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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계간평/백인덕/서로 비추는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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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계간평/백인덕/서로 비추는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의 교감
서로 비추는 ‘표면表面’과 ‘이면裏面’의 교감
백인덕
1.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아니 요즘 유행하는 종말이나 재난 블록버스터를 흉내 내어 질문을 바꿔보자. 어떻게 하면 인간을 가장 쉽고 빠르게 멸종시킬 수 있을까? 핵전쟁, 질병, 기아, 자연재해 등등 많은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스스로의 ‘인간성’을 의심하게 만들면 된다. 우리는 거의 종적 연대가 사라진 시대의 서두에 살고 있다. 굳이 마르크스나 하이데거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물을 물건의 차원으로 격하시켰고 이제는 그 물건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마저 스스로의 ‘소외’를 자초하고 있다. 사물인터넷IoT에 의한 유비쿼터스적 환경은 무척 편리해 보인다는 이면에 ‘대면접촉의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독을 함유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사물에 이어 인간과의 유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결국은 인간으로부터 소외될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물과 타자’로부터 소외된 상황에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로부터의 소외’가 발생할 것이다. 즉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물→타자→자기’는 소외가 진행되는 방향을 지시함과 동시에 그 상황의 총체성을 무섭게 암시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서는 ‘인류의 진보는 언제나 위기에서 시작했다’라는 과거형 정의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위기상황은 차원과 층위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서 멸종에 관해 언급했지만, 이것은 변종이나 아종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멸종과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현대라는 현재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래의 신인류 같은 모순어법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미래의 신인류는 없다. 그때는 거기의 다른 존재들이 존재할 뿐.
시는 가끔 이러한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지극히 사소한 개인적인 반응이나 소회所懷를 보여주는 데, 거시적인 차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자극에 대한 무반응보다는 언제나 생각해 볼 여지餘地를 많이 함축하고 있다.
또 사월이 왔나요? 아직 사월이라고요? 거긴 파랑새가 날아다니나
요? 알록달록한 허밍을 불어가며 나비들이 공중을 쏘다니나요? 잠
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바람이 나뭇잎을 쉴 새 없이 건드리나요?
여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걸요. 친구들의 말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아요. 우리가 언제 이곳을 꿈꾸기라도 했나요? 우린 언제까지 이
랗게 있어야 하나요?
가만히 있으라는, 그것 말고 다른 말을 들려줄 수는 없나요? 촛불
켜든 땅꼬마 같은, 들판의 꽃들도 손발가락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며
피어나는 걸요.
―박완호, 「가만히 있으라는 말,」 부분
교감은 인류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자, ‘인간성’ 확립과 확장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다. 우리는 존재론적 층위에서 낱낱이 흩어진 고립무원의 상태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이 광대무변한 우주에 단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이전에 무의미하다. 인간성은 우리가 상호 인정을 통해 확장된 나를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더 굳건하게 확립된다. 이때 작용하는 모든 정신적 기제를 ‘교감’이라는 한 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 따라서 교감은 나아가 모든 ‘생명’에 작용하는 자연의 법칙과 같다고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
박완호 시인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짓궂게도 성적 뉘앙스를 감추지 않으면서 “다 내가 해 줄게, 앞에 달린, 넌 그냥 가만히 있어.”(남진의 노래 <둥지>에서 가져왔다고 은근슬쩍 알리바이를 대지만)라는 말의 언표와 저의底意 사이의 빈틈을 파고든다.
시인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4월’이라는 한 단어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굳이 엘리어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처럼 4계가 분명하고 24절기에 익숙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경우에는 4월의 의미를 바로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새 생명을 위해 엣 것의 나른함과 구태의연한 죽음을 다시 ‘파랑새’나 ‘알록달록한 허밍’의 ‘나비’를 통해 들쑤셔야 하는 시간이다. “사월이 왔나요?”와 “아직 사월이라고요?”라는 두 개의 의문문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일반적이어야 할 풍경의 2연과 거기서 어긋난(못 미쳤거나 왜곡되어버린) 풍경의 대비를 선명하게 한다. 작은 울림을 통해 큰 교감의 추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인이 노리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그것 말고 다른 말”이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성적 뉘앙스의 이면에서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확인하게 된다. 간접적으로 ‘촛불 켜든 땅꼬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들판의 꽃들’마저 “손발가락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며 피어나는” 사월에 우리만 죽은 척 엎으려 있을 수,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할 점은 박완호 시인은 사월에 왜 생명이 약동해야 하는가를 교설이나 훈계처럼 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능숙한 시인이다. 그만큼 ‘교감’하는 정신에 기대는 바가 크다. 따라서 그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을 취한다.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정치적 발화 방법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달리고 달리다가 모퉁이를 돌 때 쯤 나를 데려가세요. 나도 달리고 싶
어요. 일상의 엉덩이에 채찍을 가하고 달리고 달리고 싶은 걸요. 한 달
음 너머로 또 한 달음 떼고 싶어요. 어이, 거기, 달리는 거리. 달아나는
거리. 같이 좀 달려요. 꽃도 벌써 온 몸 진저리쳐 떨어져 내리는 데 나도
심장을 쿵쿵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가야죠.
달리고 달리는 거리. 달리고 달아나는 거리. 멈출 수 없는 당신과 나의
거리. 헐떡거리는 구멍에서 세찬 소낙비가 내려요. 언제나 젖은 것들 끼
리는 서로 달라붙어 있어요. 그러다가 꽃이 피어요. 착착 피어요. 탁탁
피어요. 피어요. 피어, 당신과 나의 팽창과 축소의 맨 몸 위에
―하병연, 「달리는 거리」 부분
인용 작품은 ‘달리고 달아나는 거리’를 통해 박완호 시인이 발언의 시간적 중점을 ‘거리’라는 공간으로 환치하면서 생명의 어떤 용솟음을 드러낸다. 하병언 시인 역시 약간의 성적 뉘앙스를 배면에 깔고 있는데, 생명이란 것이 최초의 수정 과정 없이 형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만 인정해도 지나치게 추상화하지 않으려는 시인들의 태도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병언 시인은 자기들끼리만 교감한 채 ‘달리고 달려가기만 하는 거리’에 대해 참여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가령 “달리고 달리다가 모퉁이를 돌 때 쯤 나를 데려가세요”라는 바람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면서 그 ‘달리는’ 것이 결국은 동행을 부르는 행위이고, 즉 ‘달리고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3연에서 드러나듯이 ”언제나 젖은 것들끼리는 서로 달라붙어 있어요. 그러다가 꽃이 피어요“라는 생식의 결과에 주목한다. 그래서 시인은 끝 연에서 ”어이, 거기, 달리는 거리. 달아나는 거리, 같이 좀 달려요“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거리‘가 거리街와 거리距離의 뉘앙스를 내포하는 것은 시를 읽는 묘미를 더하게 하는 팁Tip이라 치부한다 해도, ’달리는 거리‘와 ’달아나는 거리‘에서 보이는 뉘앙스의 차이는 의미를 결정짓는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시어의 변주는 시인의 시적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기에 매우 바람직한 수사라 할 수 있다.
2.
정신의 확장으로서의 ‘교감’ 행위는 마치 사진을 찍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체험이란 대상이 행위 자체에 끼치는 영향만큼이나 체험 주체의 자기 반영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죽 단순한 작용-반작용의 문제가 아니라, 특히 정신에 있어서는 자기 성찰이라는 측면이 강조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상호 시인의 경우, 우리가 스스로 밀어내었던 사물을 그 용도가 아니라 존재 자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면서 위와 같은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겨우내 쓰던 난로를 바깥에 내놓았다
바람이 쓸어주고
빗물이 씯어주고
햇볕이 핥아주고
한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요즘 사람들은 잘 하지 못하는
식구 같은 손길에 이끌리는지
노을에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제 제 안으로 들어가려는가 보다
―이상호, 「바깥」 전문
우리의 도구적 이성은 사물을 그 쓰임새와 동등하게 환치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교환과 폐기를 용이하게 해서 이 대량생산 체제를, 다시 말해 과소비적 성향을 조장하는 현 경제 체제와 관련되어 있다. 시인은 “겨우내 쓰던 난로를 바깥에 내놓았다”고 담담하게 진술한다. 이때 ‘밖’이란 아마도 인간적 행위의 주 무대인 ‘안’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밖은 쓸모나 용도와는 일정한 거리를 취하게 되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때 그렇게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사물, ‘난로’는 ‘바람, 빗물, 햇볕’과 교감하게 되고 드디어 “노을에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를 시인은 “이제 제 안으로 들어가려는가 보다”라고 차원을 바꿔 표현하고 있다. 겨우내 사용하던 난로를 밖에 버려두었을 때 일어나는 사건이 난로가 스스로 ‘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니. 이것은 무슨 난로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되찾는 ‘사물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3연에 드러나듯, “요즘 사람들은 잘 하지 못하는/식구 같은 손길”에 난로가 이끌렸다는 점이다. 자연과의 교감이 난로의 사물성을 일깨웠다면, ‘식구 같은 손길’에 사람이 이끌릴 때, 아니 서로를 이끄는 ‘식구 같은 손길’에 의해 인간은 그의 ‘인간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사건이나 함의를 배제한 채 시를 읽으려 해도, 그 시가 생성된 배경이 우리 사회와 이웃들의 삶인 마당에 전적으로 배제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우리는 교감 능력의 고갈로 치닫는 사회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시인’이기를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색을 바꾸기로 했단다
노란 과일의 껍질을 열면
얌전한 네가 눈을 뜨고 거기 앉아 있을 것
같아서 가슴이 쿵쿵거려 손을 못 대고
민들레 개나리 씀바귀 양지꽃 색을 내밀면
수없이 접어 만드는 노란 리본처럼
가슴에 영영 박혀 들 것 같아서
갈 수밖에 없구나 다른 빛의 세계로
색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슬픔의 고통보다 슬픔을 접는 것이 힘들 듯
네 꿈의 배가 갈앉은 바다의 푸른 빛깔도
검정도 하양도 분홍도 택할 수가 없으니
네게 물어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길이 없어 어릴 적 네 그림공책을 열어 보기로 했다
무지갯빛 온갖 그림들 떠올라 눈부시다가도
순간 색을 잃는 텅 빈 하늘 공허한 눈빛 넘기고
너는 무슨 빛깔로 다시 태어났니?
몸속엔 여전히 따뜻한 피가 흐르는지
어린 아가의 눈빛을 들여다보고 싶구나
꿈에라도 너를 품는 늙은 태몽을 주지 않으련?
―임백령, 「색을 바꾸기로 했단다」 전문
시인은 고통스런 ‘세월호’ 사건을 제재로 하여 ‘색을 바꾸기로 했단다’라는 과거형을 통해 그 사건이 남긴 개인적 상처, 나아가 자기 성찰의 결과. 아니다 우리 사회가 보다 성숙해져야 할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전면에 드러낸다.
혹자는 “노란 과일의 껍질을 열면/얌전한 네가 눈을 뜨고 거기 앉아 있을 것/같아서” 좋아하는 색을 바꾸는 시인의 행위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임백령 시인은 “색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노란 리본’으로 상징되었던 ‘노랑’이란 색깔은 말 그대로 상징일 뿐, 슬픔과 아픔은 ‘파랑, 검정, 하양, 분홍’ 모든 색 속에 잠재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그렇게 ‘무지갯빛’ 색을 모두 잃은 ‘어린 아기’들 앞에서는 모든 색이 다 고통의 상징으로 읽힐 뿐이다. 그러므로 “색을 바꾸기로 했단다”는 결코 끝나지 않을 과거형이 된다. 이 과거형의 회한이 상상적 해결, 즉 “길이 없어 어릴 적 네 그림공책을 열어보기로 했다”거나 “꿈에라도 너를 품는 늙은 태몽을 주지 않으련?”으로 이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교감 행위를 지향하는 태도가 어쩌면 시의 근본적인 소통 자세일 것이다. 그 행위의 의미를 표면에 전사轉寫하든 이면에 무늬로 숨기든, 또는 그 대상이 단순한 사물이든 격정적인 사건이든 관계없이 시는 제 본령의 자세를 지키면 그뿐, 그뿐이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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