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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근작읽기/박철웅/화려한 외출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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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근작읽기/박철웅/화려한 외출 외 4편
화려한 외출 외 4편
박철웅
어젯밤 꿈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간도 쓸개도 없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초승달처럼 웃고 있었다
탁주 한 사발에 호탕하고 선량했던 그였는데
허허허 웃음 속엔 평화가 깃들었던 그였는데
우울을 못내 사랑하여 우울 씨가 된 그였는데
정신병동에서 설핏 스치고 지나갔던 것 같았는데
이제, 우울을 잊고 치매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앳된 웃음 머금고 꽃 진 청년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멀쩡한 간과 쓸개를 가진 자들만
타오르는 불빛 속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간도 쓸개도 활활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돈
퇴근하고 가다가 술집에서 그를 보았다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끓다가 늘어지다가 오므라진 그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술집 건너가게 진열장에서 그를 보았다
몸은 발가벗겨졌고 쭈뼛쭈뼛하던 털까지 깎아
진열장에 놓여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느냐고
이렇게 발가벗길 수가 있느냐고
며칠 후 친구 사무실에서 그를 보았다
몸통은 사라지고 얼굴만 내밀고 웃고 있는
황망한 모습을 보았다
큰 절을 하였다
무수히 쏟아지는 혀들이 머니? 머니! 하였다
만 원짜리 지폐를 다발로 문 암퇘지 하나
서걱서걱 웃고 있었다
거울은 굴비를 비굴이라 읽는다
너를 볼 때마다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이자겸이 생각이 난다. 해마다 굴비를 보내면서도 이것은 결코 아부가 아니다,는 선비가 생각이 난다. 굴비를 바라보며 나는 정말 굴하지 않고 있는가, 굴비처럼 가슴에 소금을 뿌리며 햇살과 바닷바람에 잘 말라 가고 있는가, 생각한다. 굴비는 결코 비굴이 아니다. 그저 고품격 조기일 뿐이다. 몸에 기를 살려주는, 그대도 나도 기 좀 살아보자는 마음의 선물일 뿐이다. 내 비록 하루 세끼도 간당간당하지만 굴비를 보낼 때마다 동아줄 하나 잡은 것처럼 안심이다. 이건 그저, 그대 입맛에 쏙 들기를 바라는 진심일 뿐이다. (한 번 맛을 보면 쑤욱 빠져들어갈 것이다.) 거울을 본다. 굴비가 눈을 끔벅끔벅거리면서 웃고 있다. 거울에 비치는 굴비, 눈 없는 거울이 굴비 꾸러미를 읽기 시작한다. 비굴비굴비굴비굴…, (읽히는 굴비가 민망스럽다.) 나는 그럴 때마다 다시 거꾸로 읽는다. 무항산무항심, 입안의 혀를 돌돌 말아가며 나 스스로를 변호한다. 굴비여, 가슴에 소금을 뿌리며 너는 오늘도 햇살에, 해풍에 잘 말라 가고 있는가.
안녕, 아줌마
화장실 변기가 하얗게 빛이 나고 있는데, 철없는 아이는 허옇게 안부를 묻고 있는데, 변기 위에는 두루마리 휴지가 펄럭이고 있는데, 아줌마는 하얗게 웃고 있는데, 평화의 비둘기는 구구 바닥을 쪼아 먹고 있는데, 서울역 지하도에는 낭만시인들이 구구 바닥을 핥아 먹고 있는데, 아이는 창문을 열고 창문을 닫고 있는데, 오줌은 숨이 막히도록 쏟아지고 있는데, 아줌마는 여전히 빛이 나도록 하얗게 웃고 있는데, 여봐 아줌마, 반말은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는데, 지하철은 저녁놀 같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려가고 있는데, 청춘은 콩나물시루처럼 실려가고 있는데, 네온사인은 오늘밤도 춤을 추고 있는데, 아이는 자꾸만 창문을 열고 창문을 닫고 있는데, 의자는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모래시계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아줌마도 한때는 눈부시게 춤을 추었지. 강가의 능수버들이 춤 출 때마다 내일은 꽃이 피어난다고 팝콘 튀듯 웃곤 했지.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 찬바람만 슝슝 들어차는데, 아줌마는 안부를 묻고 있는데, 오늘도 하루는 잘 흘러가고 있느냐고, 변기가 하얗게 빛이 나도록 안부를 묻고 있는데,
우울 씨, 사랑해요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서 당신의 부음 소식을 접했습니다. 구정 설날, 아파트 베란다에서 젖은 빨래처럼 널려 있다가 휴지처럼 휘날렸다는 당신의 이야기. 어제도 그제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점점 당신의 이야기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는데, 언제부터 우리는 휴지처럼 사라지는지, 가슴이 허허로운 자는 밀려나야 하는지, 그냥 못남 때문이라고 그 못난 우리들의 모습이 머지않아 우리의 아이라는 예감 때문에 석양은 저녁마다 울먹이다가 하늘을 적셔 놓는데, 몇 해 전 몸을 던진 후배의 국화꽃 영정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사내들, 사실 우울 씨는 그 사내들 앞에서 더 주눅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는데, 국화꽃이 시들어 갈수록 술판과 담소는 깊어가고 있는데, 오늘은 부음 따라 날도 우울하고 거리엔 아이들이 떨고 있는데, 별이 지는 어느 마을에서는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데, 거리에는 3포 5포 7포 세대들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는데, 바람소리만 들어도 허걱, 숨이 막히는데, 낙화하는 n포 꽃잎들을 바라보면서 당신도 몸살기가 도나 보군요. 벼락이 치고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어올 것 같은데, 비 온 다음에 무지개가 뜰 거라는 우울 씨는 오늘 밤, 영혼이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을지요.
*박철웅 2012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거울은 굴비를 비굴이라 읽는다』. 막비시 동인, 강남시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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