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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천선자/겨울 시, 나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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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천선자/겨울 시, 나의 겨울
겨울 시, 나의 겨울
천선자
겨울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내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을 생각했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전문
백석 시인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백시반과 모친 이봉우 씨의 장남이다. 본명은 기행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으로 불리기도 했다. 1929년(18)에 오산 고등보통학교 졸업하고, 1930년 <조선일보> 작품 공모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했다.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 토오쿄 아오야마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1935년 시 「정주성」을 발표하고 1936년 『사슴』을 발간했다. 1937년 영생보고 교사로 재직했으며, 1938년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발표했다. 1947년(36세)에는 시 「적막강산」을 신천지에 발표했다. 번역소설과 아동시집 등 다수의 작품이 있고, 분단 이후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한국문학에서 완전히 매몰되더니 1987년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오늘 같이 눈이 푹푹 내리는 날이면, 백석 시인과 자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모티브가 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는다. 백석 시인과 자야의 운명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중 교사들의 회식 장소였다.
그때 백석 시인의 나이는 스물여섯이고 자야는 스물둘이었다. 백석 시인은 자야가 사온『당시선집』을 보면서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자야는 기생이며, 본명은 김영한이고 성북동의 길상사를 시주한 장본인이다.
부모에 대한 효와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갈등한 백석 시인은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거절한다.
평생 당나귀를 그리워하며 살았던 자야가 생각나고, 나와 나타샤가 생각나고,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생각한다.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조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현실과 꿈에 개연성 대해서 생각을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보라 치는 플랫폼에서 옷깃을 세우고, 기적을 울리며 들어오는 현실이라는 기차에 오른다. 기차의 등뒤에서 새벽이 떨어져 나가고, 새벽별이 뚝뚝 떨어져 흐른다. 현실을 따라가자니 꿈이 울고, 꿈을 따라가자니 현실이 울고, 기차는 꿈으로 가는 환승역을 지나 만주에 다다른다.
세 개의 삼거리와 아홉 개의 좁은 골목을 따라가며 만나는 집, 다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문턱, 끝없이 어두운 길의 꽃받침인 문턱을 넘는다.
생계를 위해 떠난 남편, 돌아오지 않은 남편, 왼쪽 의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리움이 뱃길을 따라 가고, 허영허영한 달빛의 걸음으로 깊어가는 고독이 방안을 가득 채우면 오른쪽 의자에 앉아 계피나무로 만든 지도를 펼친다.
솔솔 피어나는 계피향은 시간을 되돌리고, 까치들이 오작교를 만들고, 일 년에 단 한 번 만나는 남편, 한 움큼의 백동전을 하늘 높이 던지면 밤새 하얗게 쏟아지는 꿈의 향연이 있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세속으로 달리는 기차는 구리귀신이 되고, 구리귀신에게 길들여진 노예의 때늦은 후회가 있다. 마른기침을 콜록거리며, 침몰하는 꿈의 조각을 짜맞추어도, 지극히 이성적인 구리귀신은 화폐의 가치를 쫓아 내리막을 달린다. 꿈은 점점 멀어져도 “푹푹 눈이 내리는 밤, 흰 당나귀”의 방울소리만 딸랑거려도 꿈과 사랑이 있는 가평의 마가리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시의 겨울
서점에서 시집 코너가 없어진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다른 장르의 책들이 시집 대신 빼곡이 꽂혀있는 것을 보면 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무겁다. 이렇게 추운 시의 겨울이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독자들이 멀어진 이유 때문인가, 독자들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이러다가 시의 겨울이 영영 끝나지 않는다면, 시라는 장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독자에게 시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독자의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이 시점에서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들이 먼저 독자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시를 쓰고, 쉽고 재미있는 시를 쓰면 독자들에게 시를 읽지 말라고 해도 읽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독자가 되고, 그런 날이 오면, 모든 사람이 한 손에는 핸드폰, 또 한 손에는 시집 한 권씩은 들고, 문명과 자본이 활개치는 사회 속에서도 독자와 작가는 소통하고 공존하게 될 것이다.
나의 겨울
생각해보면 내게도 지독한 겨울이 있었다. 다시는 봄이 올 것 같지 않는 길고 긴 현실이라는 눈밭에 던져진 때가 있었다. 우리는 새물청어에 매나리로 만나 살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잃지 않았다.
시어머니께서 메주 한 덩어리를 주시면서 된장을 담으라 하셨다. 그 메주를 보면서 몇날 며칠 가슴앓이를 했다. 소금항아리도 텅텅 비어 있고, 쌀항아리도 텅텅 비어있고, 갓난이의 분유통도 텅텅 비어있다. 사정은 빚꾸러기였다. 비좁은 방안에는 빈 깡통 소리가 요란하고, 빈 수레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귀에 딱지로 앉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메주를 항아리 속에 쓰셔넣고 맹물을 부은 다음 뚜껑을 닫아버렸다. 한참 잊고 지내다가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못쓰게 된 메주 덩어리 물어 무삼하리야.
시어머니 세모눈에 변명도 못하고 돌아서서 눈물만 펑펑 쏟았다. 팔삭둥이인 갓난아이는 매일 열이 펄펄 끓어 바람꽃을 피웠다. 수시로 갓난아이를 업고 응급실로 뛰어가 링거를 이마에 맞혀야 했다. 밤새도록 안고 서 있다가 링거가 다 들어갈 때쯤이면 내가 쓰러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처럼 지쳐가기 시작하는 때에 옥돌매를 신주단지처럼 건네주신 시어머니, 매서운 한파에 외투 하나 없이 찬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친정언니가 찾아와 기저귀를 빨려고 빨래비누를 아무리 찾아도 없자, 그냥 냄비에 물을 데워 기저귀를 빨면서 울고 또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붉은 등이 켜진 눈 속에는 봄이 끝없이 멀어지고, 눈보라만 날렸다.
날이 가면 갈수록 비각이 되어가는 어느 날, 동네어귀 시끌벅적한 소리에 풍각쟁이가 왔나 밖으로 나가보니 재봉틀을 싣고 다니며 파는 장삿꾼이다.
재봉틀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 내가 재봉틀을 만지작거리자 그가 돈은 조금씩 나누어 내라고 한다. 안 쓰면 한 달 후에 재봉틀을 도로 가지고 간다고 한다. 막무가내로 재봉틀을 두고 사라진다.
남편은 아침에 직장에 가고 쏟아지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고 단잠에 들었다. 꿈을 꾼다.
언덕을 오르고 나지막한 산을 넘어 병원으로 들어가는데, 귓가에 모기소리만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비몽사몽 갓난아이를 갓난아이 사촌의 그네에 태우고 흔들거린다. 엄마는 섬 그늘에 굴 따러 가고,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잠이 든다.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꿈과 똑같은 꿈을 또 꾼다. 어둠 속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을 넘어 천신만고 끝에 병원에 도착한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응급실로 들어가는데,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겨우 일어나 벽을 붙잡고 방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재봉틀 수금하러 온 장삿꾼이다. 내일 아닌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엌 바닥으로 쓰러지고 만다.
그가 축 늘어진 나를 안아 앞마당 화단에 내려놓자, 옆집 새댁들이 울며불며 갓난아이를 부르며 방안으로 손가락질 해도 누구 하나 섬뜩한 기운에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보니 아이가 그네 위에서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다.
월세 못 올려주어 이사를 자주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집도 싼 집을 구하다가 굴뚝이 구들장 밑으로 난 집인지 모르고 들어간 것이다. 항상 부엌문을 열어 두었건만 그날은 태풍이 왔는지 묶어둔 끈이 풀려 닫히는 바람에 그 사단이 일어난 것이다.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흔들며 애아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하나 내가 온 힘을 다해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아무도 내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들의 말은 복화술처럼 정신을 흐리게 하고, 열려진 입들이 하늘에서 둥둥 떠다닌다.
사람이 죽었다는 웅성거림과 함께 동네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혀를 끌끌 차다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씩 한다. 한 달밖에 안된 갓난아이가 불쌍하네, 엄마를 잃어버렸으니 어찌 하나. 흐느끼는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귀를 천천히 깨우면서 조금씩 의식의 돌아왔다. 주인아주머니가 식초 탄 물을 먹이는 바람에 눈이 풀리면서 다시 쓰러지고, 다급해진 상황에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옆방 새댁의 남편이 자다 말고 일어나 산업도로로 달려갔다. 한 겨울에 잠옷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도로 한 가운데서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아무 차나 세우려 했지만 자동차는 피해서 달아났다. 근처 아파트로 달려가 시골에 계약하러 가는 출발한다는 부동산 사장의 차를 가로 막고, 사람 살려달라, 애원하다가 협박하다가 겨우 데리고 왔는데, 사람들은 선뜻 손을 못 쓰고 있다.
그때 쌀집 아주머니가 달려온다. 남자새끼들이 겁은 많아가지고,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다리를 잡을 테니, 빨리 머리 들어. 고함을 지르니 옆에 있던 꺽다리가 덜덜 떨며 머리 들어 차에 태우고, 가까운 응급실로 간다. 고무호스를 뱃속까지 넣어 산소를 넣고 응급조치를 받고 난 뒤에 서서히 귀가 들리면서 눈을 떴다. 길고 긴 호스가 코에서 계속 빠져나오는 것을 본 나는 다시 쓰러졌다.
며칠이 지나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의 말, 사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있습니까? 바람이 불면 날아가겠어요, 흐흐흐 빼빼로 데이, 홍보대사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황천길 가다가 돌아와서 그런지 나는 고로롱팔십살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희로애락은 있으니, 눈물의 계단을 한 계단씩 오르다 보면, 눈보라 치는 겨울을 지나 햇살 따스한 봄을 맞이하는 법이다.
*천선자 2010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도시의 원숭이』, 『파놉티콘』. 제5회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 제1회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위원.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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