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0호/특집Ⅱ번지는 시, 헤매는 시/황경순/시와 술의 미학
페이지 정보

본문
20호/특집Ⅱ번지는 시, 헤매는 시/황경순/시와 술의 미학
시와 술의 미학
황경순
“축하해! 짜자잔!”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으랴? 얼마 전에는 승진 대상이 되어 축하를 받았고, 남편이 새 차를 사서 또 식구들끼리 잔을 부딪쳤다. 물론 집안에 갑작스런 비보가 날아와서 친척들과 위로의 술을 벗한 적도 있다.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가? 어쩔 수 없이 마시는가? 술의 노예가 될 것인가? 술을 지배할 것인가?
술에 대해서 논하라면 애주가든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든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것이다. 애주가는 더욱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 애주가가 시인이라면? 시인 이백처럼 술을 마시면 시가 줄줄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두보는 이백을 일컬어 술 한 동이면 시 100편이 나온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시 중 술에 관한 시가 엄청나게 많기도 하다. 이백의 시 한 수를 읊어본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밝은 달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달은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흉내만 낼 뿐.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봄날을 마음껏 즐겨보노라.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노래를 부르면 달은 서성이고, 춤을 추면 그림자 어지럽구나.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지리니,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 길이 맺어,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이백李白 「월하독작月下獨酌 기일其一」 전문
나는 애주가는 아니지만 술을 가끔 마신다. 그 분위기,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기분 좋게 마시지만 몸에서는 잘 안 받는 편이라 다음날 힘이 든다. 그러면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기분도 적당히 좋아지고 억누르고 살았던 감정이 되살아나고, 평소에는 망설이던 말들을 할 수 있어서일까?
아버지께서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과음 하시는 걸 보고 자라서, 나는 대학 때까지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주로 칵테일을 조금 홀짝거리는 정도였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부 터 위스키와 브랜디 등 독주의 깔끔함에 반해서 더러 마시기도 했지만, 드라이진에 토닉워터를 조제해서 마시는 ‘진토닉’을 가장 즐겨 마셨다. 신혼 초에는 맥주를 좋아하는 남편 덕에 세계맥주를 두루 섭렵하며 맛을 본 적도 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아이들 키우느라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놓고 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새롭게 공부도 하고 시를 가까이 할 무렵, 술을 배우게 되었다. 그 술을 가르쳐준 선배들과 서울 근교 여기저기 아름다운 곳,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삶에 대해 고민도 하고 시적 감성을 키워나갈 때였다. 평택의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횟집, 대부도 방조제를 건너 보았던 섬과 바다 풍경,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나 맛집 , 여주 남한강변의 카페 등을 찾아다니며 못 마시던 소주도 좀 배우게 되었다.
그 후 시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스승님과 문우들과 함께 1차로 소주나 청하, 2차로 맥주를 마시며 시와 문학에 대한 의견을 토로하며 문단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데도 술이 한 몫을 하였다. 막걸리 향을 안 좋아하는데도 억지로 약한 술 ‘청하’를 처음 배운 것도 신기해서, 시와 술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약간 과장된 그 분위기가 좋고, 시가 안 써질 때도, 잘 써질 때도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때가 가장 전성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무렵 결성된 이런저런 각종 모임 사람들과도 기분 좋게 사교의 순간에 술이 함께 했다. 물론 어떤 모임에서는 술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아예 입에 대지 않기도 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어쩌면 여러 개의 자아가 존재하는 지도 모르니까. 그 무렵 쓴 시 중 술에 대한 시들도 몇 편 있는데 첫시집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에 수록된 술에 관한 시가 있다. 데킬라를 마셔본 건 아니지만, 그 술의 원료라는 용설란꽃이 너무 신기하고, 마시는 방법을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매료되어 쓴 시다. 언젠가 한 번 마셔보고 싶었는데 아직 마셔보진 못했다. 멕시코를 여행하게 되면 현지에서 꼭 마셔보고 싶은 술이다.
데킬라 데킬라/이름만 들었던 데킬라를 마신다//데킬라 썬라이즈,/진한 향은 오렌지 향에 희석되었어도/색다른 맛에 혀는 춤을 추고/가슴에는 불이 오른다//멕시코에서/장대같은 꽃줄기에 노랗게 걸린 태양처럼 피는 꽃,/백년 만에 꼭 한 번 핀 후 죽어야만 하는 용설란,/그 열매로만 빚은 술, 데킬라//장대같이 목이 길어져도/불꽃이 되어 타서 없어져도 좋다/단 한 번 사랑처럼/강렬하고 애절한 데킬라를 마신다.
―「태양을 마시다」전문
그러나 술은 대부분 한 때인 것 같다. 물론 선천적으로 술이 잘 안 취하거나 센 사람은 예외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로 인해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과음으로 인한 실수로 좌절을 맛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술 마신 개’라는 말이 생겼을까? 한창일 때는 나름 깡다구로 버티면서 잘 마시는 척 하기도 했지만, 다음날의 숙취를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술을 꺼리게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기억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을 몇 번 했고, 건강도 전 같지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전처럼 술을 많이 먹지 않는 분위기여서 요즘은 특별한 자리 외에는 잘 안하게 된다. 마시더라도 가볍게 마시곤 하는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그러면, 시와 술의 관계는 어떨까? 선배시인들 중 술을 좋아하는 측은 술을 마실 줄 알아야 시도 잘 쓴다고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전에는 술을 무조건 권하곤 했다. 그러나, 술을 한 방울도 못 드시는 분도 시를 잘만 쓴다. 그러니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 역시 술을 적당히 마셨을 때 시가 잘 써질 때도 있지만 필수 조건은 아니다. 술이 주는 풍부한 감성과 스트레스 해소 등으로 생각이 좀더 폭넓어지거나 다른 각도로 해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술을 적당히 즐기는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싫은 사람은 안 마셔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쓰면서, 서로 소통하면 좋겠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일은 일부 사람들의 편견이 심하다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 마시는 사람을 무척 싫어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술을 안 좋아하는 사람도 술 마시는 사람을 또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풍토가 중요할 것 같다.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못해서 요즘 같이 ‘미투(Me Too)’ 사태가 생긴 것이라고 본다. 물론 술과 상관없이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이겠지만, 술로 인해서 면죄부를 받아왔던 관습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배려하지 않고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표출된 것이다. 선배라고 무조건 술 안 마시는 사람에게 강요하고 술 안 마시는 사람을 별종 취급하는 습관이 잘못 형성되어 그런 것 같다. 갑작스런 경제 성장이 문화적인 성숙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 중 하나이다. 이제는 술 문화도 성숙되어 술 마시는 사람들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자기의 주량을 철저히 파악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 술을 못 마시고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술 마시는 사람을 너무 이상한 취급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시대가 변하면 사회의 문화도 변화하지만 술에 대한 낭만도 여전히 존중 받았으면 좋겠다. 이백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미치광이 취급을 더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주옥같은 시들을 한 편도 못 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실수나 허물은 서로 소통하며 이해해주고, 잘못이 있다면 사죄를 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여 다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술을 좋아해서 마셔야지 어쩔 수 없이 마시는 건 좋지 않고, 술을 지배하며 삶의 가치를 상승시켜야 하지 않을까? 지구상에 술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선후배들이 시에 대한 열띤 토론을 하며 지내던 날들이 그립다. 적당한 삶의 활력소, 오고 가는 술잔 속에 넘치는 정!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잔을 부딪치며 축하도 하고 위로도 하며 살고 싶다. 가끔은 술의 힘으로 시어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길 바라면서….
*황경순 2006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거대한 탁본』.
- 이전글20호/신작특선/황영선/등꽃에 들다 외 4편 19.07.08
- 다음글20호/특집Ⅱ헤매는 시, 번지는 시/남태식/유구한 전통 19.07.0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