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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정재호/나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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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7회 작성일 19-07-0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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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정재호/나의 겨울


나의 겨울


정재호



  지붕 위에도 장독대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산간에는 살얼음이 어는 입동立冬이 찾아왔다. 여름 내내 무성하게 피어서 내 마음 파랗게 물들이고 생기 넘치게 활력과 희망을 북돋아 주던 느티나무 잎새들, 온갖 추억을 담아 오색 단풍으로 물들어 가고,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마저 불어오면 모든 기쁨과 아픔 담긴 낙엽 되어 떨어져서 굴러다니는 초겨울. 나의 겨울은 한 그루 나목裸木, 잎새 피워 푸른 세상 함께 열어 아름다운 한 계절 이루었던 추억을 간직한 채, 홀로 떨어져 바람이 부는 대로 정처 없이 굴러다니는 한 잎 낙엽의 외로움. 홀로 낙엽으로 찬바람에 실려 슬픈 플롯의 음색에 젖어 굴러다니다, 뒤돌아보면 지워지지 않은 상혼傷魂 함께 있어, 내 아픔 다시 되새김질하게 되고, 참고 견디어 온 끝없는 험로險路에 눈물이 난다. 얼마나 부딪히고 부서지며 방황해야 아픈 이 시련이 끝날까. 쓸쓸함에 휩싸이면 외로움을 잊어보려고 오래도록 오르던 뒷산, 낙엽이 덮혀가는 둘레길을 따라 거닌다. 아직도 온기溫器 남아있는 추억들 다정하게 손잡고 거닐며 나누던 사랑, 그 이야기들이 끝없이 떠오르는 길이다. 슬픔을 안고 오는 싸늘한 바람이 불면 가슴 저미던 추억이 머무는 자리. 앞에 걸음이 멈춰지고, 먼저 떠난 그니가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같이 앉아서 잠시 쉬어 가자는 듯 따라오라며, 손짓하던 앞바람이 등 밀어 보내는 듯 발걸음이 멈춰 지는 곳. 낙엽만 자북이 덮혀 있는 빈 벤취 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나의 허망虛妄을 본다. 이럴 때 목 축여 주던 물병도, 간식꺼리 넣어 매던 배낭도 없다. 세심한 손길로 챙겨주던 그니도 없고 먼저 계획했던 생각마저 사라졌다. 두고 온 막걸리와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한번 떠나가면 뒤돌아보고 싶어지는 아쉬움도, 함께 즐겼던 추억도 다 외면하고 좋은 세상 만나 즐겁게 살아가고는 있는 걸까. 너무나 멀리 떨어진 낮선 세상에 적응하는 시간이 모자라 돌아오기가 어려운 걸까. 함께 머물곤 했던 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면 간절한 내 소원 알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지, 아니야. 덧없는 이 망상에 언제까지 매달려서 헤매야 하는 끝은 언제 어디쯤일까. 눈에 밟히는 모든 장소와 쓰던 물건들이 연류 되어 기억나지 않는 것이 없어, 부질없는 헛된 애착인 걸 알면서도 단절할 수 없는 건 긴 사랑의 역사가 있기 때문인 걸 어찌 하랴. 이른 봄부터 밑거름인 퇴비 뿌리고 괭이로 흙 갈고 뒤집어 거름과 흙 골고루 섞어서 고랑 일구고, 잡초 안 자라게 비닐 덮씌워 놓고, 키워서 먹고 싶은 씨앗 뿌리고, 모종도 옮겨 심어서 함께 마음 맞춰 사랑으로 가꾸던 텃밭.
  새싹이 돋아 먹을거리 야채로 자라고 한쪽에는 토마토, 가지, 호박이 자라 먹을 만큼 크게 익으면 풍성한 식탁 차려 놓고, 도란도란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에 사랑 담긴 밀어도 주고받았던 마주 앉았던 자리는 덩그러니 비어 있다. 허상과 망념에 빠져 지내면 지낼수록 움직일 힘마저 사그라들어 심신을 추스릴 수 없게 되고 만다. 초겨울 텃밭은 추수가 거의 끝나고 무, 배추만 남아서 푸르름으로 가득 자라던 작물의 흔적만 남는다. 김장 때까지는 기르고 보살펴야 할 마지막 작물이기에 벌레도 잡고 함께 자라는 잡초도 뽑으면서 다른 곳에 마무리 할 일거리는 없는지 살펴본다. 정리하는 밭일에 매달리면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가고, 온갖 망념과 우울에서 벗어나 평상심으로 회귀할 수 있는 다른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다 잠깐 작업을 멈추는 순간 사방을 둘러보며 그니를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움직이고 같이 일을 해왔었는데 옆에 없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착란이 순간 일어난다. 집안일을 하고 있나, 돌아와 현관문을 열고 그니를 불러본다. 부르는 소리가 벽과 천장을 울리며 되돌아온다. 가지런히 놓였을 신발도 없다. 외출이라도 한 걸까. 흘러 가버린 함께했던 지난 시간 속으로 돌아가 또 혼자 헤매고 다녔나 보다.


  2015년 2월15일. 그니가 내 곁을 떠나갔다.
꿈결 같은 오십 년, 아름답게 행복을 가꾸고 엮어온 추억 속을 오르내려 보기도 하고 때로는 무작정 헤매고 다녀야 하는 외기러기 모양이 어설프고, 벗어나도 현실인지 꿈인지 분별이 잘 되지 않아 힘겨운 날을 보내고 맞는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투병 말미末尾에 고통에 시달리던 애처로운 모습, 곁을 지키며 보살펴 왔던 나 또한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련기였다. 아픔을 참을 수 없어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는 순간순간, 처절한 모습들이 나의 일생에 큰 충격으로 각인되어 안타까웠던 그 상황이 떠오르면, 몸서리쳐지고 식은땀이 나고 눈물 흘리는 나의 고통이 되어버렸다.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현명하게 적절한 수습처리를 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머뭇거리다 치료시기를 놓쳐버린 내 무능 무지한 대처능력이 안타깝고 후회스럽다. 가슴 아리는 이런 편린들과 후회는 그니를 좋은 곳으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잡고 매달리고 있는 것 같다. 자유인으로 다 하지 못한 즐거움, 여유롭게 누리며 따사롭고 포근한 곳 찾아가게 보내드리고 싶어 항상 기도를 드리면서도, 한편 나약한 내 심성이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 것 같다. 그니가 떠나간 것이 어제 같아, 꿈결에라도 한 번만이라도 조우해서 모습을 보고 싶은데, 이 염원이 쌓여 가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그리움만 더 짙어간다. 찬바람이 불어오니 낙엽이 흩날리며 지천으로 진다. 저 바람 타고 지난날 모든 추억 다 낙엽으로 털어버리고 무심無心으로 날아보고 싶다. 침울해져 힘겨운 날을 그니의 늪에 빠져 헤매다가 한줄기 바람으로 불어 봐도 그니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바람은 늘 혼자 운다
밤이면
추위 속 홀로 떠돌던
혼령 하나
내 어깨에 산발한 머리
뉘일 때
바람은 비로소 소리 내어
운다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
겨울밤 긴 꿈속
뒤척이며 헤매다
새벽녘에사
실성한 그 바람
애절한 절규 들을 수 있다


오늘은
어느 곳으로 떠돌면
만날 수 있을까


사랑이 그리운지
전신주에 앉아 울다

목이 쉬었다.


―「겨울바람」


  산촌의 겨울밤은 이따금 들창을 스쳐가는 바람소리와 멀리서 개 짖는 소리 뿐 정적이 쌓이고 깊어 간다.
  빛바래 가는 추억들 시달림에 빠져있으면 할 일은 잊어버리거나 미루어지면 시기를 놓쳐 버리면 풀지 못한 숙제로 쌓여 간다.
  평정심平定心을 찾기 위해서, 떠돌아 왔던 벌판에 아프게 했던 것, 아쉬웠던 것, 힘겨웠던 것, 숙명의 부채들을 풀어 겨울바람에 날려 보내고 부담 없이 초심으로 새 마음 둥지 지어서 살고 싶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내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성자聖者의 말씀,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를 따라 실행하고자 한다.
  마음속을 휘저어놓으면 혼란에 빠지는 허욕虛慾과 망상妄想, 여기에서 벗어나면 갈등이 없어질 것이고, 맑고 바른 마음으로 정도正道를 가꾸어 가는 삶은 아름답고 청결해서, 기쁨이 가득 피는 꽃밭으로 가꾸어 갈 수 있는 희망과 자신감이 생긴다. 





*정재호 1965년 《심상》으로 등단. ‘지하시地下詩’ 동인으로 활동. 시집 『광나루 산조散調』, 『들국 향기로 건너는 세상』, 『외기러기의 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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