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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단편소설/김성달/누구나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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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2회 작성일 19-07-08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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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단편소설/김성달/누구나 다 안다


누구나 다 안다


김성달



  여자는 아침부터 불안한 기운에 열차의 선로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선로는 금방 햇빛이 만든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검붉은 색을 띠었다. 선로는 그 검붉은 색 사이로 은빛 잔주름을 아로새긴 채 움직임 없는 새파란 속살을 이따금 드러내곤 했다. 여자는 지난겨울 청년을 만난 이후로 부쩍 불안을 느끼는 날이 많아졌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이 결혼을 하자 떠밀듯이 억지로 이민을 내보낸 여자는 두 평 남짓한 지하철 가판대에 몸을 우벼 넣었다. 남편이 뛰어든 열차 선로가 빤히 보이는 가판대에 누에고치처럼 자리를 잡은 여자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선로를 만났다. 선로는 매일매일 여자를 미쳐버리게 할 만큼 기분 나쁘면서도, 마치 사형수의 목을 옥죄는 밧줄처럼 서서히 몸을 죄어왔다. 여자는 혼자서 저항하고 반항하지만 공허하기만 한 아침들을 보내면서 두려웠지만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의 시간을 견디며 여자는 점점 자신의 상처 속으로 침잠했다. 그 사이 몰라보게 늙어버린 얼굴에 비치는 여자의 나이는 선로의 명암에 따라 기묘하게 변하고 달라지기도 했다. 체념을 머리에 이고 사는 여자는 손님들에게 과자와 음료수 등을 팔면서도 웬만해선 가판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좀처럼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았다. 생리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따금 가판대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횟수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음식을 적게 먹었다. 점점 세상에 무감각해지면서 불안에도 둔감해졌다. 청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여자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들이 왁자지껄하게 내지르는 소리 너머 그녀가 겪은 죽음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점점 귀가 예민해지는가 싶더니 듣고 싶지 않아도 자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내뱉는 목소리가 한 덩어리로 들리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단독자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여자는 그 목소리들이 싫었다. 이야기 듣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사람들의 말은 온갖 변덕스러운 욕망 덩어리였다. 귀를 틀어막고 발버둥을 쳤지만 크고 작은 목소리와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까지도 여자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말과 말 사이사이에 낮게 이어지는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여자는 그때부터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귀로 세상을 보았다. 굳이 눈으로 상대를 보지 않아도 귀로 듣고 손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여자의 귀에 낯선 청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들려 온 것은 겨울 끝자락의 추위가 제법 매운 날이었다.
  “딱, 5분만 쉬면 좋겠다.”
  누군가와 통화 중인 청년의 목소리에 졸고 있던 여자는 저도 모르게 밖을 향해 고개를 내밀 뻔했다. 청년의 목소리가 듣기 좋거나 특별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에 박힌 절박함 때문이었다. 여자의 귀에 익숙한 절박함이었다. 20년 전 남편의 목소리가 그랬다. 열차가 들어오는 것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휴대폰 너머로 또렷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남편이 말했다.
  “한 푼도 없어. 단 한 푼도…….”
  심장에 박히는 남편의 절박한 목소리에 여자가 움찔하는 사이 열차가 들어오며 내뿜는 경적소리가 휴대폰 저편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무거운 정적만 남았다. 까마득한 침묵 속을 흘러 다니던 남편의 그 절박한 목소리를 여자는 평생 가슴에 묻었다. 20년 전의 그 절박함을 빼닮은 듯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청년의 목소리에 여자는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마음과 몸이 이렇게 쉽고도 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의외였다. 여자가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면 뒤숭숭한 마음이 잡히려나 싶어 몸을 일으킬 때였다.
  “이것 주세요.”
  순간 여자는 또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절박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여자는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컵라면을 손에 들고 내미는 청년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것같이 앳된 얼굴인데 좁은 미간 사이의 도톰한 주름이 인상적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군데군데 피곤이 마른버짐처럼 얹혀있었다. 쫓기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여자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잔돈과 나무젓가락을 내미는 여자에게 청년이 물었다.
  “혹시 뜨거운 물 좀 얻을 수 있어요?”
  열차 승강장에서는 조리한 음식을 판매할 수 없어 컵라면을 팔아도 뜨거운 물은 줄 수 없었다. 컵라면을 든 청년의 손이 추위에 가늘게 떨렸다. 귀밑까지 풀려 내려온 파마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저으려던 여자는 청년의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여자는 등을 돌려 점심 먹을 때 국을 데우는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찬물이 든 주전자를 올렸다. 그사이 청년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벨 음이 지하철 열차의 경적소리를 닮았다.
  “이곳 수리 끝내고 곧장 구로역으로 가야 해. 넌?”
  청년은 통화를 하면서도 여자 쪽을 흘끔거렸다. 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모습을 보며 여자는 비로소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무엇인가를 수리한다는 말에 가전제품의 서비스 기사인가 싶었지만 어깨에 멘 가방을 보니 그것도 아닌 듯 했다.  
  “뭘 수리하느라 그렇게 급하누?”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주면서 여자가 물었다. 머리를 꾸벅 숙이며 청년이 말했다.
  “스크린도어요.”
  청년의 말에 주전자를 잡은 여자의 손이 잠깐 흔들렸다. 스크린도어라는 말이 점점 부풀어 오르더니 가판대 안을 꽉 채우는 것 같았다. 여자는 숨을 쉴 수 없는 것 같은 답답함에 두어 번 호흡을 크게 뱉으며 청년의 등 뒤로 보이는 스크린도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차가운 아니 어쩌면 아주 뜨거운 것이었는지도 모를 뭔가가 갑자기 여자의 심장 위에 놓이는 것 같았다. 양손으로 컵라면을 움켜잡고 선로 끝 의자로 걸어간 청년은 순식간에 컵라면을 먹어치웠다.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자는 청년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쓰레기통에 빈 컵을 던진 청년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자의 귀에 청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고장 연락을 받고 15분 전에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장애물감지센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리 후 곧바로 구로역으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청년은 들어오는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고장 난 스크린도어 안으로 들어가 수리를 시작했다. 청년을 지켜보던 여자는 아슬아슬한 느낌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다행히 다음 열차가 들어오기 전에 수리를 끝낸 청년은 시커먼 기름이 묻은 장갑을 벗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승강장으로 들어온 열차를 타고 떠났다. 청년이 눈앞에서 사라지고서야 여자는 생각했다. 그때 만약 스크린도어가 있었다면 남편을 비롯해 선로에 몸을 던진 수많은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선로 위의 죽음을 막기 위해 설치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청년은 뜻밖에도 너무나 앳된 얼굴이었다. 그날 이후 여자는 수많은 목소리 중에서도 청년의 목소리만 집중해서 들었다. 청년은 늘 바쁘게 뛰어다니며 숨을 헐떡거렸다. 스크린도어 고장이 잦은 역이라 여자는 한 달에 십여 차례나 청년을 볼 때도 있었다. 청년은 가끔 여자의 가판대에서 컵라면을 사면서 뜨거운 물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여자는 물을 끓여 주었다.
  봄 햇살이 제법 여물어진 3월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은 해가 저물어서야 헐레벌떡 도착한 청년은 여자의 가판대 근처 9-1의 승강장 스크린 도어 앞에서 평소와는 달리 꽤 긴 시간 수리를 하고 있었다. 스크린도어 안팎을 점검하면서 청년은 툭하면 울리는 휴대폰을 들고 상대방과 통화를 했다.
  “예,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휴대폰을 내려놓는 청년 얼굴의 둥근 콧날과 충혈 된 눈이 심하게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오가는 발랄하고 경쾌한 젊은 몸과는 달리 창백하고 왜소한 청년의 모습이 스크린도어에 기묘하게 비춰졌다. 난감한 얼굴로 활짝 열린 스크린도어를 툭툭 치기도 하는 청년의 얼굴에 음울한 미소가 슬쩍 지나가기도 했다. 청년이 다시 스패너를 들고 선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가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스크린도어 안쪽 선로에 있던 청년이 얼굴을 내밀더니 승강장 쪽으로 나왔다.
  “여기서 이렇게 오랜 시간 있으면 어떡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매서운 사내는 상급자인 모양이었다.
  “24시간 동안 14회나 장애가 발생하는 곳입니다. 이참에 잦은 고장의 원인을 밝혀야…….”
  “내가 근무해봐서 잘 아는데 여긴 원래 그런 곳이야. 이제 공고를 갓 졸업한 네가 들여다본들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부장님 그렇지만…….”
  청년의 말을 자르며 사내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 참, 원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당장 열차가 들어올 때에 맞추어 스크린도어가 여닫히게만 수리하는 게 자네의 일이야. 한 시간째 이러고 있으니 다른 곳은 어쩌란 말인가?”
  침을 튀기며 청년을 질책하는 사내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여자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왔다. 우울한 얼굴로 듣고 있던 청년이 억울한 듯이 얼굴을 붉혔다.
  “부장님. 점심도 먹지 못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나도 처음에 입사해서는 뺑이 치느라 점심 굶기가 일쑤였어.”
  “부장님 그래도 일손이 너무 부족합니다. 원래 주간 A조 인원이 열 한 명이지만 교대로 쉬어야 하는 휴무자 다섯 명 빼고 오늘 출근자는 여섯 명뿐입니다. 그중 한 명은 사무실 근무이고 나머지 다섯 명이 48개 역을 담당하고 뛰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제법 조리 있는 청년의 항변은 번번이 사내의 우격다짐에 막혀버렸다.
  “그럼 인력 충당이라도 하라는 말인가?”
  “…….”
  “자네는 실습생으로 시작해 얼마 전에 계약직으로 입사해놓고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어? 회사가 스크린보수 하청계약을 얼마나 주고 따왔는지 알아? 솔직히 자네들 계약직에게 주는 월 143만 원도 너무 부담이 크다는 말이야. 그렇게 힘들면 다른 곳을 알아봐.”
  “부장님.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2인 1조 현장 출동 매뉴얼조차 지켜지지 않고…….”
  “현장 매뉴얼? 그래 너 말 잘했다. 현장 매뉴얼 나보다 잘 아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해. 어디 한번 들려줄까?”
  “부장님, 그런 말씀이 아니라…….”
  “잠자코 들어! 현장 2인 1조 출동. 출동 사실 역 전자운영실에 통보, 역무실과 전자운영실에 작업 시작 통보, 역무실 내의 안전문 열쇠 꺼내고 대장에 기록, 고장현황 파악 뒤 2인 이상 필요시 지원요청. 선로 쪽 작업인 경우 승인요청. 자 이것이 원래 매뉴얼이야. 그런데 자네는 오늘 이 매뉴얼에 따라 움직였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봐, 그게 현실이야.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 매뉴얼 따라 움직였다가는 서너 곳도 못가고 하루가 저물어. 어차피 휴지조각 매뉴얼이야. 매뉴얼 운운하지 말고 신속하게 한 곳이라도 더 다닐 생각을 해야지.”
  “그렇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누가 그럴 모르나. 하지만 자네, 고장신고 접수 후 몇 시간 안에 현장 출동을 완료해야 하는지 알지?”
  “1시간입니다.”
  “그럼, 고장처리 24시간 이내 미처리하면 회사에서 지연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것도 알지?”
  청년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우리 현실이야. 어떤 경우에도 열차는 정시운행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시선을 슬쩍슬쩍 내비치던 청년은 사내의 입에서 나온 정시운행이라는 말에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시운행…….”
  “그래, 정시운행이 우선이야. 우리 같은 하청업체 직원들은 정시운행을 위해 배차 간격 시간에 어떻게든 수리를 마쳐야 하는 거네. 자네도 잘 알잖은가? 사람들이 잠시라도 열차 운행이 지연되면 얼마나 많은 불만과 욕설을 쏟아내는지. 조금도 참아주지 않아. 그래서 정상운행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 거고. 힘들더라도 참고 열심히 해봐. 내가 해봐서 아는데 힘들다고 느끼는 시간도 잠깐이야. 자네도 빨리 계약직 꼬리 떼야 하잖아?”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목소리에 불만을 에두른 사내는 청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고는 사라졌다. 청년은 사내의 상체가 검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하다 못해 검푸른 안색에 지친 얼굴의 청년은 체념한 모습으로 공구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에 청년의 그런 모습은 마치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그냥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모습으로 비쳐졌다. 청년이 공구를 챙겨 가방에 넣고 일어설 때 여자는 점심을 먹지 못했다는 청년의 말을 기억해냈다. 여자는 등을 돌리는 청년을 급히 불렀다.
  “이봐.”
  두리번거리던 청년이 가판대 안의 여자를 보고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의 뜨거운 물이 고마웠으리라. 고작 뜨거운 물에 불과했는데 청년은 환한 웃음으로 보답했다. 모처럼 여자는 가슴이 안온했다. 다가오는 청년의 얼굴에 거뭇거뭇한 땀이 묻어있었다.
  “아직 점심을 못 먹었다며?”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듯 눈을 치뜨고 여자를 보는 청년의 몸에서 선로의 냄새가 났다. 여자는 그 선로의 냄새가 너무 차가웠다. 선로 위를 흘러 다니는 안개와 같은 빛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 역사 안의 모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여자는 이마의 주름과 눈꼬리를 펴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청년을 향해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청년의 입술 위로 미소가 감돌았다.
  “잠깐만 기다려. 김치볶음밥 남은 게 있으니 먹고 가.”
  늘 조바심으로 발을 동동거리던 청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고분고분 여자의 말을 따랐다.
  여자는 점심때 덜어 먹고 남은 김치볶음이 담긴 냄비를 휴대용가스레인지 위에 얼른 올리고 생수 한 병을 청년 앞에 내밀었다. 단숨에 생수통을 비운 청년이 여자의 친절이 어색한 듯이 쭈뼛거렸다. 여자가 적당히 덥혀진 김치볶음밥과 숟가락을 내밀자 청년은 가방을 뒤적거려 스텐 숟가락을 끄집어냈다.
  “어서 먹어. 숟가락이 참 크기도 하네.”
  여자가 청년의 손에 들린 스텐 숟가락을 보며 말했다. 
  “그래야 빨리 먹잖아요.”
  멋쩍은 웃음을 머금은 청년이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뜨는데 또 휴대폰이 울렸다. 청년은 얼른 김치볶음밥을 입속으로 욱여넣고 전화를 받았다. 입을 우물거리며 듣고 있던 청년이 물었다.
  “생일 선물로 무얼 가지고 싶은데?”
  통화를 하면서도 청년의 눈은 김치볶음밥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에 통화를 끝낸 청년이 김치볶음밥 한 숟가락을 수북하게 입에 퍼 넣어 볼이 미어지도록 씹으며 말했다.
  “동생인데 생일이 두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생일선물을 사달래요.”
  그러면서도 청년은 동생의 투정이 싫지 않은 얼굴이었다. 
  “동생이 몇 살인데?”
  “저보다 세 살 어려요,”
  “넌 몇 살이야?”
  “열아홉 살이에요. 1997년에 태어났어요.”
  1997년이라는 말에 여자는 순간 자신이 살아있으면서도 소멸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여자는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중산층의 평범한 주부였다. 사업을 하던 남편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그동안 이룬 것을 하루아침에 잃었다. 무너지고 패배한 많은 사람들이 열차의 선로에 앞 다투어 몸을 던지는 시절이었다. 어음 만기일을 눈앞에 둔 남편은 거래처를 돌며 미수금을 받으려고 애를 썼지만 몇 달 동안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도미노처럼 급격하게 모든 것을 무너뜨린 외환위기의 여파에 작은 중소기업이나 하청업체들은 줄도산을 피하지 못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남편 역시 휴지조각이 된 어음 같은 전망 없는 삶에 지쳐 선로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그때 여자는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또 얼마나 다루기가 어려운 것인가를. 또 얼마나 제멋대로인가도 알았다. 그 일을 겪은 후 여자는 자신에게 앞으로도 여전히 괴로움이 있을 것이고, 그 괴로움의 세계 속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독하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그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미처 몰랐다. 진저리치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오랜 풍파에 노출되어 감정을 숨기기에 딱 좋은 여자의 적당히 높은 코와 가느다란 눈은 성벽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마른 볼을 팽팽하게 당기며 청년에게 물었다.
  “동생이 생일선물로 무얼 사달라고 하든?”
  “축구화요. 동생이 중학교 축구선수예요.”
청년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김치볶음밥을 급히 한 숟가락 더 입에 쑤셔 넣은 청년이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휙 등을 돌리고 멀어져갔다. 그런 청년을 보며 여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가, 부디 몸조심하고…….”
  청년이 승강장의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자는 계속 그 소리만 중얼거렸다. 여자는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에 태어난 아이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러 다니는 현실에 아픔과 아이러니를 동시에 느꼈다. 죽음을 막으려고 선로를 막아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러 다니는 열아홉 살 청년을 보자 여자는 떨치고 싶은 초조함과 어떤 난폭한 분노 사이에서 가슴이 맹렬하게 들끓었다. 마음속에 솟구치는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며 여자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진폭이 큰 불안에 놀랐다. 그러자 혼란스럽고 이리저리 뒤엉켜 있어 마치 거미줄 쳐지고 먼지 쌓인 지하실 같았던 머릿속의 기억이 오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이도 그때 열아홉 살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하루아침에 가족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쫓겨나는 불운에도 의연하게 가족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장남이었다. 졸업도 전에 아이는 엘리베이터 수리 하청업체에 들어가 일을 했다. 그날 아이는 기술자를 따라 대형마트의 무빙워크를 수리하려고 나갔다. 지하 1층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가는 무빙워크 기계를 점검하는 기술자의 일을 도왔다. 원래 아래위 두 명씩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데 원청인 대형마트에서 하청을 받아 다시 재하청을 받은 하청업체는 원칙에 따른 매뉴얼을 지킬 수 있는 인력이 없었다. 아이는 아래층에서 위층 기술자의 지시에 따라 무빙워크를 조작하고 있었다. 무빙워크가 돌아가는 동안 옆에서 탠션(손잡이)를 잡아줘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했다. 손잡이 작업 전에 돌아가는 발판을 먼저 뺐다. 위에서 발판 두 개를 빼놓고 밑에서는 여섯 개를 뺐다. 그러고 나서 돌리자 두 개가 먼저 돌았고 밑에서 올라올 때 위에서 정지시켜야 하는데 그럴 인력이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 밑에서 손잡이 작업을 하던 아이의 몸이 구멍 틈에 빠져버렸다. 아이는 사고 1시간 만에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식당에서 일을 하던 여자는 딸에게서 아이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오빠가 일하다가 다쳤는데 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채 1분이 안 돼 다시 전화를 걸어온 딸이 오빠가 죽었다고 했다. 여자는 믿기 힘들었다. 제발 살아있기만을 바라며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아이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뜨지 않고 누워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여자는 그 자리에서 미치는 줄 알았다. 굳게 다문 입술이 금방 엄마 하면서 일어날 것처럼 보이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니 더 미칠 것 같았다. 남편을 보낸 후 여섯 달을 넘기기 전이었다.
  아이를 화장하고 유골을 수습한 여자는 아이가 숨진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사고가 난 곳에 아이를 추모하는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어서였다. 실성한 것처럼 심상찮은 여자의 몰골을 본 대형마트 직원이 기겁을 하고 앞을 가로막았다. 여자는 아이가 사고를 당한 곳에 추모의 꽃만 놓고 나오겠다고 했지만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영업시간에 꽃을 놓고 추모하는 것은 고객님들 보기에 좋지 않을뿐더러, 고객님들이 그 무빙워크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했다. 하고 싶으면 폐점 이후에 오라고 했다. 여자의 애원에도 그들은 고객님들 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자꾸 이러면 영업방해로 신고한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여자는 대형마트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빈정거림과 게걸스러운 호기심을 견디며 질기게 버텼다. 여자를 동정하는 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거의가 죽은 아들 앞세워 돈벌이를 한다며 조롱하고 이죽거렸다. 돈이 아니라 한 송이 조화가 고작인데도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곳에서 인간의 수치심이 인간들의 눈빛만으로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몇 마디 말로 채찍질 당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곳은 소중한 고객님과 가슴에 단 이름표로 자신을 나타내는 직원만 있을 뿐이었다. 고객도 아니고 이름표 없는 여자는 그저 꿈틀거리는 한 줌의 육체에 지나지 않았다.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듯이 무심히 밟고 지나는 사람들뿐인 그곳에서 여자는 호기심 가득한 자들이 함부로 집적거리는 대상에 불과했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혼자서 아무것도 방어할 힘이 없는 여자는 치욕의 도살장 같았던 그곳 어디에서도 죽은 아이를 위한 조화 한 송이 놓을 공간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하청을 주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은 없고, 따로 할 이야기도 없다며 외면했다. 열아홉 살 아이는 하청 일을 받은 재하청 업체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부주의로 죽어서 강남 대형마트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얼간이 취급을 받았다. 죽은 아이의 사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여자는 어디에도 인간의 존엄을 찾을 수 없었다. 관공서와 회사를 비롯한 모든 곳이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고 재수 없다는 얼굴로 불퉁거렸다. 그건 남편의 사후처리 때도 마찬가지였다. 입만 열면 내세우는 인간의 존엄은 씨톨 만큼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었다. 공포와 고통 속에서 여자는 인간들의 비천함이 역겨웠다. 명예니 수치니 하는 것들이 여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상은 여자가 겪은 비참한 불행도 모른 척하고, 풍요로운 햇살이 터질 것만 같은 정적만 흘렀다. 그 방관의 침묵은 여자의 생각을 멈추게 하고 오직 공포와 울분만 전해주면서 여자를 손발조차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치게 했다. 삶이 두 동강 난 여자는 매순간 이중으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느끼면서 살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헛개수 음료수 서너 병과 우유 작은 것 서너 팩이 고작이었다. 가판대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여자는 불안한 마음에 점심도 거른 채 자꾸 귀를 기울였지만 청년의 목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영문을 모르는 불안에 목이 타고 물건을 잡은 손이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달 전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보슬비가 차분하고 지속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하루 종일 시야를 가릴 정도는 아닌 비를 바라보다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가판대를 닫으려고 주섬주섬 정리를 시작했다. 그때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여자는 내심 반가워 깜짝 놀라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역사 어디에라도 청년이 나타나면 미세한 숨결을 통해서도 느끼곤 했는데 전혀 그런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것이었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선로에 온통 신경이 뺏겨서 그런가 하며 여자가 청년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고장수리?”
  “아니에요. 퇴근하는 중입니다. 캔 커피 하나 주세요.”
  “따뜻한 커피 한 잔 줄까?”
  청년이 대답 대신 동그랗게 웃으며 천 원을 내밀었지만 여자는 짐짓 눈을 흘기며 도로 내밀었다. 여자는 일회용 컵에 믹스커피 두 잔을 타서 가판대 위에 나란히 놓았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서둘러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로 승강장은 평소보다 붐볐지만 아무도 가판대를 찾지 않았다. 여자는 참으로 오랜만에 누군가와 마주 보며 커피를 마셨다.
  “근처 역에서 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데 갑자기 이곳으로 오고 싶었어요.”
  “기다리고 있었다. 끝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와야지. 엄마가…….”
  여자는 문득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싶어 손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언제부터인지 여자는 자신이 가끔 마흔다섯 살로 돌아가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는 자신이 마흔다섯 살에서 기억이 멈춘 것만 같았다. 청년과 마주 선 여자는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와 가슴이 서늘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지 자신이 마흔다섯 살로 이야기하는 것을 깨달을 때와 같은 불안이고 두려움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그런 기억을 두고 태연하게 웃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어찌해볼 생각이 없었다. 나이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려니 했다. 청년을 보자 그런 생각이 더욱 견고하게 굳어졌다.
  청년의 가방에 꽂힌 휜 국화꽃이 여자의 눈길을 끌었다.
  “뭐니?”
  “벌써, 1주년이래요.”
  “세월호?”
  “네. 그때는 저도 학생이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어요. 광화문에 들렀다가 집에 가려구요. 다녀오셨어요?”
  “나도 가보지 못했다.”
  여자는 그 작고 가녀린 생명들이 죽음과 싸웠을 것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심하게 떨리면서 관자놀이가 쿡쿡 쑤시고 망치로 내려치는 것 같은 육체적 통증이 느껴졌다.
  “그럼, 시간 되면 가보실래요?”
  청년이 가방에서 투명한 비닐에 싸인 흰 국화 한 송이를 여자에게 내밀었다. 흰 국화를 받아든 여자는 갑자기 널뛰는 감정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얗게 흐려진 얼굴은 이전에 본 적이 없을 만큼 유약해 보였다. 두 손으로 조화를 들고 있던 여자는 가판대 옆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매뉴얼이 있는데도 지키지 않았대요. 지키지 않을 매뉴얼을 왜 만들어요?”
  화가 난 듯이 불쑥 뱉은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가판대 안은 어두웠고 선로에는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계속 침묵이 흘렀다.
  “매뉴얼만 지켰어도…….”
  청년이 분한 듯이 또 뱉었다. 여자는 항상 침묵해왔듯이 계속 침묵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무엇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화를 꺼내고 미처 닫지 않은 청년의 가방에서 떨어진 책이 무겁고도 칙칙한 침묵을 깨뜨렸다. 얼른 책을 집어 올린 청년이 자랑스럽게 뱉었다.
  “저 기능 1급 공부하고 있어요. 우리 부장님도 나와 같은 고졸 출신이래요.”
  청년은 단단한 치아가 모두 드러나도록 웃었다. 여자는 청년의 웃음 앞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엇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환하게 웃던 아이의 웃음이었다. 어떤 희뿌연 풍경을 향해 표류하는 기억에 당혹스럽던 여자가 갑자기 청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들, 잘 다녀와. 오늘도 조심하고…….”
  느닷없는 여자의 말에 청년은 별로 당황하지 않으면서 깍듯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
  청년이 돌아간 후에도 여자는 꿈쩍을 않고 비에 젖은 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귓가에서 ‘그럼, 시간 되면 가보실래요?’ 하는 청년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여자는 자신의 불행에 골몰하고 자신의 운명에만 골똘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웠다. 아이들을 위해 조화 한 송이 바칠 엄두를 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때 갑자기 고막을 찢을 것 같은 굉음이 들려오면서 전에 보지 못한 엄청나게 큰 열차가 역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학생들을 빽빽하게 태우고 있는 열차의 몸체는 이상하게도 비스듬하게 기울었고 파르스름한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열차 안의 학생들은 얼어붙은 자세로 말없이 출입구 앞에 서있었는데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돌처럼 굳은 모습이었다. 여자는 그 아이들 틈에 얼핏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소리 높여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크린도어가 몇 번이고 여닫혔지만 아이들은 열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열차에 갇힌 아이들을 보고도 여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암담할 따름이었다. 죽은 아들에게 조화 한 송이 바칠 힘이 없었던 여자는 청년이 남겨 놓고 간 흰 국화를 집어 들었지만 가판대 안에서 망설였다. 그사이 승강장에 정차해있던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조화를 열차 쪽으로 힘껏 던지는 순간 눈앞의 열차는 구름처럼 흩어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빗물에 젖어 암흑색으로 빛나는 선로 위에 눈부시게 흰 조화 한 송이가 놓여있었다.  
  아침부터 여름의 열기를 머금은 5월 하순의 태양은 오후가 되자 더욱 뜨거운 햇살을 쏟아 부었다. 후텁지근한 가판대 안에서 여자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오는 날 이후로 한동안 청년을 볼 수 없었다. 스크린도어가 고장 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여자는 자꾸 불안해 스크린도어가 고장 났다고 신고를 할까, 객쩍은 생각까지도 했다. 눈으로 직접 청년의 얼굴을 보아야 불안이 사라질 것 같았다. 여자는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내줄 때마다 고개를 내밀어 스크린도어 쪽을 두리번거렸다.
  어느덧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승강장이 차츰 붐비기 시작했다. 그때 청년이 뛰다시피 가판대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청년의 바쁜 걸음걸이가 짠하게 보여 여자는 메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미리 물을 끓일까 하다가 그냥 청년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라면 물 올릴까?”
  “시간이 6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끝내고 먹을게요.”
  청년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모르게 가판대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5시 52분이었다. 청년은 승강장 끝으로 뛰어가면서도 동료와 통화를 했다.
  “을지로역에서 고장 신고가 들어왔어. 이곳에서 끝내고 을지로역까지 30분 만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 혹시 대신 갈 수 있어? 그럼 빨리 끝내고 시간을 맞추도록 할게.”
  통화를 마친 청년은 배차 간격을 살필 여유도 없이 승강장 9-4 지점 스크린도어를 열고 들어갔다. 선로 쪽에 들어간 청년이 장애물감지센터 수리를 시작한지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여자는 오른쪽에서 빠르게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열차를 보았다. 선로 안쪽에서 수리 중이던 청년은 미처 열차를 보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차와 스크린도어가 겹쳤다. 청년의 얼굴이 피범벅이 된 그 순간 선로를 태우는 석양의 햇살 소리가 들릴 정도로 주변은 고요했다. 그 고요 속에서 스크린도어만 하얗게 빛났다. 그것만 남은 것 같았다. 오직 스크린도어만 남기고 세상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 것 같았다. 눈앞에서 청년의 모습을 삼킨 스크린도어를 보면서도 여자는 속수무책이었다. 승강장에 내동댕이쳐진 청년의 가방에서 고개를 내민 스텐 숟가락과 축구화가 차마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여자의 눈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바로 그때 여자는 보이지 않는 문 하나가 활짝 열리면서 다른 세계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기류가 자신의 몸으로 강하게 밀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가판대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20분 후 열차는 정상운행을 재개하고, 열차운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사과방송을 하고 사과문을 붙였다. 이번에도 사람은 뒷전이었다. 여자는 그런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감각한 세상이 끔찍했다.





*김성달 경북 영덕 출생. 《한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환풍기와 달』, 『낙타의 시간』. 한국문인협회작가상, 아시아문학상 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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