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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시집속의시/천선자/존재가 존재하지 않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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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시집속의시/천선자/존재가 존재하지 않은 존재
존재가 존재하지 않은 존재
―김다솜 시집 『나를 두고 나를 찾다』
천선자
턱을 내리고 다시 약간 위로 다시 옆으로 올리고 ok 혼자 나가기 싫어 동반 가출한 나를 찾으로 갔지요
어딘가 있을 나를 찾아 지갑 속마다 주머니 달린 옷마다 털어봤지만 없었지요 서랍을 열어 봐도 없었지요 그동안 나는 나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나는 없고 그가 나였다니요 점프하듯 현기증이 나고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어요 그러나 그것이 있어야 살아있는 목숨, 어쩌다 나를 잊어버리고 찾아 헤매는데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법法 법이 바뀌었다며 여권사진처럼 귀와 눈썹 다 내놓고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다시 찍어 오라 합니다 자격증, 수료증, 졸업장, 이력서…… 은행, 동사무소, 여권 발행처…… 나는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러 다녔지요 나는 여기에 있는데 수없이 나를 복사했지요 지금 세상에 나는 없고 나만 있지요 나를 찾지 못해 운전도 못하고 하루하루 기다렸지요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분홍 루즈를 바르고 눈썹을 짙게 그리고 다시 찍은 사진 가지고 주민센터 갔다가 경찰서 갔다가 결국 나를 가출 신고합니다 가출하고 싶어도 가출한 시간도 없이 살아온 나를 두고 가출한 나는
―「나를 두고 나를 찾다」 전문
인감증명서 발급 받으러 간 동사무소에서 지문인식기계가 엄지손가락의 지문을 보더니, 나를 증명할 수 없단다. 이런, 어리버리한 물건을 봤나, 코앞에 있는 나를 인식할 수가 없다고, 황당하구먼, 화도 못 내고 붉으락푸르락, 중얼중얼 거리는데, 담당공무원의 말이 명작이다. 선생님의 엄지손가락에 있는 지문이 닳아서 남아있는 선으로는 본인을 증명할 수 없으니 지문을 다시 그려오세요.
시방, 나보고 다시 태어나서 출생신고를 하고 주민등록증을 다시 발급받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을 복사해서 다시 오라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긴 한가, 왕방 눈을 껌벅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실금으로 그려진 지도를 보며 읽어버린 나를 찾아 간다.
‘자격증, 수료증, 졸업장, 이력서…… 은행’, 등을 모두 가도 나를 찾지 못하고, 결국 ’경찰서로 가서 가출 신고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와 관련된 서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은 존재로 남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누가 대답 좀 해줘,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로 돌아와서 귓바퀴를 돌린다.
성냥통 속 성냥개비처럼 사람들을 싣고 전철이 지나갔다 그 안에서 성냥개비들은 서서 앉아서 문자를 주고받고 강의를 듣고 음악을 듣는다
영화를 보다가 게임을 하다가 채팅 하는 성냥개비들, 스크린도어에 거울처럼 비치는 성냥개비들은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링가샤리라’ 닮았다
강변 잠실 사당 선릉 신도림 서울역 왕십리 동대문 성수 시청市廳……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다가 약속장소 찾아 환승, 나가는 곳1 2 3 4 …… 확인
빌딩 위에 별들이 태어났다 별들이 사라지고 성냥개비는 2호선을 타고 어딘가 갔다가 2호선에서 내려 다른 빈자리리로
―「역에서 역으로」 전문
‘성냥통 속 성냥개비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작은 불씨만으로 훅 일어나는 불꽃이 되고 싶은 때가 있었지만, 이 십사시간 찍어내는 초코파이처럼 자동화되어 살아 온 시간의 그림자를 지그시 밟고, 강변 잠실 사당 신도림 서울역 왕십리 동대문 성수 시청市廳…… 순환되지 않는 순환선을 타고, 수없이 나를 잃어버리고 찾으며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다’가 침을 흘리고 코를 골며 잔다.
보름달 아래서
오색 흰나비 번데기는
나뭇잎으로 위장한 채 매달려 있다
실 뽑아 고치 만드는 누에처럼
밤나무누에나방도 하현달 아래 보인다
풀잎에 붙어있는 진드기 먹는 사마귀는
그믐달 아래서 개미 무리에게
잡혀 먹히기도 하는
먹이사슬
쇠똥구리, 극동버들바구니는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죽은 척, 죽은 척 한다
어느 스승에게 죽은 척 해야 산다는 것을 배웠을까?
살기스런 저 애벌레들의 숲
먹고 먹히는 곤충들의 세계
을이 갑을 이기는 무기는
오직 지혜인가, 침묵인가.
―「곤충의 세계」전문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물컹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절반쯤 번데기로 변해가고 있는 내 모습, ‘밤나무누에나방으로 변했다가 쇠똥구리로 변했다가 극동버들바구니로 변했다가 오색 흰나비’ 번데기로 변하는 중이다. 놀라 소리치지지만,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기지에 도착한 전동차는 귀를 닫고 잠을 청한다.
어찌 이런 일이, 그레고리 잠자가 되어 가고 있네, 그레고리 잠자, 정말 잠자가 된 거야, ‘그레고리 잠자’는‘카프카(1883-1924)의 단편소설 「변신」의 주인공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그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한 마리의 갑충으로 변해있었다,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느끼는 불안과 소외감, 부조리함을 다룬 작품’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이 머릿속에 매미 떼를 풀어 놓았나봐, 매미 울음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고막이 터질 것 같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시간의 먼지를 탈탈 털어서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예전의 나로 돌아 갈 수 있을까.
전동차를 빠져나와 ‘하현달 아래’ 잠든 숲으로 기어가는데, 거대한 구두 바닥이 땅을 뒤흔들며 다가오고 뛰려고 애를 써도 이리저리 꿈틀대기만 한다.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구두 바닥이 일으킨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어둠을 굴리고 굴려서 사찰 마당, 금송 아래 핀 불두화 꽃대 위를 기어오른다.
푸른 잎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몽실몽실한 꽃송이 목탁을 두드리며 경을 읽는다.
그대만 눈, 귀, 입 있고
난 눈, 귀, 입 없는 새인가요
새들의 지저귐 듣는 것도 복 받는 길인가요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미움의 돌 하나가
부메랑처럼 그대 가슴으로 돌아가는 줄 모르시나요
지금 그대의 미움은 누가 만들어 옷걸이에
걸어 놓았는지 거울을 보세요,
새야, 새야,
듣고 보고만 있다고
부리로 상처주지 마세요
단지, 저 허공 무서워 살얼음 걷듯 걷는데
개 짓는 듯 하는 그대는 무엇이 무서운가요
벙어리 이 마음 알아 줄 허공 있기에
길을 걸으며 꿈꾸는
그대와 나
스님, 신부, 목사, 시인님, 무섭지만
무섭지 않음을 어찌 할까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눈」 전문
‘새들의 지저귐 듣는 것도 복 받는 길인가요’ 번데기가 된 것도 복 받는 길인가요. 예전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닐 수가 있나요,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있나요.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길인가요, 나는 나인가요, 아닌가요, 나는 있나요, 없나요, 풍경소리에도 흔들리는 뜬구름 같은 인생의 한 페이지인 나, 아니, 번데기, 쉬지 않고 목탁을 두드리고 경을 읽다가 불두화 위에서 꿈틀꿈틀, 꽃잎이 흔들린다.
승차권 없이 사차원 세계를 다녀왔다
창에 비쳐오는 불빛은 생명의 에너지로 다가와
또, 어느 천상을 태우려고 떠오르는가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풀벌레들의 합창소리
눈꼬리 비비며 기지개 펴듯 일어서는 붉은 풀잎들
종소리, 새소리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니
어디선가 들리는 자비로운 그 분의 목소리
누군가를 용서하기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네
―「아침의 종소리」 전문
‘승차권 없이 사차원 세계를 다녀왔다.’ 아침의 눈꼽을 떼는 종소리가 들린다. 사실 난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어디서 왔다가 또 어디로 가는지 자주 흥얼거리던 유행가 가사처럼 잘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모르는 나를 아는 것처럼 생각했고,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해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라고 믿으며 살았다.
나의 부제는 곧 죽음, 인생의 끝이 어디쯤인지 죽으면 당연히 알 수 있지만, 살아 있어야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있고, 슬픔도 기쁨도 내가 살아있어 느끼는 감정이다.
소망으로 만들어진 돌탑의 잔잔한 숨소리를 들으며, ‘종소리, 새소리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니,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 분의 목소리’ 진정한 너를 찾는 길은 대단한 깨달음이 있어야 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바쁜 여정을 잠시 책꽂이에 꽂아두고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는 것이 너를 찾는 것이다.
동자꽃이 도란도란, 수련이 물 위에 머리를 내밀고 수런수런 대는 암자로 가는 김다솜시인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물소리, 새소리에 시상을 넣고 잘 저어 맑은 하늘에 수채화를 그리는 시인, 인고의 씨앗을 뿌렸으니, 비바람이 부는 여름을 잘 견디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천선자 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 『파놉티콘』.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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