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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특집Ⅱ 봄, 시의 에너지/정미소/아직은 이른 봄, 산수유 꽃망울은 터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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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특집Ⅱ 봄, 시의 에너지/정미소/아직은 이른 봄, 산수유 꽃망울은 터지고……
아직은 이른 봄, 산수유 꽃망울은 터지고……
정미소
입춘이 최강한파를 밀어내고 산수유 노란 꽃망울을 터트렸다. 목안을 따갑게 하던 미세먼지도 말끔하게 걷혀, 모처럼 파란 하늘이 뭉게구름을 피워 올렸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수리산 둘레길에 오른다. 나뭇가지마다 갓 부화한 어린 새들이 짹재글 몰려다니며 햇살목욕을 한다. 저만치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겨울의 꼬리를 잡고 주춤거린다. 얼었던 바위도 기지개를 켜고, 왕벚나무 우직한 몸통으로 봄물 차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지구촌의 축제인 평창동계올림픽의 채널을 따라 울고 웃는 사이에 詩는 깊은 겨울잠에 들었다. 詩를 깨우듯, 산수유 노란 꽃망울에 말 걸며 눈맞춤하는 걸음이 상쾌하다. 때마침 불어오는 훈풍에 가슴을 열어 크게 심호흡을 한다. 눈을 들어 슬기봉 봉우리를 바라보니 거대한 숲이 오케스트라가 되어 봄을 연주하는 중이다. 햇살과 바람과 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나도 발장단을 치며 봄의 연주에 슬쩍 끼어든다. 새순처럼 가벼워진 마음이 기억의 저편에서 천 양희선생님의 시를 떠올린다.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새들도 둥지를 고른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메아리는 능선을 짧게 찢는다
한 줌씩 생각은 돋아나고
계곡은 안개를 길어올린다
바윗돌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몸보다 먼저 산정에 올랐구나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사람들은 서둘러 나를 앞지른다
아무도 늦은 저녁 기억하지 않으리라
그리움은 두런두런 일어서고
산 아랫마을 지붕이 붉다
누가 지금 찬란한 소문을 퍼뜨린 것일까
온 동네 골목길이 수줍은 듯 까르르 웃고 있다.
―「이른 봄의 시」
누가 봄이라고 소문을 퍼트렸을까? 북극곰처럼 꽁꽁 동여맨 겨울도, 지독한 독감바이러스도, 문풍지를 쥐락펴락하던 칼바람도 맥없이 무너진 봄, 봄이다. 지난겨울은 유독 추웠고, 마음의 여유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살았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고요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하루하루를 쫓기듯 숨차게 사는 일상이 초조함을 몰고 왔다. 나쁜 생각은 늦은 저녁일수록 더욱 또렷해져서 걱정에 걱정을 더하는 변종바이러스가 잠까지 설치게 만들었다.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면 삶의 속도를 줄이라는 말에 밑줄을 그었지만, 빠름 더 빠름으로 내달리는 세상의 흐름에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엇이 불안한가? 건강, 돈, 일, 자녀의 미래, 이별, 친구, 외로움, 죽음, 詩, 연합뉴스가 전해주는 스물네 시간의 사건사고들. 세상에는 나와 무관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공감백배하며, 행복보다는 불행한 일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어 우울해졌다. 직장에서의 동료는 지난 밤, 비트코인으로 800만원을 벌어두고 출근했다는 말에 부러움 반 속쓰림 반으로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는 나의 멍함이 안타까워, 그냥모르고 말겠다고 했다.
둘레길의 끝자락에서 내가 이름 지은 ‘사색의 숲’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바람은 빠르게 오솔길을 깨우고, 공연히 소리를 질러 메아리를 만든다. 짧은 메아리가 돌아오는 귓가에 한 줌씩 생각들이 돋아난다. 그럼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 건강, 가족, 일, 詩, 친구, 독서, 수영, 홈쇼핑, 영화관람, 여행…… 내가 불안해하는 것들이 또한 행복하기도 한 아이러니다. 바윗등에 기댄 팽팽한 마음이여. 아직도 덜 핀 꽃망울이 있어서, 집착과 욕망을 무겁게 짊어지고 긴 겨울을 건너 온 것이다. 어깨 결림과 허리의 통증이 이유 있는 몸의 반항이었다. 불교에서 사바세계를 말한다.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부딪히는 고통과 슬픔, 이별, 아픔, 시련을 견디고 이겨내야 영혼이 성장한다고 한다. 고통이나 시련을 완전 연소시켜서 티끌이 없을 때 비로소 마음이 비워지며 진정한 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산수유 노란 꽃망울을 떠올린다. 거센 폭풍과 비바람이 지나갔을 것이다. 천둥과 번개가 귀청을 때렸을 것이다. 폭설이 몸을 얼어붙게 했을 것이다. 붉은 흙먼지가 눈을 가렸을 것이다. 그렇게 건너온 봄이구나. 다만 침묵하며, 제 삶에 의연하며, 자연의 순리 앞에 저항하지 않는 당당한 품위가 느껴진다. 수리산의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가 모두 꿋꿋하게 견디며 소리 없이 걸어온 봄이다. ‘사색의 숲’에서 계곡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담근다. 시리다. 시린 손을 겨드랑이에 넣으며, 물은 물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제 성질을 품고 있어서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생각한다. 너른 품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 있음과 없음은 큰 차이가 난다.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의 차이이다. 짐작해보니 여유 있음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내가 여유 있다는 생각은 없어도 풍족하고, 여유 없음은 있어도 부족한 것이다. 눈이 내리다 멈춘 곳에 아직은 이른 봄 햇살이 웃으며 걸어온다. 체감온도 영하20도의 한파 속에서도 산수유 꽃망울은 터지고, 수리산에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봄을 조율한다. 겨울잠에 빠진 詩가 트럼펫의 먼지를 닦는다.
*정미소 2011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벼락의 꼬리』. 제7회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위원.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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