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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신작특선/주명숙/바람의 유언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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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신작특선/주명숙/바람의 유언 외 4편
바람의 유언 외 4편
주명숙
구순의 고모가 바람을 밀고 왔다.
차마, 시간이 고요하다
같이 늙어가는 올케들은 아직도 청상이다. 어린 것들 데리고 어찌 사느냐 연신 쓰다듬는 손이 목젖에 울컥 올라붙는다. 쌀말이나 들려 보내고 싶은 조바심은 이미 곳간으로 종종 걸음 중이지만 덜컹덜컹 기억은 정류장마다 쉬느라 언제쯤 되돌아 올 수 있으려나 천금 같은 내 동기간들 다 가고 쭉정이 같은 나만 이래 남았구나, 움푹 패인 동공이 깊고 어눌한 어록이 누룩 향기로 번져간다
날 때부터 백년이 넘었다는 당산나무 밑동에 구순의 바람이 인력거처럼 기대어 섰다
어깨의 간격
밤새 베게 귀퉁이가 후줄근해진 것이
고질병이 도진 모양이다
뻑뻑한 모과속이 되어버린 어깨 근육
쉽사리 그 꼬임을 풀지 않을 성 싶다
한창 갈고 닦아온 온 칼날이 무디게 생겼다
봄 내 주말이면 필드로 달리고
여름 내 스크린 연습장에서 휘둘러대더니
나만 알게 쌤통이다
영문도 모른 채 구석으로 호출당한 운동가방은
제풀에 시무룩해지고
추나 요법 치료를 받고 온 저녁
통증 때문인지 유난히 뒤척거리는 기척에도
덜컹거리는 잠이 혼자만 달았나보다
찬 기운이 점점 여물어가는 가을밤
파고드는 마누라에게 툭 한 방 먹인다
팔 베게는 독약이래,
쓰윽 팔을 빼내는 남편의 어깨가 좁아졌다
머쓱해진 여백만 저 혼자 넓어졌다
씨방의 어법
여백은 나머지가 아니라 의도적 공간이다
일종의 간격이라고 해도 좋겠다
간혹 주체가 모호할 때도 있는데 예를 들면,
그림자놀이에 빠졌을 때
검은 그림자가 여백이라고 가상되어지는 경우다
의도, 하지 않고 살다 보니 가끔은 하당이었지만
사는 재미에 늘 식욕이 왕성했었나보다
식탐의 추가 허술해졌는데도
헛배만 부른 지금
원근법에 홀려 말의 거리가 자꾸만 흩어진다
오해와 이해 사이의 간극에서
음소문자로 채득한 언어 저 너머로
상형문자로 다시 태어나는 또 다른 언어,
표정도 말이 된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온다
여백 없이
내 몸을 거쳐 나간 어법이
똥값만도 못하다는 사실이 새삼 힘에 부친다
봄이 닳아져 가도
열매가 꽃보다 빠를 수는 없는 일이지
기다려봐!
꽃자리에 여무는 본질은 결국 씨방이잖아
그 놈의 어법 한 번 참, 붉다
춘정
섬진강에 이미 벚꽃이 만개했다는.
막 매화가 피어나는데 그럴 리가 했지만
바다와 강의 경계에 꽃샘 연막을 쳤나보다
섬진강의 봄나물이라는 벚굴
만개한 벚꽃 같아서 벚굴이라는데
물속의 향연으로 섬진강변이 자욱하다
망덕포구에 모여 앉아
생굴 한 망태 풀어 봄볕에 굽는다
뽀얀 식감이 뒤끝 달달한 여인 같기만 해
반주로 마신 매실주만 은근짜 달아오르고
봄 비 온다는 소식에 애가 탔다는.
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삼합으로 피어나더니
사방 천지 난리 중에 꽃 난리가 났다
밤 벚꽃을 보러 가자고 꽃잎을 전송했더니
버선발로 뛰어나온 춘정들이
꽃가지들 사이에서 화르르 피어올랐다
난데없는 야밤의 난장에
여인꽃들의 수다로 꽃그늘은 유난히 붉고
봄 밤,
고목나무 둥치들은 불끈 저 혼자 굵어지고
나는, 죄 없다!
짝
하나만 덜렁 남겨진 순간, 기울어진다
산길을 오르다가 한 숨 돌리는 바위 근처에
주인을 놓쳐버린 장갑 한 짝이 손목 채 주저앉아 있다
쯧쯧, 눈 맞춤 한 번 건성으로 하고 일어서는데
웬일인지 그 한 짝이 내내 마음에 어른거렸다
나뭇가지라도 걸어 주고 올 걸 그랬나
주인 손에 꼭 맞는 감각만으로도 의기양양했을 터
덜렁 한 짝으로 남겨졌으니 제 딴에는 산이 기울었겠다
‘혼자’와 ‘ 한 짝’이 동음이어 같은 화음을 낸다 해도
‘혼자’는 애초에 편을 가른 적이 없어 혼자 남을 일도 없다
‘한 짝’은 애초에 한 편을 묶어야 해서 혼자 일 수가 없다
하나만 덜렁 남아버린 짝짝이들
양말 한 짝, 신발 한 짝, 장갑 한 짝을 어디에다 쓸까
세상에 놓쳐버린 한 짝들이 만든 많은 허공들을 생각하는데
짝이란
둘이 짝 소리 나게 한편 먹는 거
‘혼자’도 아닌 ‘한 짝’도 아닌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것이다
*주명숙 2005년 《문학춘추》로 등단. 2013 《창조문학》 당선. 시집 『붉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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