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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정미소/침묵으로 흐르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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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특집Ⅱ 겨울 시 시의 겨울/정미소/침묵으로 흐르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침묵으로 흐르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정미소
1. 겨울의 시
12월의 문턱에 들어서면 가장먼저 눈을 기다린다. 눈은 입시한파의 꽁무니뼈를 잡고 꾸물거리다가 약속도 없이 온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들을 밟고 고요히, 고요히 내려앉는다. 뼈 시린 플라타너스의 등에도, 겨우살이 푸성귀를 키워 낸 비탈 밭에도 소리 없이 와서 쌓인다. 눈이 오는 계절엔 어김없이 독감을 앓는다. 맹렬한 독감은 흐린 시야로 언뜻 들어오는 한두 송이 눈 바이러스다. 눈 바이러스는 목안을 간지럽히다 열꽃을 피우다 이내 재채기를 하며 콧물기침을 수반한다. 링거수액을 맞으며 거리로 내달리는 마음을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묶기도 한다. 하지만 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겨울이 주는 선물 같다. 함박눈, 진눈깨비, 싸락눈, 가루눈, 눈이 내리는 날은 마음이 먼저 달떠서 어딘가 호들갑스럽게 눈 소식을 알리고 싶어진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먼저 인사를 건넨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따뜻한 위로 같다.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을 거미처럼 살다가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 줄 것 같다.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시 한 편을 적는다.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내서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 조병화 「겨울」전문
천지가 눈으로 덮여 고요한 풍경 속으로 이름 모를 봉분이 들어온다. 아침햇살이 일어나 그늘 진 봉분의 한쪽 어깨를 툭툭 털며 마름질한다. 하얀 햇살분무가 눈부시다. 새들 이 두툼한 눈 이불에 몰려와 재재거리며 발자국을 찍는다. 침묵하며 돌아누운 봉분 속의 베갯머리가 적막하다. 그는 살아생전에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 살아도, 살아도 진흙탕인 세상의 뻘을 맨발로 내달렸을까. 시름에 겨울 땐 한많은 이 세상 목 놓았을까. 위대할 것 같은 인간의 삶이 한 잎 가랑잎으로 바스라진다. 산다는 게 아무것도 아닌 잠시잠깐의 희노애락이라면 차라리 겸허해진다. 오늘 하루는 눈물처럼 번졌다가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짧은 순간의 한 땀, 바느질 깁기인가. 듣는 사람도 없는 봉분 위에 눈이 쌓인다. 적막한 베갯머리의 노래를 바람이 가끔씩 일어 나 살풀이를 하다가 회오리치며 배뱅이굿 장단을 벌인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공평하다. 임금님이 누운 능에도 비탈진 산 속의 이름 없는 무덤에도 소복하게 쌓인다. 기쁨도 슬픔도 침묵으로 하얗게 덮는다. 겨울은 세월의 굽이굽이를 입동, 소한, 대한, 입춘의 윤회로 흐르며 소리 없이 봄을 키운다. 묵묵한 침묵의 계절을 노래한 시 한 편이 지친마음에 큰 위로를 준다.
2. 나의 겨울
첫 눈을 기다리며 주말의 극장가를 기웃거렸다. 상영 중인 영화의 포스터를 살피다가 제목이 ‘침묵’이라는 말에 이끌려 표를 샀다. 영화가 시작되려면 약 한 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다. 매점에서 눈송이처럼 펑펑 터지는 달콤한 팝콘과 커피를 사서 홀짝거리며 ‘침묵’의 시간을 기다렸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였다. 딸과 죽은 연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가능했던, 재력과 사랑을 완벽하게 갖춘 행복한 남자에게 어느 날 불행이 닥친다. 아내를 잃고 여고생인 딸과 함께 살다가 유명세를 타는 여자 가수를 사랑하게 되었다. 남자는 딸에게 여자를 소개한다. 엄마라고 부르라고 한다. 딸은 방황하며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두고 나이트클럽을 전전한다. 반항심이 극도로 치닫던 날, 나이트클럽에서 우연히 보게 된 여자의 섹스동영상을 보고 분노한다. 만취한 딸은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한다. 나이트클럽의 화장실에서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바로 그날 남자의 약혼녀이자 유명한 여가수가 살해당하고, 용의자로 남자의 딸이 지목된다. 세상의 그 어떤 부모도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같은가보다. 남자는 사고현장의 cctv를 확인 후, 딸이 범인임을 안다. 그것을 덮으려고 태국의 허름한 창고를 빌려 사고현장과 똑 같은 세트장을 꾸미고, 여자와 딸의 모습을 닮은 배우를 구하여 연기를 시킨다. 남자는 만취하여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는 구속된 딸의 재판을 지켜본다. 남자는 돈으로 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검사의 마음을 사려고 한다. 검사는 세상에는 돈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밀고 밀리는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 재판은 증거물제시를 요구하였고, 남자는 태국에서 촬영한 cctv영상을 재판장에 내민다. 판사의 판결은 살인범으로 남자를 구속한다. 남자가 약혼녀인 여가수의 문란한 남자관계를 질투하여 의뢰인을 시켜 여자를 죽였다고 결론 짖는다. 남자는 딸을 구하고 자신이 감옥에 갇힌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면회 온 딸이 묻는다. “그 cctv속 교복 입은 여자 누구야? 내가 아닌 건 내가 더 잘 알잖아.” 한다. 남자는 엄마를 잃고 자꾸만 빗나가는 딸에게 침묵한다. 이제 술 그만 먹고 인생 바르게 잘 살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딸에게 살해당한 연인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랑과 부성애가 아름다운 영화였다.
침묵은 말없음이다. 조용히 덮어주는 것이다. 겨울의 산야에 내리는 눈처럼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주고,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이다. 말없이 흐르는 것이다. 12월의 문턱에서 내가 나에게 묻는다. 눈처럼 고요히 내려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고 침묵 할 수 있는지.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며 받아줄 수 있는지 말이다. 시간에 쫓기듯 여유 없이 살다보니 몸도 마음도 각박해져서 남의 험담은 수화기만 들면 꽃을 피운다. 하나의 가지가 접붙여져서 쌍을 이루고, 배접된 말이 산만큼 불어나 나비가 퍼트리고 벌이 물어 나른다. 자신의 부족함은 돌아보지 않고 귀에 걸린 아픈 말만 도돌이표를 그린다. 겨울의 눈 내린 풍경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시 한편을 읽으며 묵언수행을 떠올린다. 이 겨울엔 세상을 바라보는 가슴이 너그러우면 좋겠다. 내가 덮지 못하고 들추어 낸 아픈 말들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부주의한 말들을 아프게 다짐하며 채근하여도, 살다보면 또 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 살아가는 나날이다. 침묵으로 쌓이는 눈처럼, 부성애처럼 타인의 허물을 가려주고 고요히 침묵하며 봄을 키울 일이다. 그렇게 첫 눈을 기다린다.
며칠째 우울하다. 내가 좋아하는 젊은 영화배우의 날벼락 같은 사망소식은 충격이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어도 되는 것인지. 우리에게 내일이란 있는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우울한 소식은 또 있었다. 가까운 친구의 느닷없는 암 발병 소식과 전이된 종양의 크기가 듣는 귀를 먹먹하게 했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처절한 늦은 단풍의 추락이 허망한 공간을 남긴다. 기쁨은 적고 슬픔만 많은 겨울의 초입이다. 대학입시를 앞둔 조카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법당에 촛불을 켠다. 친구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두 손을 모은다. 영가의 극락왕생을 빈다. 영하의 날씨는 기도를 올리는 코끝에 콧물을 고드름처럼 단다. 법문을 마친 스님은 다기에 끓인 물을 부으시며 조용하게 말씀하신다. 차는 물이며, 다기는 흙이니 한 세상 티끌도 남기기 말고 가라하신다. 마음 안에 오욕칠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또 다른 인연으로 얽히지 말라고 하신다. 스님께서 찻잔에 따라주신 차 맛이 달다고 하니, 지난봄에 덖은 찻잎이라고 하신다. 산사의 앞마당에 바람이 분다. 바람은 소용돌이로 나뭇잎과 흙먼지를 일으켜 탑돌이를 한다. 아직 눈 소식은 없고, 침묵으로 흐르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정미소 2011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벼락의 꼬리』. 제7회 리토피아 문학상 수상. 《아라문학》 편집위원. 막비시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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