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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신작특선/김영진/배롱나무 꽃씨를 심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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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신작특선/김영진/배롱나무 꽃씨를 심다 외 4편
배롱나무 꽃씨를 심다 외 4편
김영진
지금 몇 번째 생애를 건너가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은 저보다 한 생을 먼저 오셨습니다. 어느 날 꿈이 하도 이상하여 하루 종일 먼산에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송이를 바라보며 혼자 미소지으셨다지요. 그리고 아들을 얻으셨습니다. 고향산천 다 버리고 떠나실 때 한없이 울었다는 기와집 한 채가 선하시다고요.
이제 구순, 노색이 완연하여이다. 두 팔 두 다리는 뼈만 앙상하십니다. 젖가슴은 바람이 빠져 헐렁합니다. 누군가가 모조리 파먹은 탓이지요. 허공에 매달린 육신은 조금씩 퍼주어도 정신만은 못준다는 당신은 우리를 어딘가로 줄기차게 인도하였습니다.
가시는 날 배롱나무 씨앗 하나 어머니 가슴에 심어 드리겠습니다. 고향 찾아 찾아가시면 따스한 봄날 그 기와집 안마당에 심으세요. 우리도 언젠가는 고향집을 찾아갈 겁니다. 그때에는 어머니 이미 심어놓으신 배롱나무꽃이 가득하겠지요.
어머니 머리맡에 배롱나무꽃이 피었습니다.
부평 깡시장
부평 재래 깡시장 좁은 골목에는 사람 반 물건 반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 지글지글 닭강정 튀겨지고, 발톱 가지런히 오동통한 족발에 미소가 댕그렁거린다. 초딩 시절 어머니가 어묵 사주면 쫓아가던 시장 골목, 명절 때 떡 주문하고, 육고간에서 산적거리, 불고기, 똥그랑땡 돼지고기 사서 방씨네 어물전으로 가 씨알 굵은 조기에 말린 가오리 사들고 치마를 날리며 스르륵 스르륵 뱀소리 내며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시장 골목.
새벽 경매로 문을 연다. 자~ 이것이 뭐냐? 강원도 고랭지 배추 맛있고 고소하다 자 어잇 번호 달린 모자 쓴 중개인들의 숨겨진 손가락이 까닥까닥한다. 어여여~ 27번 낙찰 깡. 중개인 자리 앞에 물건들의 가격표가 붙여지면 좌판 장사꾼들 몰리고 손님들 구경하고 흥정이 시작되고, 왁자지껄 욕지거리가 웃음에 섞여 뛰어다닌다.
사과장사 아줌마 옆 오이지 파는 홀아비와 정분이 나 곰보 신랑한테 두들겨 맞아 홀아비 얼굴에 오이꽃이 피고 손 싹
싹 빌었다는 깡시장 삼각관계 전설은 아직도 이세 삼세를 탄생시키고 있다.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노래, 춤, 도박, 사랑, 와이담도 팔린다. 홍두깨 손칼국수 한 그릇 뚝딱 먹고 까만 비닐봉지 들고 정지문 열고 들어서면 털보숭이 강아지가 좋아 꼬리를 흔든다. 깡깡깡.
붉은 지네에 물린 닭
꿩의 사촌, 나는, 눈자위 붉히고 외면, 춘삼월 산골짜기 개나리 진달래 지천이다, 그네를 타며 밤새 꿈꾸는 벼슬의 피를 먹자고 덤비는 산모, 증강현실 속 오천만 닭, 날개를 펼치면 파닥파닥, 바람기 달라붙은 도화살, 남정내는 먹지마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고, 땅속에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숨어사는 벌레들의 저승사자, 꿈틀 펼치는 세상, 난, 카드섹션을 바라보는 이런 것들이 여기 이 땅에서
잿더미 산을 지나는데, 수천만 마리의 붉은 닭대가리가 호랑이 죽여 눈알을 파먹는데 귀신이 놀래 공동 묘지 사이를 돌아 혼비백산으로 도망치는 상상 속 부리와 발톱은 가상현실 속 무기가 된다,
내게 그네를 달아 준 날이다 발톱을 잘라내 산 속에 매장하면 모여들어 헤집는 달밝들, 초록비단*접저고리에 하얀털바지 입고, 수만 년 대문 밖에서 떨어진 곡식 주워 먹고, 그럭저럭 컸는데, 사위 오면 대접하고, 병이 나면 蘇復하고, 닭도리탕으로 흥을 돋군다.
그네가 흔들리는 날 옹이 구멍사이 빛이 들어오자 새벽
장닭 목 길게 빼 열 번 울고 도망치는 붉은 지네 집어 삼키시다.
* 김해 쪽에서 전해 내려 오는 민요 일부 인용.
여명
내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침잠된 삶을 흔들어 놓고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지 어두움의 껍질을 벗길 때
수평선에 양탄자를 깔고 이분법의 선을 긋는 여명
이 아침을 위하여 노란 촛불 아래
붉은 포도주를 마시며 사각사각 하루를 지우고
누군가 도움 받을 수 없어 어둠 속에 무릎을 꿇는다
아주 숨 가쁘게 내몰아 어제의 고단함 쓰러내자
몸은 비치적거리지만 허전한 마음 밀어내고
붉은 기운이 나를 채우고 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떠오르고 태양은 바다 위에 떠오르고
여명은 삶의 숭고한 탄생 무섭고 따뜻한 묘지는
여명 속에서 점점 자라고 있다
물 위로 솟아난 붉은 양탄자 그 위로 비둘기 날고
달덩이 등 속에서 달그락달그락
밥 그릇 수저 소리 물 내리는 소리 사랑의 입맞춤 소리
여명의 양탄자 위로 움찔움찔대는 저것들
바다 건너 산을 넘고 오늘도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시작메모>
어라, 봄이 내 잔등을 두드리네.
봄은 또 다른 가을이다. 잎들이 꽃이 되고 봄바람으로 정신을 차리고 비바람과 폭풍우가 산천을 내리치기 위하여 청천의 하늘에서 여러 겹의 수묵채화를 그려 끈적이는 여름이 되기 전 봄은 분을 바르고 아이새도우를 그리고 루즈를 칠하는 몸치장으로 분주해진다.
나무는 자기방어는 할지언정 결코 동식물을 들이 받지는 않는다. 꽃은 아예 자신의 속까지 내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터득하기까지 벌과 나비와 친구가 되는데 수억 년이 됐으리라, 굴곡져도,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는 초목들이 진정한 스승일 것이다.
나무를 자세히 바라보라. 모진 바람 견디느라 줄기에는 고통스러운 미세한 구멍이 생겨나고 있지 않은가, 인생처럼 나무의 굵기와 튼튼함도 이런 일련의 아픔과 고통에 대응하는 과정을 얼마나 끗끗이 견디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더냐,
봄은 시인이다. 한평생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 같다. 예술의 목적은 대상의 감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러시아 문호 쉬클로프스키는 일찍이 말하지 않았는가,
청각적, 시각적, 후각적, 미각적, 촉각적은 물론이고 휴머니즘적 이미지를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느끼게 했을까. 시를 쓰면서 공허한 생각이 밀려올 때, 나는 아직도 게을러, 탄식하곤 했다.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보름달 뜨면 구름이 자주 끼지, 세상일이란 모두 그런 거지,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은 인간의 영혼과 결부시키기 위해서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예수나 부처는 예배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입맞추기, 접촉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진정한 합일은 먹는 데 있다. 따듯한 봄날 불이 켜진 저녁식탁에서 잘 차려진 밥을 연구분석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만찬을 연구하지 않고 즐길 뿐이다.
서로에게 섭취당하는 즐거움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우주를 잃지 않으면서 서로의 우주를 관조하며, 진정으로 시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홍안으로 번져가는 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전 이 봄에 마음껏 시를 쓰고자 한다. 꽁무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명의 거미줄이 끊기는 날까지,
어라, 봄이 내 잔등을 두드리네.
*김영진 2017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달보드레 나르샤』. 아라문학 편집위원. 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무총장,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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