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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권두칼럼/백인덕/우리의 행성과 우리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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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권두칼럼/백인덕/우리의 행성과 우리의 언어
우리의 행성과 우리의 언어
백인덕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의 행성, 지구는 현재 태양계라는 천체에서 생명체가 가득한 유일한 행성이다.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목성이나 토성의 위성들에 대한 탐사에서 얼음이나 메탄 형태의 바다가 존재할 것으로 추측되면서 그곳에도 원시적 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매우 높아지고 있지만 생명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지구 이외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지구는 대략 45억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고 지구 생명의 역사는 어림잡아 40억년이라 한다. 이 시기의 대부분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균류, 그리고 단세포인 조류가 차지한다. 그들의 환경도 바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략 6억 년 전에 광합성이 아닌 서로를 잡아먹음으로써 개체가 보존되는 다세포 생명체가 출현했고, 대략 4억 년 전쯤에 육상에 진출하는 식물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식물을 기반으로 해서 바다의 생명체가 육지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공룡의 전성기’를 지나왔다. 우리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것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3백 만 년을 넘지 못하고 현생 인류의 기원은 40만년에서 4만년까지 다양하게 추측되고 있다.
서설이 좀 길었지만, 사실은 생명체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밑바탕이 되는 지구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다. 지구는 우리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너무나도 익숙하고 일상의 한 부분처럼 그저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잘 굴러갈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일상의 함정이 이런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늘 바쁘다. 사실 기본적인 활동의 대부분이 자동화 되었는데도 우리는 늘 바쁘다고 한다. 이것은 별개의 주제지만, 둔하고 느린 필자가 정말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멈춰 서서 잠시 생각하기에도 바쁘다면 신진대사가 너무 빨라 3시간 안에 자기 몸무게만큼 먹지 못하거나 5분 이상 잠들면 심정지로 죽는 땃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는 순전히 살기 위해 먹고 번식하기 위해 산다. 그렇게 부지런히 사냥을 하고 암컷을 찾아 헤매고도 자연 수명은 1년 남짓이다. 1년이나 백년이나 뭐가 그리 크게 다를까, 가끔은 감상적으로 생명의 무상함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다시 주제로 돌아가면 우리의 행성, 지구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생태계의 안정성을 위해(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태양과 우주에서 날아드는 자외선, 적외선, 감마선 등과 지구 자기장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안으로는 내핵과 외핵, 맨틀에서 중력이라는 극한의 압력을 잘 분산하고 있다. 비록 펄펄 끓는 액체의 형태지만.
제2의 지구를 찾으려는 노력은 대략 40억 년 후부터 진행될 태양의 죽음 때문이 아니다. 지구가 곧 인구과포화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즉각적인 위협 때문도 아니다. 지구는 대략 인구 2백~2백5십 억까지는 부양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제2의 지구를 찾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류가 훼손하고 있는 지구의 자연환경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대개. 해양, 토양 오염은 이미 지구의 자정 능력의 한계치에 접근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의 한계점을 넘어서도 사태는 조금씩 나빠지고 그래서 아직은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를 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허무맹랑한 소리다. 무슨 일이든 한계를 넘어서면 그 다음은 폭발적으로 돌변한다. 즉 지구의 환경이 연이어 폭발하면서 일순간에 생명에 부적합한 곳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구의 운명과 우리의 언어, 한국어와 한글의 운명이 매우 비슷하다고 느끼고 있다. 어쨌든 30년 가까이 시를 쓰고, 대학 강단에 서고 있기에 이런 비극적인 인식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시인이 너무 많다고 난리지만 그건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빗나간 지적이다. 최소한 시인이라면 그가 어디에 있든, 무슨 경향을 가졌든 불문하고 어떤 것이 한국어와 한글에 피해가 되는 지 정도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시인을 더 많이 등단시켜 우리 언어의 최후 경계선으로 언어 사용의 외곽을 빙 둘러쳐야 할 판이다. 그렇게 되면 시가 언어 사용의 핵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간다는 불만도 있겠지만, 그만큼 우리의 언어 생태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해야 한다.
최근 작고 시인들의 전집이 새롭게 재발행 되고 있다. 문제는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원문의 한자를 아예 병기하지도 않고 그냥 한글로 적는 경우가 눈에 띈다. 이를 환영하는 문단 내 인사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모토는 언제나 ‘독자 가까이’이지만, 이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 비교적 한자에 익숙한 세대가 다 사라지고 나면, 그렇게 한글만 남겨진 작품들은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되고 사용되게 될 것이다.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원전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면 한국시는 대부분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 때’ 정도의 가벼운 서정 이상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언어와 한글은 다양성의 부재로 인해 행성 지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멸의 길을 갈 것이다. 각종 전자매체에서 우리말에 자행되고 있는 온갖 괴상한 린치는 차라리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특정한 정치적 상징물과 역사적 기념물에 대해서는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이상하게 순수한 접근을 강요하면서도, 민족 생존과 번영의 필수적 기반인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서는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트렌드(?)고 스웩(?)인 현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각에서 말하는 ‘독자 가까이’가 어떤 경우에는 ‘시청자가 원하기 때문에’와 같은 말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환청 현상인가? 쉽고 재밌으면 된다는 편의주의는 문학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장르가 차고 넘치는데 구태여 모든 장르가 다 그 발상을 추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2의 지구를 찾는 과학자들의 순수한 열정처럼 이제 이 땅의 시인들은 제2의 모국어를 찾는 절박한 열정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른 폭염이 소도시를 달군다.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힌다. 초미세먼지는 담배연기와 함께 내 폐를 갉아대고 있다. 도무지 답이 없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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