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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신작특선/김형미/묵매화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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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29회 작성일 19-07-0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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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신작특선/김형미/묵매화 외 4편


묵매화 외 4편


김형미



오래된 너의 골격을 보기 위해


한겨울이 다 가도록 곁에 머물렀지


잎 진 줄기나 가지에서 너는


전체를 내게 보여주고 있었거든


꽃눈은 어디에 있고


햇가지는 어디를 향해 뻗는지


무성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


차고 고독한 계절에 닿아서야 


멀고 가까움이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들었던 거야


꽃 피고 잎 나서 농묵이 짙어지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볼 수 있는 너를


먹의 어두움 속에 넣어두고 겨우내 지켜보았지


거기, 거대한 너의 세계가 들어 있는 줄 알고는


조금은 속되게 태점을 찍어보는 거야





귀신고래 이야기



암컷이 죽으면 그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귀신고래가 신석기에서 청동기를 지나


시대를 거슬러 여기까지 찾아왔다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가 그 곁을 빙빙 돌다 같이 잡힌다는


푸른 물의 나이를 알고 있는 저 고래는


반구대 암각된 바위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안다


비록 세계의 역사는 되지 못했어도


제 울음이 닳아서 아예 없어져버리기 전


오천 년 동안 살아온 내력을 말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와 너희의 생사를 묻고 있는 것이다





구절초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아홉 번을 구비 도나
가을볕이 꼭 저 누울 자리만큼 짧아져 있을 때
얼마나 애가 탔으면 속불을 끌어올려
입이 바트도록 호롱새는 울지도 않나
봄 가고 여름 가고 구월이 되어서야
계절 끝에 매달려서 온 저 꽃은
꼭 너를 살릴 만큼의 독성을 안고
호롱호롱 호롱새처럼 큰 약이 되려 하나
먼저 피었다 간 꽃은 어느 산 아래 묻히고
오랜 기다림 끝 구절초는 기다림이 약이 되어
네 베갯잇 속에서 앓던 두통을 거두어줄 것인데
얼마나 다가가고 싶었으면
아홉 번 꺾이면서도 꽃이 되려 하나
약으로라도 꽃이 되고 싶어하나





시월



찬바람 불면서 물이 고여들기 시작한다
몇 새들이 저 날아온 하늘을 들여다보기 위해
물 깊어지는 나뭇가지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생숨을 걸어서라도 얻어야할 것이
세상에는 있는 것인가, 곰곰 되작이면서


그래 사랑할 만한 것이 딱 하나만 있어라





바닥에 피는 꽃



비 듣는 자리마다 꽃이 피고 있었다
바닥에 닿는 짧은 번뇌 꽃이 되어
꽃도 온몸으로 비 오는 소리를 내주었다
동그랗게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는
수많은 꽃잎들 세상 모든 바닥은
꽃으로 피어날 능력이 있음을
오늘 이 세상에 났으므로 오늘 알고 가야 한다고
바닥에서 핀 저 꽃은
향기도 색도 없는 저 물꽃은
가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가고
움푹 파인 자리에 마음을 되돌려놓을 줄도 안다
그 비를 다 맞고 멀리서 온 사람아
딛는 걸음마다 꽃이 되어주고
아침도 못 먹여 보낸 삶을 뭉뚱그려
찰박찰박 꽃으로 피고 있었다
제 바닥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시작메모>


  그리움은 참 무거운 것이다. 사람을 풍병風病으로 시달리게 한다.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숲속에 살게 한다. 지금은 상실하여 여기에 없는 것 같으나 결코 죽어버리지도 않는 것. 현재를 향해 닿아 있는 과거. 그러나 또한 알고 있다. 그리움이야말로 진정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창조적 움직임을. 그것이 그리움임을.
  거문고와 붓, 매화 등의 다소 예스러움에 다가들게 만드는 것은, 그  시의 영토와 융화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그리움에 보다 깊이 들어가 술대와 대모玳瑁, 생성과 소멸, 삶과 죽음, 그 모든 것들이 하나 안에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기 위한 또 한 번의 여정.
  술대가 내려질 때마다 거문고 안에서 울려 나올 공명음이, 공명음이 뭉뚱그려져 있는 하나의 댓점이 이 생을 지나가는 빗소리만큼이나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것. 그러다가는 잠잠해지고, 덧없어지고, 편안해지는 것. 이 생 너머에 있기라도 한 듯 절실했다가도 무심해지고, 자유로웠다가 무너져 내리곤 하는 것 말이다.
  그리움을 통해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느 때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의 지극함과 그 말이 품은 질곡을 알고 가고자 한다. 제 죽음 속을 들여다본 자들은, 먼 곳을 다녀와 본 자들은, 세상 모든 바닥은 꽃으로 피어날 능력이 있음을. 하여 생숨을 걸어서라도 얻어야할 것이
  세상에는 있는 것인가, 곰곰 되작여보기도 하는 것이다.





*김형미 2000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 당선.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 그림에세이 『누에』. <서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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