/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외 1편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 외 1편


장순금



할머니는 목욕탕 샤워기 앞에서 몸을 수십 번 헹구고 또 헹궈냈다
몸뚱아리에서 먼지와 오물이 쉴 새 없이 묻어나오는지 두 시간째 샤워기 앞이다 


땡볕에 무방비로 삐져나온 살 속으로 흙바람 욕설 눈총도 박혔는지, 악취도 몸속을 뚫고 들어왔는지
유효기간이 끝난 버려진 시간들이 할머니 발바닥에 달라붙어
세척을 강요했다


할머니는 몸 바꾸고 싶었을까, 물로 수백 번 씻어내면
오늘의 골판지 빈병 리어카가
내일은 가벼운 악보로 바뀔지 몰라
보송한 햇살이 몸 덥히는 따끈한 생이 아침 밥상에 오를지도,


날마다
내일은 향긋한 몸으로 햇살을 주워야지, 깨끗한 신발로 순정한 시간을 걸어야지
갓 나온 싹을 주워 서쪽에 버려진 봄을 사야지


한 번쯤은
비탈진 척추를 볕에 세우고 고른 길 파랗게 오르고 싶은,


남루한 생을 주워 담는 할머니는 등껍질에 수백 번 물을 끼얹으며
오물 묻은 허공을 씻고 또 씻고, 





목 메인 책



아버지가 햇빛을 지고 집을 나간 후 어머니가 젖은 달빛을 데리고 따라 나갔다
달빛은 제 그림자를 옆구리에 끼고 추억과 손잡고 나가는데 밤길이 따라 나섰다
마당은 누워서 집 나가는 식구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꽃들에게 피지 말라고 손짓했다


허공에 기습당한 책들은 진공 속에서 서로 손을 놓지 않았고 
움푹 패인 그늘은 목 메인 밥을 먹고 꿈을 꾸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열린 대문으로 봄은 태연히 들어오고
바람이 넘긴 책갈피 새로 뼈와 살이 발려진 계절이 
신열로 익은 문장을 먹으며 우거진 시간으로 빈 집을 채웠다
 
봄은 봉인되었고 떠도는 목소리들만 마당에 잡초처럼 들쭉날쭉 거렸다 


그늘은 날마다 제 그늘 속에 앉아 누군가 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대고 
대문은 새파랗게 언 발로 동구 밖까지 나와 서성거렸다


저기,
멀리서
목 메인 책 한 권이 맨발로 봄을 이고 오는 게 보이는지,  





<신작시>


크레파스 외 2편



외갓집 마당 오동나무에선 크레파스 냄새가 났다
어릴 적 부산스런 부산을 떠나 호롱불 외가에 와


처음 본 칠흑 밤하늘 속에서
공중에 혼자 떨어진 깜깜한 나를 처음 보았다


눈을 뜨고도 눈 감은 세상을 본 신비스런 문이 거기서 열렸다


지구가 검은 허공에 매달려 크레파스 짙은 향내를 흘리고 
스케치북에 그리다 만 오동나무 이파리들이 유년의 마당으로 떨어져


늦도록 마실 나간 밤이 돌아오지 않는 날엔
검은 산 속에 감긴 예감의 올을 한 올씩 풀어가며
알 수 없는 세상에 봄의 눈썹을 그려 넣으며 긴 울음 같은 끈적한 여름을 보냈다


깜장색 삼라만상은 어린 날 방학이 준 첫 환부의 인기척이었고 
 
크레파스 이파리들이 천연색으로 나부끼는 축축한 바람이었던,





양귀비



어머니는 텃밭 뒤꼍에 홍자주 빛 양귀비 두어 그루 심어놓으셨다


정성 들여 물을 주며 몰래 가꾸어 허공에 경계를 긋듯
우리를 앞마당에서만 놀게 하였다


세상 뒤편에서 홀로 몸꽃 올린 홍자주 빛
달빛을 홀려 경국지색으로 끌어내린 꽃의 힘은
경계를 넘은 색의 힘인가,
위험하니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라는 음성이 
한 세기를 거슬러 지하로 달리는데


나는 어머니의 뒤꼍이 궁금해졌다


꽃 같은 한 생애가 촌음 같아
관상용 처연한 아름다움에 몸 붙이고 싶었는지


황홀한 색으로 마취된 일년생 꽃이어도 좋다 여겼는지


허공에 앉아 봄을 내다보는 젊은 어머니





간극



간밤의 천지 진동한 폭우와 천둥에
살아있는 것들은 죄다 위태로웠다


번개는 별자리 바뀌는 억만 톤의 파동이었나
밤이 그 새 적도의 경계를 몇 차례 다녀왔는지 
짐승들 발굽소리 떼 지어 지나간 시간의
뒤편,
고요한 


아침,
말짱한 얼굴이 쨍 소리 내며 세상에 왔다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
햇살은 바람과 태연하고 하늘은 흰 구름과 놀고
도로는 침묵처럼 고요하고 깨끗했다


폭우와 맑음의 간극은 짧은 잠 한 숨인가
팔과 다리처럼 아는 얼굴인가


햇빛 한 장씩 맑음을 펼쳐보아도
너와 나 지척의 거리가
밤과 아침의 간극인지





<시론>


  나는 어떤 주술에 걸려 이 별로 스며들었을까,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반짝이는 시를 발견하곤 그 반짝임이 내 별일 거라 믿어, 도착하지 않은 예감을 기다리듯 오래 견디는 힘이 삶의 벼랑을 밀어내게 했다. 제 소리에도 제 살 베이는 줄 모르고 득음을 고집하다 되레 꿀꺽 삼킨 소리가 더 많은 이 망연자실의 몽매한 시의 인연은, 시라는 생불과 동행하는 이 버거운 삶의 인연은,  


  살산동자처럼 한 구절을 얻기 위해 목숨을 야차에게 바칠 수 있는 열정도 지났고 언어의 잠복기도 가난해지고 천천히 불행해진 시인으로 살아가는 농담도 하며 불규칙이 규칙이 되어 가는 변형된 시업의 여유로움인지 나태함인지,


  그래서 나는 날마다 추락하고 있다
  이미 내상을 입은 태생이 다른 짐승들이 매일 얼굴을 바꾸며 내 물러진 환부를 뒤적여 뭔가를 자꾸 들추어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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