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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신작특선/김환중/유리심장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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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신작특선/김환중/유리심장 외 4편
유리심장 외 4편
김환중
마음을 점자처럼 읽어주는 앱
의사 결정에 끼친 앙금까지도 알아차리는 앱
알고리즘 값으로 음악 식탁도 차려진다죠
비즈니스 전자우편에서는 모호한 표현을
정중하고 명확한 어투로 바꾼다지요
숨은 감정 읽어내는 또 다른 얼굴이
그대의 영원한 숙제 대신해주면
신경 곤두세울 일 없어질까요
행간에 숨은 뜻 찾는 수고도 덜 수 있을까요
증발해 버린 기억의 창 열 수 있을까요
그대 눈썹에 걸린 시간의 덫조차도
안개의 뼈를 발라내듯 그대 몰아세운 파도와
이미 삼켜버린 비겁함까지도 뱉어낼까요
간을 맞추려는 노고도 덜 수 있을까요
죄의 싹들이 더는 자라지 않을까요
속주머니에 챙겨 넣은 감정통장
흘리고 다닌 영혼의 빛깔과 소리들
시스루 입은 채
스마트한 세상의 포로가 되어
유리심장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수학자들의 시간
오늘이 어제에게 굳게 닫힌 출구를 연다
숱하게 태어난 선분들이 애벌레처럼
꿈틀꿈틀 무리 짓기 여행을 한다
아궁이에서 튀어나오는 파편 같은
순간의 기록들을 포착하여 수학자들이
그 파노라마를 증명해내면
불쑥불쑥 솟는 통각이 유리관에 갇혀
시간은 시험관 속 증류수 같이 맑다
삽화처럼 생각의 지도에 돌연
굴절된 시간이 섭새김하는 동안
수수께끼 같은 말을 알아챈 수학자들은
질긴 그물망에 깔린 침묵 속에서
묵묵히 어혈을 풀어낸다
그물을 깁다
클라리넷더블베이스심벌즈슬레이벨트라이앵글팀파니호른이 뒤엉켜내는 소리는 시간의 압박붕대를 친친 두르는 것이었다 거미줄에 걸려 반쯤 먹혀버린 몸, 예라고 말하면서 아니오를 끌어안고 시간의 그물 속에 감기는 것이었다 극약 같은 악기 소리는 초침이 분침이 제 몸을 가늘게 떠는 기척까지 한꺼번에 꿀꺽 삼키는 것이었다 살고 싶어, 살고 싶다니까! 전족당한 생각의 발들 머릿속에 말벌 떼처럼 윙윙거리며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패를 지운 컴컴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흐릿하게 새어나가는 피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악기 소리에 구멍 난 그물코를 깁는 것이었다
다락방
바람 없는 날에는
햇볕이 더 더운 다락방
능갈맞은 햇빛의 혼잣말을 삼키며
피를 만드는지도 몰랐다
구름을 만질 수는 없지만
쪽창에 별빛이 가득해진 밤이면
먼지 쌓인 책무덤 속에서 기어 나온 말들이
번데기 주름 속으로 숨기도 했다
떠나지 못한 바람의 발목을 지그리듯
낮도 밤도 아닌 어스름한 빛에 쏠려
다락방에 숨기를 즐기던 한때
몸을 숨길 때 가지는 평온함은
반은 족쇄고 반은 날개였다
누가 나를 하늘에 좀 버려줘
째깍거리는 초침소리를
나를 찾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작신 좀 분질러 줘……
생쥐처럼 들락날락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꿈에 젖은 씨앗을 뿌리고
상처도 꽃받침 속에 묻어 기르던 다락방
바람이 자꾸 갇히는 지붕 밑에는
검열을 비껴간 이야기들
아궁이 속에서 구워진 이야기들이
별빛처럼 반짝이기도 했다
놈과 놈 사이
놈과 놈 사이엔 거리가 있다
개와 강아지 사이
먹어 치운 밥그릇 수만큼 딱 그만큼 분명하다
개는 발길에 차이다 찢기고 부러지고
눈칫밥에 불거진 눈알까지를
혀처럼 축 늘어뜨린 채 감나무 그늘에 들었고
꼬리 짧은 강아지는
제 꼬리를 물려고 뱅뱅 돈다
다리도 눈도 풀린 한 남자가
큰소리로 개새끼를 부른다
꼬일 대로 꼬인 혀를 풀어가며 애타게
개새끼를 연발하며 침을 내뱉더니 결국
밥술 무게를 견디지 못한 탓인지
감나무 그늘에 제 몸을 부려놓았다
혀를 축 늘어뜨린 개가 그에게 다가서더니
짠한 눈빛을 건넨다
<시작메모>
구멍 나기 일쑤인 시간의 그물코를 깁다가 모처럼 봄나들이를 했다. 묵은 슬픔의 뼈를 찾고자 했으나 무지렁이인 내게 쉽사리 만져질 리 없었다. 조릿대 속에 나뒹구는 녹슬고 깨진 솥단지를 보고서야 사월의 피울음이 더듬더듬 만져지는 것 같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몸속 깊이 새겨진 소리의 뼈를 찾아 꺼내는 일, 스스로를 지탱하고 싶은 삶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붓을 빨아야겠다.
*김환중 2016년 《문예연구》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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