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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계간평/백인덕/우리는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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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41회 작성일 19-07-0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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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계간평/백인덕/우리는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느 ‘시간’을 살고 있는가?


백인덕



  1.
  모든 기록記錄은 시간을 잡아두려는 인류의 원초적 욕망의 산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실시간real time’이라는 미망迷妄에 빠져 ’공간의 축소‘에 여념이 없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실시간‘이란 양자陽子의 수준에서만 가능한, 즉 초미시의 세계일 뿐 상대적으로 거대하고 복합적인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개념일 뿐이다. 즉 정보의 입력과 출력이 아무런 지연遲延없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를 구성하는 ’몸‘의 차원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심한 허기에 시달리다 뜨거운 국물 한 수저, 뜨신 밥 한 덩이를 목구멍으로 넘기면 그것이 위에 닿아 뇌가 도파민Dopamine을 분비해 만족감을 느끼는 데서도 이미 ’실시간‘은 구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쯤 지체遲滯와 지연이 자연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이런 사실의 인식적 인정은 ‘시poetry’를 문자의 발명 이후 최고의 기록 양식, 또는 발견의 보존 양식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혹자는 ’의미의 불분명성‘을 거론하면서 이러한 논리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발견의 보존‘이라 했지 ’정보의 보존‘이라 하지 않았다. 발견은 형식을 지향하고, 정보는 담기는 내용에 주목한다. ’무엇이 담겼는가‘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그 정보가 단일하고 분명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형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엇을 기록할까‘라는 선택의 문제는 가치관을 정립하기만 하면 될 뿐, 그 대상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이 매일 수만의 시인이 숱한 시를 쏟아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된다.


암컷이 죽으면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귀신고래가 신석기에서 청동기를 지나


시대를 거슬러 여기까지 찾아왔다.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가 그 곁을 빙빙 돌다 같이 잡힌다는


푸른 물의 나이를 알고 있는 저 고래는


반구대 암각된 바위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안다


비록 세계의 역사는 되지 못했어도


제 울음이 닳아서 아예 없어져버리기 전


오천 년 동안 살아온 내력을 말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와 너희의 생사를 묻고 있는 것이다


―김형미, 「귀신고래」 전문


  김형미 시인은 ‘귀신고래’라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즉 현재의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지도 모른 대상을 통해, ‘시간과 기록’이라는 불가분이면서도 모순적인 관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최근 유발 하라리라는 저술가의 『사피엔스』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면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그의 도발적인 논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는 물론이고 베이징원인이나 자바원인 등등이 다 현대의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와 아무런 계통적 연관이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즉 그동안의 고고학적 발견과 이론 체계는 우리의 시원始原과 관련하여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무언지도 모르는 발견과 연구에 매달렸을 뿐이라는 일침이었다.
  나는 사실 이 자리에서 그의 논리를 따져 묻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반구대 암각화’ 즉 우리 눈앞에 생생한 현실로 실재하는 고래그림을 통해 우리보다 오래 지구를 경영한 ‘고래귀신’을 떠올리고, 거기서 “비록 제 울음이 닳아서 아예 없어져버리기 전/오천 년 동안 살아온 내력을” 고래가 말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너희(우리)의 생사를 묻’는 것이라는 시적 발견의 힘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런 작품은 우리가 어리석게도 끝내 ‘반구대암각화’를 지켜내지 못하더라도 ‘시’라는 다른 매체의 형식으로 한동안은 시간에 맞설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이 좋은 시의 기록적 가치이다.
시간과의 싸움은 ‘역사’라는 큰 물줄기를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개인사’라는 어찌 보면 순간 명멸明滅하는(역사에 비해) 하루살이 같은 개인의, 또 그 인생의 한때라는 짧은 기간을 통해서도 지속된다.


벌레 먹은 갈잎이었네
동그랗게 어둠이 배어있었네
나는 아무 뜻 없이 꺼냈네
꺼내기 전에 좀 더 나뭇잎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네
마른 햇살 냄새도 맡지 말아야 했네
인연이라 여기지 말고,

저 생의 생리적인 것이라고
다 저런 과정을 지나는 것이라고
상투적으로 읽어야 했네
우정 하찮고 뜻 없이 읽었어야 했네
낯설게 그대의 말투로 읽으려한 게 잘못이었네
그냥 사랑하며 사는 일을 꿈꾸어야 했네
한 장의 나뭇잎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했네
내가 읽은 문장은 마른 갈잎일 뿐이라고 썼어야 했네
어떤 마음도 주지 말았어야 했네
누구도 저 나뭇잎이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르네
그 생의 처음이 거기였을까
만약 거기였다면 거기서 무엇을 또 꿈꾸었을까
세상은 꿈을 꾸라하네만
내 꿈꿔왔던 세상이 이젠 무서워지네
여정처럼 머문 낙엽의 문장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했네


―허림, 「가을밤은 너무 폭력적이네」 전문


  시인은 산골 오두막에서의 ‘조우遭遇’를 통해 시간이 삶에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는 예의 그 ‘실시간’이라는 미망으로 전자 ‘문자’가 날아온다. 표정과 느낌이 지워진 채 거기에는 ‘조만간 저녁이나 하자’라는 정보가 담겨있다. 하지만 경험상 이런 문자는 아무런 의미도 함축하지 않는다. 언표 그대로 ‘밥을 먹자’도 아닐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내가 아직도 네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는 고지告知에 가깝다. 반면 허림 시인은 늦가을에 진 낙엽, 우연히 우편함에 떨어졌음이 분명한 ‘벌레 먹은 갈잎’을, ‘동그랗게 어둠이 배어있’는 갈잎을 자연이 보낸 편지로 읽는다. 거기는 자연에 비친 인생의 섭리攝理가 다 들어있다. 그 ‘갈잎’에는 “그냥 사랑하며 사는 일을 꿈꾸어야”함과 “한 장의 나뭇잎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하는 이유가 적혀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낯설게’ 읽었고 그래서 문득 “내 꿈꿔왔던 세상이 이젠 무서워지네”라는 짧은 탄식을 쏟아내며 ‘가을밤은 너무 폭력적이네’라는 시를 창조한다. 우연히 또 다른 기록 속에 ‘나’를 기입하는 것이다.


  2.
  비록 ‘시간’이라 했지만, 시간은 결코 ‘시계’(그것이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속에 담겨 있지 않다. 아니 생성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언어’ 속에서 부화孵化하고 온갖 사물의 이름으로 변신變身하다 언어 속에서 소멸한다. 우리 인생처럼. 따라서 기억에 의지해 구두口頭(음성언어)로 시간을 기록하는 데는 리듬이 중요했지 ‘법(어법)’이 강조되지는 않았다. 상형문자에서 음소를 가진 표의/표음문자로 발전하면서 언어는 인간을 넘어 자연과 우주 전체(물론 자연과학에서는 수數지만)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확립된다.
  주명숙 시인은 이러한 사적史的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또 다른 발견을 덧대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여백’, ‘일종의 간격’을 재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백은 나머지가 아니라 의도적 공간이다
일종의 간격이라고 해도 좋겠다
간혹 주체가 모호할 때도 있는데 예를 들면,
그림자놀이에 빠졌을 때
검은 그림자가 여백이라고 가상되어지는 경우다
의도, 하지 않고 살다 보니 가끔은 하당이었지만
사는 재미에 늘 식욕이 왕성했었나보다
식탐의 추가 허술해졌는데도
헛배만 부른 지금
원근법에 홀려 말의 거리가 자꾸만 흩어진다
오해와 이해 사이의 간극에서
음소문자로 채득한 언어 저 너머로
상형문자로 다시 태어나는 또 다른 언어,
표정도 말이 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여백 없이
내 몸을 거쳐 나간 어법이
똥값만도 못하다는 사실이 새삼 힘에 부친다


봄이 닳아져 가도
열매가 꽃보다 빠를 수는 없는 일이지
기다려봐!
꽃자리에 여무는 본질은 결국 씨방이잖아
그 놈의 어법 한 번 참, 붉다


―주명숙, 「씨방의 어법」 전문


  이 작품은 “여백은 나머지가 아니라 의도적 공간이다”라는 도발적 명제로 시작한다. ‘나머지’는 필연적으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지만, ‘의도적 공간’은 말 그대로 특정한 지시 방향에 따라 인위적으로 형성된다. 사실 시인을 괴롭히는 것은 음소문자든 상형문자든 “오해와 이해 사이의 간극에서” 서성거릴 뿐, 그 너머를 지시하거나 그 시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표정도 말이 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고 하지만 사실 “여백 없이/내 몸을 거쳐 나간 어법이/똥값만도 못하”게 취급될 수밖에 없는 현재가 견딜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닳아빠진 봄일지라도 “꽃자리에 여무는 본질”로서 ‘씨방’이 가득한 ‘그 놈의 어법’, 즉 언제나 여백을 생성하는 자연의 이법이 더 적확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송진 시인은 하나의 물질적 실체(‘목불’) 앞에서 역逆으로, 순順으로 얽혀드는 세계를 발견한다. 이 발견의 기록을 형식으로서 시로 남긴다.


  가지에 나뭇잎 하나 없이
  모든 걸 버린 목불의 미소
  뿌리마저 잘린 주체의 참담함 속에서도
하나 둘 나무 쌓아올리는
겨울 인부의 땀방울
학교 운동장은 합장한 빈틈없는 손가락 사이로
자비로움을 간직하려는 열망에 뜨겁게 달아오르고
여기는 바다
여기는 등대
겨우 살아남은 난바다곤쟁이새우들이 턱을 바닥에 떨구고 시무
룩하게 휴대폰을 하며
벼랑 끝에 놓인 아슬아슬한 붉고 노란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기중
기 아래로 지나다니지


―송진, 「한 그루 목 잘린 나무 학처럼 공중을 비행하다」 전문


  사실 ‘뿌리’가 잘렸으므로 “가지에 나뭇잎 하나 없”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시인은 여기서 “모든 걸 버린 목불의 미소”를 본다. 그리고 ‘미소’와 연결되는 “겨울 인부의 땀방울”, 즉 정성을 본다. 하나의 번제燔祭를 향한 두 방향의 희생을, 아니 ‘합장한 빈틈없는 손’까지 세 계열의 하나 됨을 본다. 아니다, 어쩌면 이 장엄하다면 장엄한 광경에서 “겨우 살아남은 난바다곤쟁이새우들이 턱을 바닥에 떨구고 시무룩하게 휴대폰”을 하는 것을 연상해내는 시인까지 합쳐 네 방향의 합치를 본다.
  글의 서두에 ‘모든 기록은 ‘시간’을 잡아두려는 인류의 원초적 욕망이다‘라고 썼다. 말미末尾는 이를 변형하여 ’모든 시는 시간의 기록을 갱신更新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라고 쓰고 싶다. 어쨌든 시를 쓰며, 그만큼 우리는 새로워지는 셈이기에.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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