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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신작시/황상순/봄날의 가벼운 담소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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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신작시/황상순/봄날의 가벼운 담소 외 1편
봄날의 가벼운 담소 외 1편
황상순
다시 돌아온 봄,
잎 지고 잎 돋고 잎 지고 다시 잎 돋고 동네 어귀 저 오랜 느티나무 가지에 달린 수천수만의 나뭇잎 중 하나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다.
단단한 골반뼈도 오래오래 전에 바람이 되어버린 태고 적, 옆 동굴의 한 마리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을까. 사과나무 뒤 숲속에서 이브를 범한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몇 방울의 물, 그 아들의 그 아들의 그 아들의 그 아들의 그 아들의 손자, 손자의 손자가 떨군 작은 물방울 씨앗.
하늘을 다 가린 화산재 속에서도 마르지 않고 대기근 대홍수에도 살아남아 이어지고 일차 이차 세계대전을 거쳐 페스트 장질부사 지독한 전염병에도, 임진왜란 육이오사변에도 요행스레 생존하여 면면히 이어져 지금까지 내려온 지엄한 사실에 대해,
뉴턴도 다윈도 호킹도 물 한 방울 남기고 스러지고 마침 해도 제법 길어진 날, 동병상련 그대와 난 서로 같은 처지 아닌가. 햇빛 맑고 그늘도 널찍한 이곳에서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하였는지, 끈질기게 이어지는 물의 고리 그 끝은 과연 어디인지 숨김없이 남김없이 까발려서,
봄바람처럼 가볍게 살랑살랑 얘기 한 번 나눠보세.
이사
집을 보러 온 젊은 부부가 귓속말을 했다
노인네가 사는 집이네
그렇다, 나도 마누라도 집도 강아지도
어느새 많이 늙었다
걸 맞는 새 집을 구했는지
그들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예쁜 아기 낳고 풋풋하게 잘 살아라
봄이, 저만치 앞장서서 이사를 가고 있다.
*황상순 1999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어름치 사랑』,『사과벌레의 여행』, 『농담』, 『오래된 약속』 등. 한국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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