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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중편분재⑤/손용상/土舞 원시의 춤 제4화/밀림 野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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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08회 작성일 19-07-03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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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중편분재⑤/손용상/土舞 원시의 춤 제4화/밀림 野話


土舞 원시의 춤
제4화/ 밀림 野話


손용상



  1.
  밤새 스콜이 한차례 지나갔는지 숙소 창 너머로 보이는 캠프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이 아주 가깝게 비쳐져 왔다. 밀림엔 막 아침 햇살을 받은 나무 이파리들이 무리 진 채 햇빛을 받아 생선 등허리의 은비늘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철민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지난 한 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차례차례로 떠올랐지만 아무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전 작업 중 덥다고 물에 들어갔다가 느닷없이 익사한 현장 직원의 시신을 자카르타로 실어 보낸 후 숙소로 돌아온 그는 암말 없이 양주 한잔을 맥주 컵으로 부어넣곤 그대로 떨어져 아마도 열 몇 시간은 족히 잤을 것이었다. 현지에 부임한지 불과 일주일도 안 되었지만, 황망한 인사사고가 나자 그 뒤치다꺼리에 보낸 시간이 한 일 년은 족히 지난 느낌이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은 채 그저 죽은 듯이 한 이틀 잠 속에 빠져들었던 그는 금요일 새벽에야 정신이 들었었고, 바로 우유 한잔만을 마시곤 도망치듯 산속 현장인 베이스캠프로 차를 몰았었다. 뭐 그리 급한 일도 없었지만 왠지 그는 도시의 빌라에 앉아 있으면 온갖 잡생각으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 현지인 운전사만을 두드려 깨워 산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그는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헬맷과 군화로 무장을 한 뒤 벌목 현장으로 들어가 그날 오후 한나절 내내 현장직원들의 작업현황을 지켜보았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까마득한 높이에 두 아름이 넘는 나무를 체인 쏘 팀이 밑둥이를 쐐기형태로 잘라내면 그 뒤쪽에서 다시 선을 맞추어 톱날을 꽂았다. 톱날이 나무 밑둥이 중간쯤 도달하면 그 거대한 나무가 서서히 기울어지다가 종래엔 벼락소리와 더불어 지축을 울리며 자빠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라 할 만 했다.
  나무가 쓰러지면 또 다른 체인 쏘 팀이 무슨 곤충처럼 달려들어 위쪽의 잔가지를 쳐내고 옆쪽의 중간 가지를 사정없이 잘라 내버렸다. 하늘을 향해 무한히 치솟아 대 야망의 꿈을 키우며 한 백 년 씩을 버티던 한 그루 뿌리 깊은 나무는 그냥 대책 없이 거대한 원형 통나무로 변해버렸고, 사람들은 그 놈을 기중장비에 매달아 로깅 트럭에 옮기곤 했었다. 하루에 대여섯 통이나 잘라낼까? 철민은 한나절을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좀 전까지도 생명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생명 없는 것들로 변해지고 있음에 공연히 마음이 착잡해져 왔었다.


  철민은 아예 작심을 하고 다음 날 오전에는 제2캠프인 뎀타 하버harbor까지 넘어갔다. 부임 다음 날 권대리 위령제 지내느라 잠깐 내려갔던 이후 두 번 째였다. 뎀타 하버는 베이스캠프인 산속 현장에서 약 20킬로미터 동쪽 바닷가에 있었다.
  아주 포근한 느낌의 포구였다. 만약 이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지 않았다면, 이 마을은 그냥 자연 그대로의 시골 어촌으로 남아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동네는 시끌벅적했다. 원목 야적장에서는 힘겹게 산길을 돌아 내려온 로깅 트럭들이 소형 크레인 등의 장비들의 도움을 받아 실어온 나무들을 야드에 쌓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재소는 제재소대로 그중의 잡목들을 골라내어 쉴 새 없이 톱니를 돌리며 목재들을 만들어 쌓고 있었다. 통나무들이 순식간에 잠시 톱 맛을 보면 갈라지고 쪼개져 언제 그렇게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렸었나 싶을 정도로 둥글었던 모습은 금방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공을 향해 푸른 숨을 내뿜던 거대한 원목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각목과 판자로 변신하여 벽재壁材가 되고 마루재가 되고 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었다.  
 
  그는 캠프장인 임과장의 안내로 바지선 접안 시설을 겸한 원목 집하장과 제재소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선적용 바지선의 접안 부두는 바다를 면한 부분이 철제 빔이 아닌 태평양 철목鐵木으로 불리는 멀바우Merbau라는 수종樹種으로 물속에 촘촘이 꽂아 박아 만든 것이었는데, 보기엔 허술해보여도 여간 튼튼하지 않다고 했다.
 “나무가 썩으면 방벽이 무너지지 않나요?”
 “아니요. 멀바우는 짠물에 박혀있으면 백년을 간다고 하지요.”
 “백년…?”
   철민은 언젠가 본사의 현장 교육 시 들었던 이 지역의 각 수종樹種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으며 혼자 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시 철민은 산판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던지라 강의 때 뭔가 많은 질문을 했었지만, 지금은 거의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지역 분포수종 중 가장 ‘돈‘이 되는 고급 수종인 아가티스Agathis 와 멀바우 등 몇 가지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철민의 수첩에는, 아가티스Agathis / 일본 시장에서는 가오리カ オ リ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 ‘원산지는 뉴질랜드이며 전 세계에 20여종이 분포. 파푸아뉴기니, 이리안자야 등 인도네시아 부근 동남아시아에 넓게 분포한다.
  열대에서 자라는 침엽수 중에 가장 가치 있는 나무. 기온이 낮고 통풍이 잘되고 배수가 양호한 토양에서 잘 자라며, 연간 강우량이 2,500mm 넘는 지역에서 생장한다. 보통 해발 300~1,500m에서 발견된다. 수고는 약 30~50m, 흉고지름 200cm에 이르는 상록침엽수 교목으로 큰 것은 흉고지름 30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성숙 목은 농적갈색, 회백색, 녹회백색 등 다양하며, 비늘모양으로 두껍고 거북등 모양으로 벗겨지며 비섬유성이며 목질은 나무결이 곱고 균일하다. 가볍고 연한 나무로 가공·제재가 용이하며 못질도 잘 되고, 할렬이 잘 가지 않아 단풍나무 이상으로 최상의 고급 내장재로 쓰인다.


  철목鐵木 멀바우Merbau ― ‘보통 충적토양에서 생육하며 수고 40∼50m에 달하는 거목. 직경은 1m 전후에 외수 피는 회색 또는 적갈색인데 밋밋하고 무수한 물결무늬가 있어 제재해서 가공하면 마루 바닥재로 좋다고 알려짐. 강도가 높고, 부식, 벌레 등에 강해 방부처리가 따로 필요 없어 천연 방부목이라고도 불린다. 기름성분이 많아서 내구성이 강해서 과거에는 주로 철도 침목으로 많이 사용되었음’으로 메모되어 있었다.


  당시 그는 잘 팔리는 나무라면 나왕Meranti, 티크, 마호가니 따위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나, 불행히도 이 지역에는 그런 수종들이 없어 굉장히 아쉬워했던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고급 수종인 ’아가티스‘는 약 100킬로미터 후방에 군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아직 구경도 못하고 있고, 다만 다소 흔한 멀바우 만이 다른 잡목과 함께 임도 닦는 양편 100미터 안쪽에서만 잘라내어 몰래 팔아먹고 있는 실정이었다.
생각해보면, 계륵鷄肋이고 진퇴양난이었다. 왜냐면 계획된 경제수림樹林에 도착해 ‘돈’이 되려면 빨리 임도林道를 닦아야 하는데, 그 사이 운영 경비 들어가는 걸 어찌 현지에서 조달하려다 보니 도로 주변 나무나마 자르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러자니 길 닦는 게 늦어지고 아울러 장비 소모가 과외로 들어가니 회사건 현장이건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제재소는 톱니 돌아가는 소리로 몹시 소란스러웠다.


“제재소 구경 해보셨어요?”
  철민이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며 짤막한 미팅을 마치고 이제 막 준공을 마무리하면서 시험 가동을 하고 있는 제재 공장엘 들어서자, 현장 기사인 최기사가 불룩한 배로 벨트위에 얹혀 진 원목 한쪽을 받쳐 밀면서 큰 소리로 철민을 돌아보았다.
“그럼! 최기사처럼 배치기 한 것도 봤고… 선수들은 기계로 조작하는 거보다 더 정확하다고 하던데… 최기사도 그래요?”
“아, 그럼요!”
  최사가 으쓱하자 따라온 임과장이 웃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최기사 익스퍼텁니다.”
“좋아요! 근데….혹 팔아먹을 때 크레임 안걸리도록 신경쓰세요! 보통 얼로언스allowance 몇미리나 줘요?“
  철민은 자기도 좀 안다는 듯 잘난 척을 하자 이번엔 최기사가 벌쭉 웃었다.
“보통 3미리 주는데… 어쩌다 말리다 잘못되면 기준 이하 되어서 크레임 걸릴까바, 앞으로 정식 수출할 땐 1미리쯤 더 줄까 싶어요. 크레임 걸려 빠꾸되는거 보담은 낫잖아요!”
“글세… 1미리 더 주면 돈받는 거보다 선적물량이 더 늘어나 나무를 덤으로 더 주는 꼴이 될텐데… 임과장?”
“예.”
“삼천입방 수출한다 치고 1미리 더 주면 늘어나는 부피만큼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되는지….계산 좀 해보고 나중에 나에게 좀 알려줘요!”
“알겠습니다.”
  임과장이 자세를 바로하며 고개를 끄덕했다.
“암튼….앞으로 혹 그런 일 생기면 나도 챙길테니, 임과장도 잘 챙기도록 하세요! 이제 공장 정식 가동하면 그거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철민은 우선 실제로 액티비티가 없는 앞으로의 얘기를 지금부터 왈가왈부 하고 싶지가 않아 이 부분은 캠프장에게 일임하고는 그 자리를 떴다.
  저만치 야적장에서 아탱 영감이 그를 발견하고는 엉거주춤 일어나 거수경례로 인사를 건네 왔다. 철민은 웃으며 답례를 보내곤 눈을 돌려 한참동안 심란한 얼굴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거름의 바다는 검푸르게 파도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수평선으로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는 문득 죽은 권대리를 떠올리며 뭔가 공연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표정을 숨긴 채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곤 본 캠프로 돌아가는 차에 올랐다.

 

  2.
  철민이 본 캠프로 돌아와 대충 몸을 닦고 방으로 돌아오자 통나무집 숙소 천장으로 새끼 도마뱀이 여기저기 좌르르 좌르르 기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킬링필드라는 영화 속에 나왔던 장면처럼 녀석들은 서까래를 들락거리며 창문 틈새를 제집처럼 왔다 갔다 했다. 철민은 간밤의 잠들기 전 현장 책임자인 박기사의 말이 떠올라 싱긋 웃음이 나왔다.


이사님, 오늘 첫밤 주무시면 비암들이 인사 좀 할낍니더.”
“비암?”
 철민은 섬뜩하여 반문했었다.
“비암은 비암인데… 도룡뇽같은 거라요.”
“그런데?”
 박기사가 힐힐 웃었다.
“이놈들이 밤에 울어쌓거덩요.”
“도마뱀이 운다구?”
“그럼요. 아쭈구리 묘허게 끼끼끼 찌이익하고 우는데… 첨엔 뭔 소린지 모르다가 나중에사 그놈들 흘레붙는 소리라 깜짝하지요. 거기다가 오줌도 지리는데….“


  어디선가 들은 듯한 말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녀석들이 암수 교미를 하며 즈들끼리 대화를 한다는 얘긴데, 그 와중에 정액이 분비되고 그때 그놈들을 잡아먹으면 절륜한 정력을 얻게 된다든가…. 아무튼 우리네 사람들의 몬도가네식 발상은 아무도 말리지 못할 일이었다. 철민은 박기사를 향해 물었다.
“그래… 자네도 한탕 그놈들 잡아 묵었나?”
“하모요. 한번 삶아 묵어봤는데… 잘 모르겠더라구요. 안그래도 아침저녁 시도 때도 없이 벌떡거리는데… 그거 묵으나 마나 마찬가진기라요.”
“예라. 이 순… 잘자요.”
   철민은 박기사의 엉터리 같은 익살에 주먹을 들었다 놓으며 잠깐 웃음을 머금고는 침상에 담요를 깔았다.


   3.
“이사님, 일어나셨습니껴?”
  일요일 아침이었다, 마침 숙소 계단을 퉁퉁거리며 올라 온 박기사가 철민을 일깨우며 그의 방문을 노크했다.
“어? 벌써 일어났어요? 이제 일곱신데….”
“저흰… 여섯시면 일아나요. 버릇이 들어서… 그런데… 이시님 오늘 무슨 특히 스케줄이 있나요?
“아니요.”
  철민이 하품을 참으며 박기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응큼하게 슬금 웃었다.
“그리믄요… 좋은 구경 한번 가시지요.”
“좋은 구경?”
“동네 공창인데… 오늘이 종업원들 집단 장가가는 날이거덩요…ㅋㅋ.”
“뭐요? 그런 곳이 있어요? 그리고 장가가는 날은 또 뭐꼬?”
  철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요!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넨데… 데사 수니 빠라디소Desa Sunyi Paradiso(고요한 천국 촌)라고 일종의 홍등가인데… 그냥 루마 바기나rumah vagina라고도 하지요. 월 1회 정도 현장 촌놈들 몸 풀어주는 곳이지요. 원래 지난주에 가야 되는데, 권대리 그 새끼 죽는 바람에… 암튼 산 놈은 살아야 되니까… 그래야 담에 일을 잘하거덩요.  어제 2캠프 임과장이 얘기 안했어요? 아마 그쪽 사람들도 올겁니다.”
“임과장이랑도 온다구? 어제 별 얘기 안하던데.”
“네에! 임과장… 권대리 죽고 이사님께 미안타고 노래를 하던데… 그냥 말하기 뭣해서… 깜박했나 보네요.”
“허, 참! 그나 저나저나 루마 바기나? 그거 섹스방이란 뜻 아냐?”
  철민은 자카르타에서 주워들은 일이 있어 다시 물어보았다. 박기사가 히히 웃었다.
“그건 점잖은 말이고… 그냥 떡방이지요…ㅋㅋ.”
  철민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한편 생각하니 젊은 친구들이 이 칙칙한 밀림 속에서 맨날 뱀 잡아먹고 수액(樹液)이나 빨아 마시다 보면 그 넘치는 정력 어쩌겠나… 그는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면서 다시 물었다.


“루마 바기나는 알겠는데… 수니는 또 뭔가?”
“글쎄요… 말은 그냥 ‘고요하다‘는 뜻이라는데, 그냥 천국마을 이름인가 봐요. 지금은 시끄러운 천국이 되었지만… 듣기로는 오래 전에 그 마을 촌장이 딸을 하나 낳아 지어준 이름이 수니야라고도 하고… 그 애 엄마가 동양인인데, 꼬레아라는 말도 있고….”
“뭐야? 촌장 마누라가 꼬레아라구?”
  철민은 관자놀이에 소름이 확 돋으며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곤 박기사를 다그쳤다.
“자네…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그리고 촌장이 아직 살았어?”
박기사는 갑작스러운 철민의 다그침에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요… 그냥 전해들은 얘긴데… 촌장이 살았을 리가 없지요. 그 부인도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고… 동네는 바뀌었지만 이름만은 그대로 살아있는 거 같아요. 근데… 이사님, 왜 그리 놀라세요?”
  철민은 어리둥절해 하는 박기사를 쳐다보며 뚜벅 입을 열었다.
“이봐, 박기사?”
“예.”
“뭐 이상한 느낌 안들어?”
“…?”
  철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순전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반세기도 이전의 파푸아 뉴기니아의 일본군 점령 시절이 떠올랐고 더하여 그 시절 우리네 꽃다운 처녀들의 위안부 차출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어쩌다 오지의 섬으로 끌려간 그 중의 한 처녀가 탈출을 했든, 현지인에 의해 구출이 되었든, 납치를 당했든 간에 이 숲 속으로 끌려와서 정착하여 딸을 하나 낳았다? 그 처녀의 이름은 아마 분紛이 아니면 순順이였을 것이고, 그 여자는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태어난 아이나마 엄마 이름처럼 ‘순이’를 그대로 붙임으로써 언젠가는 제 뿌리를 찾게 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같은 상상이지만, 철민은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며 박기사를 향했다.
“가봅시다.”
“가보시면… 재미 있을겁니다.”


  4.
  철민이 복장을 갖추고 캠프 운동장에 나가자 2개의 트럭에 빼곡히 올라탄 현지인들이 와아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떤 친구는 큰 소리로 ‘삐삐난도 바기나(성교)하러 가냐?’고 대놓고 물었다. 철민이 싱겁게 손을 흔들자 그들은 더욱 신난 듯 떠들어 댔다.


‘수니 천국 마을’은 현장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마을은 수십 채의 통나무집들이 두세 채씩 군락을 지어 마치 휴양지의 방가로처럼 숲속에 숨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뭔가 잔뜩 썬 경고판이 서있었고 제법한 안내소와 십자 마크가 달린 진료소도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이름은 옛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데사 수니 빠라디소Desa Sunyi Paradiso는 주 정부에서 모든 걸 운영하는 그야말로 공창公娼이었다. 박기사의 말에 의하면, 산판에 들어오는 온갖 인종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각종 성병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지자, 과거 수하르토 정부 때 대대적인 공창 제도를 제도화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지역은 다른 것에 비해 생각보다는 의외로 ‘하수구’ 시설만큼은 깨끗해 보였다.


  박 기사 말마따나 그들이 도착하자 온 마을이 조용하기는커녕 갑자기 시끌벅적 해졌다. 더군다나 어제 다녀온 제2캠프의 인력들까지 함께 합쳐지니 데사 수니 빠라디소Desa Sunyi Paradiso는 잔치 마당으로 변했다. 
  그들이 마을의 광장에 트럭을 세우고 사람들을 내리자, 페떼 네모의 티셔츠를 입은 수십 명의 현장 종업원들이 마을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중 나온 여자들과 함께 어울리며 왁자지껄 하는 모습이 무슨 축제에라도 온 것 같은 풍경이었다. 광장에는 온통 네모 그룹의 셔츠 로고가 깃발처럼 광장을 누비며 떼거리로 편을 짜서 마치 운동회라도 벌이는 것 같았다. 철민을 발견한 제2캠프 책임자인 임과장이 얼른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철민이 손을 내밀었다.
“아, 임과장. 잘 잤어요?”
“아, 예… 어제 미처 말씀을 못드렸어요. 권대리 사건도 있고 해서 이사님 언잖아 하실까봐… 괜찮으세요?”  
  임 과장은 함께 온 박 기사에게도 눈인사를 건네며 철민의 눈치를 보았다. 박기사가 임 과장에게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그쪽은 몇이나 왔어요? 한 트럭은 되겄네…. 이사님. 재미있죠? 그래서 한 달에 하루는 ‘네모 그룹바기나데이’라고 해요. 촌놈들끼리….ㅋㅋ.”
“재미는 무신… 근데, 임과장?”
“네….”
“어제 늦게 빌라 신과장이랑 통신했더니… 이번에 잡목 5천큐빅 선적 결정됐다던데… 근데… 라운드 상태로는 배에 못싣는다면서?”
“그래요. 어젯밤 이사님 가시고 저도 연락 받았습니다. 그래서 담주에 산림청에서 라시드 과장이 직접 온다네요. 도장 받으러….”
“나도 보고는 받았는데… 라시드 그 친구… 뭐하러 직접 온대요?”
  철민은 머리를 흔들며 되물었다. 라시드 과장은 지방 산림청 실세이고 소위 ’끝발’ 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글세… 그렇다네요”
  철민은 입맛을 쩍 다셨다. 생각해보면, 이 판은 움직이면 돈이었다. 지난 해 부터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산판 나무의 해외 수출 시는 원목 그대로는 못한다고 못을 박아 할 수 없이 제재소를 만들게 했었다. 부가가치로 보면 제재소 설립이 옳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든 설비 투자를 강요해 한 푼이라도 더 뜯어먹으려는 인니印泥 정부의 꼼수가 아닐 수 없었다. 원목보다 제재목이 더 비싸게 팔려본들 설비 제작비와 부대경비를 따져보면 일만 많아졌지, 그들로서는 솔직히 ‘돈’되는 일이 아니었다. 
“또… 눈감아주고 용돈 달라하겠지… 지난번엔 얼마 줬어요?”
“확실히는 모르겠고… 한 50전 줬다고 들었어요. 큐빅당….”
  철민은 머리 속으로 수판을 굴려보았다. 5천 큐빅 선적한다 치고 작년 기준으로 봐도 2천5백불…10전만 올려도 3천불이다. 그쪽 고급 공무원 근 1년치 봉급이었다.
“도적넘들….”
  철민이 쓰게 웃으며 임과장과 박기사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임과장, 담주에 다시 나도 2캠프로 갈겁니다. 가서 나랑 같이 만나 라시드랑 쇼부봅시다…. 그나저나, 박기사는 기왕 온 거 촌장이나 한번 만나게 주선해 보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촌장은 없고 관리인은 있을지 모르겠어요… 알아보죠.”

 

  5.
  바Mr 나인골란은 이곳 ‘데사 수니 빠라디소Desa Sunyi Paradiso’의 사무소장이었다. 명색이 정부 관리였지만, 박기사의 얘기에 의하면 ‘포주 대장’이었다. 듣기로는 그가 인도네시아 각 지역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오는 여자들의 멱살을 쥐고 있다고 했다. 일테면 지역의 괜찮은 관리나 사업가들과의 썸씽에 간여하기도 하고 쏠잖게 화대花代도 상납 받기도 하는… 그쪽 계통으로는 도가 텄다고 했다. 어쨌거나 그는 적당히 잘 생겼고 얼굴도 기름져 보였지만, 그냥 시중의 놈팡인 것 같지만은 않았고 다소 먹물이 들어 있었다.
  철민은 그와 악수를 나누며, 회사 직원들이 말썽이나 안 일으키는지 잘 좀 챙겨달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뒤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찔러보았다.
“듣기론… 수니 마을에 수니야란 한국 여자가 살았다는데… 아는가?”
그는 영리했다. 철민의 말뜻을 금방 일아 들었다.
“나도 듣기만 했지만… 글쎄, 그 여자가 꼬리안인지는 알 수가 없고... 확실히 동양인이었다고는 알고 있다.”
“어째서….”
“십여년 전 이 마을이 새로 개발되면서 부락민들이 보상금 받아 외지로 나갈 때, 그 동네 지킴이 후손들도 스마트라 어딘가로 이주 갔다고 들었는데… 그때 본 사람들 얘기가 그네들이 꼬리안들과 많이 닮은 동양 사람이었다고 전하더라.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중국계 화교일지도 모르겠지만….”
“혹 사진 같은 거 없냐?”
“글쎄… 여기는 없고 혹… 주 정부 청사의 자료 창고나 뒤지면 있을까… 헌데, 그런게 남아 있겠냐? 여기 행정은 별로다.”
  그는 수니야 할머니에 대해서는 의외로 확신을 하면서도 그 자료에 대한 것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보다 그는 이에 덧붙여 과거 우리의 일본 식민시절의 얘기를 떠올리며, 당시 위안부 문제도 나름대로 소상히 알고 있었다. 현지인 위안부도 수없이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와 네델란드의 350년 식민 시대를 거론하면서 2차 대전시의 한국과 중국과 자기네 나라와의 동병상린의 아픈 역사를 더듬어 보기도 했다. 철민은 더 이상 어찌 할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쓴 입맛만 다시며 마음이 저릿해졌다.
“참… 모두가 안타까운 역사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그때 우리 꼬레안 할매들은 차암… 우째 살았을꼬… 그 혼백들은 고향이나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철민이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이자 그 역시 함께 수긍의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의외로 길어지자 옆에서 박기사가 지루한 듯 하품을 하다가 철민을 쿡 찔렀다.
“이사님요… 얘더러 참한 아이 하나 골라오라고 할까요?”
“뭐? 이사람이… 됐네! 자네 생각 있음… 몸풀고 오든가….”
“하이고, 지도 오늘은 참을랍니다. 지난 주 한 이틀 계속 오형제 신세지다 보니… 생각 없네유.”
“예라… 이!”
  철민은 박기사에게 주먹감자를 내밀며 허허 웃고 말았다.

 

  6.
  그날 오후, 그들이 ‘수니야 천국 촌’에서 돌아오자 캠프에 있던 백대리가 철민의 방으로 바삐 찾아 들었다.
“이사님요, 연애편지 왔는데요?”
  철민이 숙소로 들어와 위 저고리를 벗자 백대리가 바로 쫓아 들어와 편지봉투 한 개를 불쑥 내밀었다. 뭐? 철민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백대리는 히쭉 웃으며 한번 뜯어보이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철민은 고개를 갸웃하며 봉투를 뜯어 알맹이를 보다가 황당해졌다. 현지어로 뭘 잔뜩 늘어놓았는데 도무지 뭔 소린지 알 길이 없었는데다가 끝에는 뭔가를 표시하는 듯한 문장이 찍혀있고 싸인도 날씬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야?”
“가끔 이런게 옵니다요. 오야가다가 바뀌면… 인사하는거라요.”
“이사람… 내용이 뭐야? 자네가 읽어봐. 자네 현지어를 알잖나?”
  백대리가 다시 한 번 히쭉 웃으며 그깐 것 안 봐도 빤한 내용이라는 듯 편지지를 받아 대충 훑어보고는 꼭 남의 얘기하듯 입을 열었다.
“무기 공급을 해달라는구요!”
“뭐라구?”
“여기 이리안자야주 독립군 중 하나가 즈들 독립할 때까지 우리더러 무기서껀 도움을 달라는 겁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런 황당할 데가 있나? 철민은 말문이 막혀 눈만 꿈벅꿈벅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생각을 모아보니 처음 자카르타에서 전임 책임자를 만났을 때 그런 얘길 잠깐 들었던 것이 떠올랐지만, 그때는 무슨 개소리냐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었다. 그보다는 이 친구들이 본사에 현지 사정의 애로를 부풀리느라고 조그만 사안을 초치고 양념 친 것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기야 없잖아 그런 점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얘기를 자초지정 들어보니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박기사와 현장 직원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이곳에는 약4개 정도의 독립운동 단체가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빈약하지만 군대체계를 갖추고 자기들끼리 대통령도 있고 장관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주로 밀림 한복판에 아지트를 정하고 정부군을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했지만, 그 위력은 거의 없는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부군 입장에서 보면 별 볼일 없는 숲속 건달 집단이겠지만, 밀림을 상대로 벌목을 하고 길을 닦아 비즈니스를 하는 철민네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보통 신경 쓰일 일이 아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밀림 내에서 생활을 하며 모든 고가의 장비를 현장에 투입하고 있기에 이 집단들에게 잘못 보이면 장비에 불을 지를 수도 있었고, 그보다 밀림을 드나드는 직원들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나요?”
  철민이 옷을 차려입고 나와 식당에서 직원들과 식사를 하며 뚜벅 물었다. 그는 나름대로 심각해져 있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의외로 마치 모기에라도 잠깐 쏘인 것처럼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편지내용을 상세히 들여다보던 관리 담당의 백대리가 갑자기 히히힛 웃음을 날리며 편지지를 접었다.
“왜요?”
   철민이 답답한 눈치를 내보였다.
“이사님, 너무 걱정 마세요. 이 새끼들요, 심심하면 이런다구요! 지난번에는 매월 1억루피아씩 자금을 대달라더니 요번엔 우리 나무 실으러 오는 배편에 M-16 천자루와 탄약 및 수류탄 500발을 도와 달라네요. 그러면 즈들이 발행한 군표를 주고 나중 독립하면 그 몇 배로 갚겠다는군요. 그러고 이사님 부임을 축하한다고 그랬어요.”


  기가 찰 일이었다. 처음 생각엔 이곳 직원들 중 누군가가 신참인 철민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서 만들어 낸 장난질이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철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새로 온 것…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면… 여기에 누군가 첩자가 있나요?”
“있죠!”
  박기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럼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기 현지인 인부 중엔 산적들과 끈 달고 있는 놈이 꽤 있어요. 갸네들이 이따위 편지도 몰래 갖다놓고 또… 답장을 써넣으면 어느새 가져가곤 그러지요.”
듣자니 점입가경이었다. 철민은 밥숟갈을 놓으며 점점 더 머리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럼…  어떡하면 되지?”
   철민은 한참 만에 입을 떼며 순간적으로 마음을 오픈하고 싶어졌다. 상식으로 이해되진 않는 황당한 상황에 처해 직원들을 의심한다거나 또는 이른바 밀림의 전입 고참들인 구렁이 기사들이 새로 온 책임자를 골탕 먹이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선입견을 그는 우선 접어두기로 했다. 만약에 그들이 그런 생각들을 가졌다면 그것은 언젠가 시간이 가면 밝혀질 것이고 또 진실로 그게 사실이라면 더불어 일을 함께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어떻게 대처했나? 이런 짓이 한두번이 아니라면… 뭔가 대응책이 있었을 것 아닌가?”
 철민의 표정과 말투가 침통할 정도로 진실성을 띄우자 직원들도 자세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박기사가 밥숟갈을 놓고 물로 입을 헹구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에… 답장을 쓰셔야 합니더.”
 “답장을?”
 “예에”
 “어떻게? 뭐라고 쓴다?”
 “그야….”
   박기사를 대신해서 백대리가 나섰다.
   그의 얘기인즉 이러했다. 우선은 그들이 달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음을 납득시켜야 하고 우리들이 너희 인민들을 위해서 이곳에서 길을 닦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주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솔직히 그들은 자기들의 요구가 무리 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다만 새로 오신 이곳 두목이 자기들에게 얼마만큼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무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지금까지 매월 건네주고 있는 백만루피아 정도의 지원금을 차질 없이 전해준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줘야 뒤탈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철민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곳 직원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 사실을 관계 관청에 신고하여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철민이 좌중을 둘러보며 뚜벅 입을 열었다.
“이런 일… 우리 대사관이나 이곳 관청 또는 군부대에 신고한 적은 없나요?”
  박기사가 킬킬 웃었다.
“말짱 헛것이라요 처음엔 우리 대사관이랑 공문도 보내고 했는데… 대답은 알아서 하라는 말밖엔 없었걸랑요 아마도 그 공문사본은 본사에도 몇 번이나 갔을거라요. 이사님도… 안보셨습니껴?”
  듣고 보니 그런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틀림없이 픽 코웃음을 날리며 새애끼들 놀고있네… 어쩌구 하며 잡철 파일에 끼워 넣고 말았을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대사관 측에서도 다분히 그런 류의 생각으로 무시하고 말았을지도 몰랐다. 아니, 설사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했다손 치더라도 비행기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가야할 오지 중의 오지에서 그러한 보고서가 올라온들 무슨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없었던 걸로, 안들은 걸로 하고 현지 책임자가 알아서 적당히 처리하라고 할 수밖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곳 군부대나 관청에는 안알렸었나?”
철민이 다시 묻자 백대리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랬다간… 정말 큰일나지요!”
“왜? ”
“우리가 그런 낌새를 보이면 여기 첩자들이 대번 즈들 사령부에 꼬나박을 것이고… 그리되면 우린 자칫 독화살 맞고 떼죽음 당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다가… 얘네들 군부대에 일러바쳐 토벌이라도 한답시고 군인들 투입하게 되면 오히려 그거 지원할 돈이 걔들 주는 것보다 곱빼기로 들거덩요”

  결론은 거두절미하고 갸네들 잘 달래서 우리 일이나 잘 하는 것이 장땡이라는 논리였다. 철민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이런 걸 두고 진퇴양난이라 할 것인가. 그는 속에서 이거 씨팔, 꼭 뭣 같은데 왔구나 하는 후회 섞인 욕지기가 저절로 올라왔다.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며 곧바로 모든 현실을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박기사를 눈으로 불렀다.
“저으기… 당신 현지어 읽고 쓰고… 하지?”
 “아니, 저보다 백대리가 담당 아입니껴.”
 “그럼… 백대리?”
 “네에.”
 “답장… 만들어봐.”
 “예에… 뭐라고 쓸까요?”
 그가 메모 노트를 펼치며 물었다.
 “당신 이때까지 얘기한 것… 알아서 짓고… 그쪽 대통령인지 지랄인지… 한 번 만나자고 해요 젠장, 죽기 아니면 까무러친다구… 한 번 부딪쳐보는 거지 뭐”
철민은 염병할,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함부로 말을 뱉어내며 담배에 후르르 불을 붙였다.


  그날 저녁, 철민은 하루 종일 현장을 돌아다니면서도 곧 어디선가 게릴라라도 나타날 것 같은 착각에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혹 누구라도 볼세라 혼자서 어금니를 주근주근 씹으며 속으로 오한께나 느꼈었다. 바깥은 섭씨 35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도무지 땀 같은 땀도 나지 않는 것이 희한할 정도였다. 그러다 가였다. 저만치 앞쪽에서 현장을 정리하던 현지인 노무자 몇 사람이 갑자기 쉬이-하는 포즈로 몸을 납작하게 엎드리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불안이 극도에 달하며 미칠 것만 같았다.
“왜 그래? 뭐야?”
철민은 옆에 따라오던 기사 한명을 꽉 잡고는 함께 몸을 수그린 채 물었다.
“글쎄요….”
녀석은 별 두려움도 없는 얼굴로 멀뚱하게 그쪽을 쳐다보다간 갑자기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그래?”
“뱀인가 봐요… 구렁이 같은건데… 되게 큰건가 보네요. 저거 잡으면 며칠은 몸보신 하겠는데요”
  철민은 잠깐 어이없는 심정으로 그쪽을 멀건이 쳐다보았다. 현지인 몇 명이 항상 들고 다니는 환도로 뭔가를 내려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토인들의 춤처럼 비쳐왔다. 그는 영 마음이 언짢았지만 그들을 향해서는 한마디 말도 던지지 못한 채 궁시렁 궁시렁 현장에선 산 짐승 죽이지 말랬는데… 속으로만 되 뇌이며 서둘러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벌렁 침대에 누우며 여기 온지 불과 닷새도 안 되어 지금까지 하늘이라도 찌를 것 같은 그의 오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졸아들고 있는지 도무지 기분이 나빠 견딜 수가 없었다.





*손용상 손남우孫南牛 경남 밀양 출생. 1973년 〈조선일보〉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설집 『베니스 갈매기』, 『똥 묻은 개 되기』. 장편소설 『그대속의 타인』, 『꿈꾸는 목련』. 전작장편掌篇 『코메리칸의 뒤안길』. 중편소설 『꼬레비안 순애보』, 『이브의 능금은 임자가 없다』. 콩트·수필집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어머니!』. 에세이집 『우리가 사는 이유』. 에세이·칼럼집 『인생역전, 그 한 방을 꿈꾼다』. 시·시조집 『꿈을 담은 사진첩』.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미주문학상, 고원문학상 수상. 한국, 미주문인(소설가)협회, 달라스 문학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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