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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신작시/성영희/지붕문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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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신작시/성영희/지붕문서 외 1편
지붕문서 외 1편
성영희
한겨울에만 자라는 뿌리가 있다
물결무늬 고랑 끝에서 자라나는 투명한 뿌리들
뚝 떼어서 와작 씹으면
이만 시리던,
뿌리가 부실한 사내애들은 곧잘 겨루기를 했다
손 한 번 베지 못한 그 맑은 칼싸움으로부터
쨍그랑 잘려나가기도 하던 긴 겨울
처마 끝에서 자라는 고드름은 뿌리열매다
씨앗 하나 심을 땅 없는
가난한 양철지붕의 겨울 수확
잠깐의 햇살에도 툭 끊어지고 마는
가늘디가는 한철 농사다
고드름도 잘 자라지 못하는 북향집
실로폰 같은 뿌리들이
똑똑 물방울을 떨군다
꽃 밑으로 뻗어나가는 뿌리 대신
처마 끝에서 고작,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가난한 음계들
겨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한여름 땅속 열기들이
뿌리 끝으로 빠져나간 흔적처럼
처마 아래 봄을 파종하고 있다
이 뿌리로 겨울을 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한꺼번에 툭
떨어져 내리는 소리로 겨울은
거푸집을 깬다
구들장
어린 날 아버지는 마냥
뜨거운 사람인 줄 알았다
쪼그리고 앉아 불꽃을 빨아들이던 모습은
막 사그라져 가는
별똥별을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 기거하시던 방의 구들장을 헌다
연기 새지 말라고 발랐던 진흙
가뭄처럼 갈라져 있고
무병장수를 빌었다는 굵은 소금의
부스러진 각질을 본다
뜨거운 불 빨아들이고
흰 연기 뱉어낼 때마다
긴 한숨의 필터를 빠져나오던 구름송이들
구름송이를 따라가다 보면
등 돌린 달의 잇자국이 있다
눅눅한 날이면 매운 연기 새어 나오는 날 많았던 구들장
온갖 연기 다 마시던 방고래처럼
그 뜨거운 불길 묵묵히 견디던 구들장처럼
몸 안에 난 불길 다 닫아걸고
천천히 식어간 아버지 손끝에서
노르스름한 별똥별의 후미를 보았다
타다만 장작이 구들장을 받치고 있다
검게 그을린 돌들
화상 입은 불길의 고래는
구들장 다 헐어도 여전히 매캐하다
매운 연기의 잔영처럼
방 한 칸의 기억이 느리게 식어간다
*성영희 2017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17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섬, 생을 물질하다』. 2015 농어촌 문학상 수상. 2014 동서 문학상 수상. 제10회 시흥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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