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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신작특선/오세경/지구와 달 사이에는 인력引力이 있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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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76회 작성일 19-07-0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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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신작특선/오세경/지구와 달 사이에는 인력引力이 있다 외 4편


지구와 달 사이에는 인력引力이 있다 외 4편


오세경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있다
신비스럽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력引力***이 있다
섬도 타자他者도 허용치 않는
합일合一의 우연적 순간이 있다
정오正午가 있다


* 정현종
** 박찬일
*** 안도 야스코, ‘동물시계’ “인력이란 말이야 세상에 있는 것들이 서로 끌어당기려는 외롭고 쓸쓸한 힘이란다”  





1에서 10까지의 수를 써 보시오



초인종 소리, 보들레르의 새벽 1시, 이중열쇠의 시각, 환청?
2년째 접어드는 은거, 자발적 은자의 목록들, 꽉 찬 그리고 텅 빈,
웃말 3길, 내년부터 시행될 도로명 주소, 마실 갈 아랫말이 없는,
에밀리 디킨슨, 서랍 속 1700여 편의 시편들, 그녀의 사후 4년 만에 첫 출간되는,
검정A noir, 하양E blanc, 빨강I rouge, 초록U vert, 파랑O bleu, 랭보의 5색 모음들,
6주기, 케이크 위 이내 연소될 양초들, 도처에 그가, 여전히 연소되지 않는,
매일 7시간 이상의 수면, 그녀, 잠보다 더 뛰어난 삶의 쾌락은 알지 못한다던,
8요일이 없다, 바르샤바의 연인들 달력엔,
홀리모터스, 단 하루 한 남자에게 찾아온 9번의 다른 인생, 겹쳐지는 연암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10개의 손가락, 흑백의 건반 위를 질주하는, 대양을 광야를 심연을 넘나드는,


그는의사인그는명의인그는
주저없이1에서10까지의숫자로통증의정도를드러내줄것을명했다
너는환자인너는돌팔이인너는
그러나더듬거린다헤맨다땀흘린다뻘뻘진땀흘린다
셈할수없는가늠할수없는명백히드러낼수없는
숫자너머의세계로무한의세계로비스듬한세계로텅빈세계로
너의통증은너의광증은자꾸달아나고달아나고또달아나고
아주멀리도시속으로말을타고달아나기*
말도로르의노래에는185종류의동물들이등장한다고
185종류의 통증들이광증들이,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그녀는 바나나를 먹기는 하지만 오렌지를 더 좋아한다!



  오렌지가 없다


  오렌지가없어서바나나를먹는다, 오렌지가없어서선인장을심는다, 오렌지가없어서발톱을다듬는다, 오렌지가없어서칸나를꺾는다, 오렌지가없어서실로폰을두드린다, 오렌지가없어서창문을연다, 오렌지가없어서데킬라를마신다, 오렌지가없어서지도를펼친다, 오랜지가없어서바다로간다, 오렌지가없어서종이배를접는다, 오렌지가없어서모래성을쌓는다, 오렌지가없어서폐선을민다, 오렌지가없어서춤을춘다, 맨발의춤


  오렌지가 없다


  오렌지가없어서바나나를먹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선인장을심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발톱을다듬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칸나를꺾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실로폰을두드리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창문을열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데킬라를마시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지도를펼치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바다로가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종이배를접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모래성을쌓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폐선을밀긴해도, 오렌지가없어서춤을추긴해도, 불꽃놀이

오렌지만, 오렌지만, 오렌지 껍질만, 벗 긴 다





나는 눈에 비누가 들어갔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눈에 벌레가 들어갔다…눈에 빗물이 들어갔다


 만약 네가 지금 슬픔을 에둘러 드러내는 중이라면 그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겠으나 눈에 비누가 들어갔다는 건 실제상황에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실제상황이고 슬픔과는 아주 무관한 상황이라 잠시 눈은 쓰리고 따갑겠으나 눈의 비누쯤 물로 맑디맑은 물로 얼마든지 헹궈낼 수 있을 터


문제는 눈의 먼지…눈의 벌레…눈의 빗물
저 새빨간 거짓말 속 슬픔을 헹궈내는 일





내 스카프는 사각형이다



스카프가, 갇혀 있다, 네 스카프가, 각角에, 형形에, 갇혀 있다,


스카프는 사각의 틀을 곧 배반할 것이다 스카프는 접히고 묶이고 비비꼬여 사각의 각들을 허물 것이다 나부끼며 펄럭이며 휘날리며 완전탈피를 꿈꿀 것이다 허물 벗은 스카프가 하늘하늘 하늘거리며 하늘 저편으로 날아갈 것이다 사각 너머로 날아갈 것이다


(…그녀는 푸른 스카프로 사과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았어…)(…그녀의 목은 삐뚜름한 각도로 매달려 있었고…)*


문장들을 묶는 괄호들의, 단호한 괄호들의 비명이 날아가는 스카프를 겨냥할 것이다 스카프가, 사각 너머의 스카프가 진열대 위 켜켜이 포개진 사각의 스카프들 위로 돌연 불시착할 것이다 흐트러진 몸을 허물없이 누이며 비비며 섞으며 나누며 흩어져간 각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다시 각을 세우고 다시 각을 겨루는 네 스카프는,


네 개의 각이 모두 직각이고 마주보는 두 변의 길이가 똑같은 네 스카프는,


다시, 다시, 다시, 사각형이다,


괄호로부터, 삐뚜름한 각도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네 스카프는,


  *워터멜론 슈가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시의 제목들은 김진수의 <프랑스어 필수어휘 사전>에서 빌려왔다.





<시작메모>


*
저 시편들은 네가 애초에 기입하고자 했던 몸짓들일까? 부박한 삶에서 그토록 소환하고 싶었으나 소환되지 않던 갈망이자 절망인 바로 그 몸짓들일까?


*
2017년 5월에서 8월, 연작시 『질문들-50』 탈고.
그후 시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 채 일 년여의 시간들이 훌쩍.
활자에의 몰입을 전혀 허용치 않던 사유의 반란….
그러나 너는 이제 안다.
네가 시의 한데를 기웃거리는 동안에도 놈들은 네 안에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하여 어느 날,
느닷없는 놈들의 습격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지며 그들을 받아 안으리라는 것.


*
그해도 그러했다. 스스로 자신에게 하사한 휴식년, 낯선 해양도시 안산으로 이주, 칩거의 시간들을 보낸다. 프랑스어, 악보, 서적들 그리고 바다… 그들과 교유할 뿐, 이따금 태동처럼 꿈틀대는 시심들조차 매몰차게 떨치며 너는 그저 시의 외곽에 머물고자 한다. 나날들을 딴 짓거리로 산뜻하게 소일하고자 한다. 생활 밖의 생활에 집중코자 한다.

늦은 저녁 산책길, 술집 테라스의 술꾼들 곁을 지날 때면, 너도 생활이 그리운 게로구나…무심히 중얼거렸을 게다, 왁자한 분위기 속으로 슬몃 섞여들었을 게다, 열두 번도 더 빈 잔을 채웠을 게다, 여름… 가을…겨울…그리고 다시 봄…고립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간다.


시마詩魔였을까?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전날 학습한 프랑스어 문장 위로 겹쳐오던 사유, 더 이상 비껴갈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날 이후 매일 한 편의 시가 너의 아침을 깨운다. 미처 덜 깬 몸을 모로 누인 채 침상에서 그 웅얼거림을 받아 적는다.


49편-, 자폐의 기록이 끝날 무렵, 그해 유독 길었던 49일 간의 장마도 그친다.


생활 밖의 생활에 집중, 순간순간 희열감에 취해 조금씩 소진되고 있던 몸의 에너지를 다 놓친다. 이어 닥쳐온 병마, 오랜 사투 끝 뒤늦게 노고증후군인 공황장애였음을 알게 된다. 그 후 2년 정도의 회복기….


49제를 지내듯 흡사 제의처럼 쓴 도망에의, 도로徒勞에의 기록들. 미 발표작 시집으로 언젠가 발간하리라며, 이듬해 계간지에 발표한 두 편 외 나머지 시편들을 서랍 속 깊숙이 묻어둔다.


*
불현듯 요 며칠, 그 시편들을 불러내어 그날의 사유들을 반추하며 수정작업을 하던 중 《아라문학》의 청탁을 받는다. 아라…,


당신의 창 앞에 저 미완의 몸짓이 당도합니다. 닫힌 창을 두드리며 당신을 채근합니다. 누군가에게로 건너가는 도정道程, 그 두근거림 속에서 비로소 시詩는 완성될 테지요. 온전히 당신의 몸짓으로 화한 시가 또 하나의 세계를 여는 바로 그때.





*오세경 2008년 《시현실》로 등단. 시집 『발톱 다듬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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