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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시집속의시/이외현/사이의 미학, 또는 사이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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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시집속의시/이외현/사이의 미학, 또는 사이의 시학
사이의 미학, 또는 사이의 시학
―정무현 시집 『사이에 새가 들다』 중에서
이외현
우리는 일상의 대화나 글에서 ‘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사이’는 특정된 장소의 ‘내 방 천장과 바닥사이’처럼 잴 수 있는 거리와 공간도 있지만, 대부분 어림으로 짐작한 거리나 공간을 나타내는 경우가 더 많다. ‘눈 깜짝할 사이’처럼 아주 가까울 수도 있고 “하늘과 땅 사이”처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멀 수도 있다. ‘사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으며, 화자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잘 구사하면 청자도 그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 중에 많이 사용하는 ‘사이’의 뜻을 사전에서 몇 개 인용해 보면, 1.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 또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의 거리나 공간. 2. 한때로부터 다른 때까지의 동안. 3. 어떤 일에 들이는 시간적인 여유나 겨를. 4. 서로 맺은 관계, 또는 사귀는 정분 5. ‘새’-준말 등 이다.
사이는 한자로 間으로 표기한다. ‘時間’, ‘空間’, ‘人間’이라는 단어에 사이間이 사용된다. ‘시각과 시각 사이’ ‘빈 곳과 빈 곳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나 공간을 나타낸다. 이렇듯 사이間는 인간이나 사물의 존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정무현 시인의 「새」는 이러한 의미들을 적절하게 잘 혼용하여 표현하였다.
그녀가 눈을 껌벅이는 사이
남자는 일어선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사이
엄마는 밥 짓는 일을 잊는다.
기차를 타고 플랫폼을 빠져나가는 사이
돌아오라는 그의 전갈이 날아온다.
바람이 분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이
사이로 새들이 사라진다.
수천 리 밖에서도
새는 사이를 이으며 집을 찾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일들은 벌어지고
벌어진 일들은 틈을 찾아낸다.
사이는 아직도 잴 수 있는 거리
사이와 사이에
다시 새가 날아와 앉는다.
―「새」 전문
인간이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기는 힘들다. 거의 동시에 처리한다고 해도 간발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눈을 껌벅이는 사이 남자는 일어”서고 “아이가 배고프다고 울어대는 사이 엄마는 밥 짓는 일을 잊”고 “바람이 분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이로 새들이 사라진다.” 여기에서 ‘사이’는 비교적 짧은 시간이나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수천 리 밖에서도 새는 사이를 이으며 집을 찾고” “나도 모르는 사이 일들은 벌어지고 벌어진 일들은 틈을 찾아낸다.”에서의 ‘사이’는 시공간이 무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새鳥는 확장된 ‘사이’를 좁히려고 ‘사이를 이으며’ 날고, 나는 “벌어진 일들”에서 ‘틈’을 찾아서 메우려고 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사이와 사이에 다시 새가 날아와 앉는다.”그래서 “사이는 아직도 잴 수 있는 거리”라고 시인은 긍정적으로 얘기한다. 나는 이 시를 읽는 동안 내 주변의 벌어진 ‘사이’나 ‘틈’이 조금씩 좁혀지고 메워짐을 느낀다.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아무리 뜨거워도
차가워도
무거워도
아무리 찔려도
견딘다.
주인과 함께이면 된다.
촛불은 자신을 태워 이름을 얻었지만
사라지는 고통보다는
함께하며 견뎌가는 숙명을 택한다.
―「받침대」 전문
2016년 겨울, 국정농단을 응징하고 민주화를 향한 촛불은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밝게 타올랐다. 그 촛불을 감싸 안고 “아무리 뜨거워도, 차가워도, 무거워도 아무리 찔려도” 함께 견딘 받침대 역할을 한 것은 종이컵을 받쳐 든 국민들의 손이었다. 그러나 “촛불은 자신을 태워 이름을 얻었지만” 바람에 촛불이 꺼지지 않게 감싸주고 받침대가 되어 준 무명의 수많은 손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혹한을 견디며 촛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받침대가 되어 준 많은 이의 차가운 손이 “함께하며 견뎌가는 숙명을 택”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조금이나마 민주화의 초석을 다진 것이다.
정무현 시인 시들은 대부분 직설적이며 거침이 없다. 에둘러 표현한 시도 결국 본인 특유한 시풍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가 표현한 시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가 많다. 톡 쏘는 사이다 같은 한 방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에는 삶이 녹아있고 따뜻한 시선으로 약자를 감싸 안으려는 깊은 배려가 담겨있어 시를 읽는 내내 미소 짓게 한다.
*이외현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안심하고 절망하기』. 제4회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위원.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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