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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신작특선/김성철/곰보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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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53회 작성일 19-07-0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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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신작특선/김성철/곰보 외 4편


곰보 외 4편


김성철



깜깜해지면 집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둠 엎어 쓰고 좁은 어깨 모아 잔뜩 웅크린 집
깜깜과 어둠의 경계는 비밀스런
움을 파고
다가가는 이가 있다면 발목을 먼저 삼켰다
어둠 짜는 소리가 담장을 넘을 때마다
사내는 한 장의 어둠을 펴 바른다고 누군가 말했다
집안을 훔쳐봤다던 녀석은 둥글고 환한 살이 올랐다고
소문처럼 눈을 부풀렸고
소문을 인 밤이면 사내는
폐품 같은 어둠들 사이로 달빛을 쟁였다
부푸는 소리도 없이 자란 그림자를 끌고
달빛을 거두러 창문을 기웃거리면
아이들은
이불 속 밥공기처럼 납작 엎드렸다
그런 날이면 사내가 거둔 달빛의 양을 궁금해하다
잠이 들었다


그믐 때가 되면 문이 활짝 열리고
차곡차곡 쟁인 달빛을 트럭 가득 실어
내다 판다던 집
환하게 부풀어 오른 사내의 얼굴이 촘촘히
어둠을 삼키고
그믐의 밤은 키가 무럭무럭 자랐다





그늘의 임대료



  쇠를 갈 때마다 그늘이 찾아왔다지요 우악스런 사내 손에 밀려 트이는 길은 스스로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 보였죠 길의 골목은 두 줄 혹은 세 줄로 새겨지겠지만 집주인 따라 골목의 두께도 다르겠지만 두께야 무슨 상관 있겠어요 상체 말아 어둠 틀어 안은 사내는 아랑곳없이 그늘을 쇳덩이에 새기고 있죠 쇳가루는 엄지 위에서 납작 엎드린 채 비늘 털고요
  사내의 무딘 표정은 골목 끝이 보일 때쯤이나 볼 수 있을까요? 목련꽃보다 둥근 백열전구가 봉긋이 불 피우면 사내는 굽은 상체 곧게 펴고선 골목의 깊이를 가늠하죠 그리고 입 모아 후- 열쇠 그늘이 우르르 뛰어 내리겠죠 저 이가 품은 어둠의 질량은 얼마큼의 무게일지 나는 털려진 어둠 죄다 모아 사내의 밑천을 세어보고 싶네요


  광화문 네거리 현대해상 모퉁이에는 열쇠수리공이 들어있고요 사내 품 안에는 밑천의 바닥 없는 그늘이 있고요 그늘 속에는 열쇠의 길이 골목으로 뻗어있고요 사내는 둥글게 말린 채 그늘의 임대료를 복사하고 있고요





뭉특한 일기장



투박했다
손도 면도칼도 깎아준 연필심도
날렵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촌 누이들에게 물려받은 옷은 죄다 컸다
소매를 접으면 밑단이 풀렸고
밑단을 접으면 무릎이 발목에서
부풀었다


소매 접은 손으로 일기를 썼고
밑단 접은 발로 계단과 학교를 끄시고 다녔다


엄마는 오늘도 늦으신다


일기장 글씨는 늘 굵었다





진눈깨비 편지



밤을 새며 반 재래식 화장실 가는데 말이지 이마 훤칠한 진눈깨비 몇 마리 가로등 빛 받으며 반짝이는 거지


깨진 변소 창 기웃거리며 나는 난생 처음 쓰임새란 말의 근원이 궁금해졌어 
화장실은 키보다 낮았지만 고개 꺾고 들어갈 만했거든 세상에 목 꺾고 몸 꺾고 들어가는 곳 한두 곳이겠어?
 
  화장실 나서면서 신축 중인 태양원룸을 바라보았어 거기서도 제 몸 추슬러 빡빡한 어둠을 솎아내며 날아오르는, 바람은 콘크리트 벽을 딛고서서 길을 터주고
나는 바지 앞섶도 닫지 못하고서는 엎어지고 말았어
고인 물은 얼지도 못하고 찰랑

 

나는 처박혔거나, 처박거나, 처박히길 원했는지도 몰라


진눈깨비의 자락이 젖은 아스팔트에 덤빈다는 것, 알싸하고 때론 후련한
나는 입김으로 제발, 제발 그리고 후- 후-
괸 물이 바람에 밀려 주름을 만들고


어제 뜬금없이 형이 보고 싶더라
반짝이는 눈발처럼, 화하게 핀 목련처럼
지린내 풀풀 날리며 고개 꺾은 변기처럼





불면



나는 귀신을 닮아가는 중이오.
서늘한 기운 몰아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개지 않는 안개를 만들고 있소.
길 잃은 자들의 방향성을 짐작하며 나는 밤의 혼란을 지배하오.
혼란 부재 주취의 흔적들 말이오.
누군가 찾아온다면 나는
문 걸어 잠근 채
영혼이 빠져 나간 사체가 될지도 모르오.
그때, 내가 깨지 않을 때
방의 불을 끄고
어둠의 사진을 찍길 바라오.
나는 천장에 붙은 채 입을 모아
안개의 휘파람을 불고 있을 것이오.
날 찾아온 당신의 방향성은
내 고이 간직할 테니
당신은
내 방 이불 위에서 무릎 모아 둥글게 말린 채
내가 겪었던 불면을 생생하게 바라보시오.





<시작메모>


부서진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너무 싫어서 도망쳤지만 늘 그 자리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를 꺼내 난도질하는 것. 뼈를 추리고 살점을 발라내 곱게 다진다.
부서지고 버려지고 울고 또 울다보니 빈 방이다.


바라본 세상은 수상하고 잔인했다.





*김성철 2006년 <영남일보> 「봉제동 삽화」시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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