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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산문/최숙미/순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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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74회 작성일 19-07-0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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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산문/최숙미/순애보


순애보


최숙미



“오빠, 오빠!”
오빠라니. 나도 모르게 계단을 후다닥 내려섰다. 5층에서 운동도 할 겸 3층 남성스포츠마사지실도 엿볼 겸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마사지실 주인이 바뀐 듯하더니 입구가 화려해졌다. 남성전용, 피로회복은 여전한데 아로마테라피와 발 마사지 광고가 더 붙었다. 주위를 살피며 2층으로 내려섰는데 3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허스키하나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빠, 오빠! 올라와요.”
‘누구를 부르는 거지?’
마사지실에서 cctv를 본 모양이다. 내 복장은 짧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문 앞에서 용기 내지 못하고 서성대다 내려가는 남자로 보였음직하다. 여자는 당연히 용기를 북돋워줘야 할 투철한 직업의식에 오빠를 불렀음이라. 후다닥 계단을 내려오는데 여자가 따라 내려오며 또 오빠를 부른다.
“오빠! 괜찮아요. 올라와요. 오빠, 오빠!”
괜찮다는 의미가 뭔지. 오빠니까 서비스를 잘 주겠다는 건지. 이대로 그녀와 대면한다면 얼마나 민망할까. 뛰어서 1층까지 내려오고 나니 그녀가 따라오지 않았다. 손님이 가버린 것으로 알았거나 내가 여자임을 눈치 챘다는 것이리라. 내가 그녀의 민망함을 봐 준 셈일까. 멈춰 서 볼걸 그랬나. 건물을 빠져나오고도 그녀가 내려다보고 있을까봐 올려다보지 않고 실체도 없는 19금 오빠에게만 입을 삐죽였다. 
  그 후로는 계단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승강기를 오르내릴 때도 오빠를 부르던 그녀를 만날까 봐 신경이 쓰여서다. 약간의 오기가 발동하기도 한다. 인사를 하고 나이 든 걸 빌미로 여자도 가도 되냐고 물어나 볼까. 남성전용이라며 소개해달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 정도의 상도는 지키리라 여기지만 건물의 남정네들을 부르는 묘수는 분명 부릴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승강기에서 만난 남편에게 음료수를 건네더란다. 영업을 한 셈이다. 언제든 와. 오빠! 괜찮아요. 용기를 내요. 특별 서비스 해드릴게요. 피로회복이라니깐요. 뭐 그런 의미였겠지. 이웃 가게 여사는 자기 남편은 그런 음료수도 못 받아온다고 매력이 없는 게 틀림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은 되레 그런 인사라도 하는 게 같은 건물에 있는 남자들에 대한 상도란다. 내 눈엔 빤한 묘수로 보이는구먼.
  승강기 앞에서 꽃을 든 중년 남자를 만났다. 꽃을 슬그머니 내리더니 3층을 누르고 승강이 문 앞으로 바짝 붙어 선다. 3층까지 가는 몇 초가 천 시간이라도 되는지 어깨를 몇 번이고 추스른다. 3층 승강기 문이 열리자 남자는 내렸던 꽃을 바로 들고 성큼 나간다. 사랑 고백에 한껏 들뜬 폼이다. 뒤통수를 한 방 날려주고 싶다. 남편은 얼마나 순정적이냐며 나에게 핀잔이다. 남의 순애보를 왜곡하지 말란다. 아이쿠, 순애보로구나. 인정해 주자. 남의 일이니까. 지고지순한 순애보의 풋풋한 단어를 곱씹어 본다.
  사회 첫발을 디딘 직장에서 오빠처럼 언니처럼 챙겨주던 남자가 있었다. 같은 종씨라 이성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언제나 내게 친절했다. 내가 게을러서 미뤄뒀던 장부 정리를 퇴근도 하지 않고 해 놓던 남자. 내가 감기라도 걸리면 안쓰러워 죽을 것 같은 눈빛으로 약을 사다 주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던 남자. 같은 종씨이고 사돈의 팔촌 같은 촌수를 따지며 사랑의 기류를 차단하던 남자. 어쩌다가 나와 영화를 보러 간다고 직장 상사에게 보고 하면 자연스레 허락을 해 주게끔 관계를 유지하던 남자. 내가 직장을 옮기고서도 깨나 오래토록 편지를 주고받았다. 돌아보면 날 잡아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 본 적은 없지만, 그 당시만 해도 종씨와의 혼인을 법이 허락지 않았기에 그 남자야말로 순애보의 애틋함을 품은 사랑을 하지 않았나 싶다. 나 역시 싫지는 않았어도 같은 이유로 이성의 감정을 밀어냈던 것 같다. 그 남자의 순애보가 어느 세월에 끝나고 말았지만 순애보의 진정성에 가깝지 않았을까.
  불륜이든 뭐든 순애보 자체는 아름다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 남편으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은 꽃을 든 남자의 순애보에 여성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고객의 돈주머니로만 보인다면 참으로 서글픈 순애보가 아닌가. 이유야 어떻든 꽃을 든 남자의 순애보에 여자는 기꺼이 코를 박았을 테지. 그런대도 순애보의 진정성은 꽃을 든 남자에게만 있을 것만 같아 짠하다.   
  건물 주차장에서 차 시동을 거는데 3층 여자가 다리가 풀린 노인의 팔을 뽑아버릴 듯 끌어안고 애교를 부리며 지나간다. 여자의 목소리가 한결 맑고 높아 콧소리가 차안에까지 들린다. 오빠를 한참 넘어섰으니 아빠라고 부르나. 노인의 표정은 이미 혼곤하다. 열 여자 마다 않는 남정네의 본성이 끈적거린다. 꽃을 든 남자의 순애보는 물 건너 간 건지, 노인의 순애보를 받아 줄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팔짱을 낀 품새가 대어라도 잡은 듯하다. 남성스포츠마사지의 진과가 발휘될 것을 기대하는 노인의 주머니는 얼마나 열려질까.
  순애보에는 애틋함은 있을지언정 상처는 금물이다. 꽃을 든 남자의 순애보는 애틋함보다는 상처와 체념만 있었지 싶다.
  오늘도 남성스포츠마사지는 얼마나 많은 순애보를 왜곡하며 오빠를 부를까.
  괜찮다고. 올라오라고.





*최숙미 2010년 《에세이문예》로 수필 등단. 2018년 《한국소설》 단편소설 등단. 수필집 『칼 가는 남자』, 『까치울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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