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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특집Ⅱ헤매는 시, 번지는 시/남태식/유구한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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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특집Ⅱ헤매는 시, 번지는 시/남태식/유구한 전통
유구한 전통
남태식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지만 그를 떠나기가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폴레트 켈리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_피해여성이 피해여성에게 주는 편지」
공포에 질린 적이 있다. 공포에 질려 얼음이 된 적이 있다. 온몸이 바람을 맞는 깃발처럼 흔들린다고 느꼈지만 얼어붙은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사지를 버둥거린다는 느낌 또한 있었지만 가위에 눌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목은 터지지 않았고, 턱 막히는 숨에 몸짓은 탁 멈췄다. 공포에 질린 적이 있다. 공포에 질려 출렁임을 잊은 얼음이 된 적이 있다. 졸지에 바람을 타지 못하는 나무가 된 적이 있다. 얼음이 된 사건은 흉몽은 아니었고 악몽으로 남지는 않아 결국 해프닝으로 넘겼지만 공포에 질려 얼음이 된 기억만은 오래도록 남았다.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먼 곳에서 오는가, 낯선 곳에서 오는가. 술집이나 호텔이나 모텔이나 집, 화장실이나 목욕탕이나 거실이나 안방, 공포는 먼 곳이나 낯선 곳에서도 물론 오기도 하겠지만, 공포는 대부분 가까운 곳에서 오고, 가까운 곳에 늘 있다. 공포가 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는 짐승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불편하신가. 혹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 얼얼하신가. 목을 잡힌 듯 숨이 컥컥 막히시는가. 명치를 찔린 듯 가슴이 답답하신가. 아니면 귀가 근질근질하신가. 머무는 곳이 모두 바늘방석이신가. 우리 모두 매도당한다, 발목을 잡는다, 조직을 망친다는 등의 진영 논리, 음모론을 들먹거리면서 불안감을 조성하지는 마시라. 새삼스레 부르는 노래들은 이제는 모두 철 지난 유행가일 뿐이다. 일회성으로 종결된 기억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의 공포의 기억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여 그런 공포의 기억으로 마침내 빛을 잃은 금강석까지도 있다. 금강석이었으나 빛을 잃어 더 이상 금강석이 아니게 된 금강석들을 기억하자. 하니 불편하시더라도 이제는 그만 노래를 멈추시라. 이제는 그만 그 불편 달갑게 받으시라. 달갑지 않은 불편을 넘어 이미 죽은 이들이 있다. 달갑지 않은 불편을 안고 이미 죽어 있는 이들이 있다. 죽어서 죽은 이들이 있고, 살았으나 죽은 이들이 있다. 다 아는 사실이다. 다 보고 들은 사실이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김수영 「거대한 뿌리」 일부
더러운 전통은 유구하다. 더러운 역사는 유구하다. 더러운 진창은 유구하다. 이 유구한 전통은 가부장들의 전통. 이 유구한 역사는 기득권자들의 역사. 이 유구한 진창은 남자들의 진창. 몇 백 년 동안 흘린 눈물로 이룬 강에서 푹 잠긴 달을 건져 올려 밤마다 하늘에 널며 지옥을 헤매는 어떤 이들 곁에서, 그들은 고독을 가장했다(실제로 고독하기도 했으리라), 그들은 우울을 가장했다(실제로 우울하기도 했으리라), 그들은 고통을 가장했다(실제로 고통스럽기도 했으리라). 한 유령이 떠돌고 있다. 새삼스러운 유령이다. 우리의 눈에 익은 유령이다. 우리가 모른 체한 유령이다. 끊임없이 손을 젓던 유령이다.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던 유령이다. 끊임없이 하소연을 하던 유령이다. 이들에게 더러운 전통은 그냥 더러운 전통이다. 이들에게 더러운 역사는 그냥 더러운 역사이다. 이들에게 더러운 진창은 그냥 더러운 진창이다. 더러운 전통이라도 우리들만의 문화려니 하고, 더러운 역사라도 우리들의 숨결이 묻었으려니 하고, 더러운 진창이라도 우리들의 추억이 깃들었으려니 하며 함께 버텼으나, 이들은 그 전통의 이름으로 오래도록 짓밟혔다, 이들은 그 역사의 이름으로 오래도록 빼앗겼다, 이들은 그 진창에서 오래도록 더럽혀졌다, 이들은 오래도록 이중의 지옥에서 절망하였다. 하니 아무리 유구해도 더러운 전통은 더러운 전통. 하니 아무리 유구해도 더러운 역사는 더러운 역사. 하니 아무리 유구해도 더러운 진창은 더러운 진창. 그들이 겪은 지옥도 지옥이기는 했겠지만, 그들이 겪은 어떤 지옥은 어쩌면 지옥을 가장한 파라다이스였을 수도 있겠다. 하니 이제 더 이상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는 말은 그만 하자. 하니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는 말은 그만 하자. 하니 이제 더 이상 진창은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는 말은 그만 하자. 떠돌고 있다는 한 유령은 유령이 아니다. 실체이다. 유구한 더러운 전통을 폐기하고 함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야 할.
*남태식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망상가들의 마을』 외. 김구용시문학상(2016)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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