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7호/신작특선/김수자/그리움의 생태에 관한 보고서 외 4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30회 작성일 19-07-03 14:01

본문

17호/신작특선/김수자/그리움의 생태에 관한 보고서 외 4편


그리움의 생태에 관한 보고서 외 4편
-선운사 명부전 앞에서


김수자



흰빛을 지나 푸른빛을 건너 노란 봄빛을 붙들고
동백꽃보다 더 붉은 조등으로 내게 오신 그대


나와 그대가 한 권의 책이었으면
나는 그대와 한 권의 책 속에서 살 것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뛰어넘는 상상과
오래된 은유로 매일같이 그대를 읽습니다
어느 날 그대는 마지막 페이지와 동시에
첫 문장으로 다시 시작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주 끝난 것만 같이 무섭고 불안합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뜨거운 국물이 있는 국수를 끓이는
페이지에서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그대가 없는 페이지는 잠시 기억의 빈 칸에 넣어두고 있습니다
색종이로 접은 노란 나비와 말린 풀꽃이며
옛날 찻집 탁자에서 티슈에 그린 솔숲 그림이며
바닷가에서 진담처럼 들려준 청둥오리 잡는 법이며
메모지에 쓴 매화꽃 편지며,
기억 속의 그대가 여백으로 남아 있어
그대 옆에 동백나무가 있는
선운사 봄날 오후를 놓아두었습니다
나는 다음 페이지의 그대를 기다리며
쉼터에 기대앉은 그대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에필로그를 생각합니다
그대가 있고 동백꽃 그늘이 있고 나와 그대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책을 더는 읽을 수 없는 뒷장을 덮기 전


때마침 동백꽃 한송이 툭, 떨어집니다





슬픔을 표절하다



등 뒤에 앉아 네 고통을 읽는다


기차여행을 가기로 했었지
참 오랜만에 둘이서,
그런데 그날 너는 누가 아파서 기차 타고
올라간다고 했었지
어쩌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비밀 같은 그날의 너의 슬픔을 읽게 되었어


출판기념회 자리였지
하필이면 첫 시낭송이 상가의 신발들이었어
나는 괜히 가슴이 철렁했지
행사장의 풍경을 찍다 말고 너는
창가에 놓인 우편물을 이 귀퉁이 저 귀퉁이 만져보다
사계절 내내 피고 또 지는 가랑코에꽃을
들여다보고 있었지
때마침 내리는 봄비 같은 겨울비를
너무 아파서 내지 못한 소리를 꺼이꺼이 바라보는
물끄러미 구석에 서 있는 너를 보았어


세상사는 일을 어떻게 그 때 그 때 다 말할 수 있겠어
벚나무가 서 있는 묘지를 떠올릴 때마다
먼 길 간 숨결을 다시 데려와 가슴에 앉힐 수는 없어
얼굴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 척 안아줄 것인지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
먼발치에서 마음으로만 기웃거린다
말없이 사라졌을 때와
간다는 눈인사를 할 때와 어느 때가 더 슬픈지.





프리 허그에 관한 몇 가지 단상



  1.
  프리허그의 문패를 단 목요일의 숲이 있죠
  그 숲엔 프리허그의 시가 있죠
  어느 땐 한 권의 시집이 되기도 하죠  한 장 한 장 펼쳐 그들만의 세상에 들어서면 거기엔 사랑 기쁨 슬픔 고통 온 우주가 들어 있어 설익거나 농익은 언어들 제자리에 딱 맞는 언어들 낯설어 경천동지할 언어들을 수배하기도 하며 상처 난 언어들을 만지고 쓰다듬어 주고 한 건한 언어들에겐 물개박수도 쳐주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차게 뒤돌아 선 말, 마스크를 쓴 채 웅웅거리던 말들도 보듬어 안아주는 꽃과 나무와 바람과 햇살의 숲이죠 어느새 시간이 지나 한 권의 시집을 다 읽고 가만히 뒷장을 덮을 때쯤 하루의 노동의 힘겨움과 어둠까지도 환한 기쁨이 되어 집으로 향하죠 서로가 서로를 안아주는 목요일의 프리허그죠
 
  2.
  일상의 대화나 손님께 주문을 받거나 인사를 할 때도 국물을 끓이거나 국수를 삶을 때도 프리허그의 개념이 밑에 깔려 펄펄 끓어 오르곤 하죠 끓던 물도 국수가 들어오면 가슴에 받아 안는 듯 조용해지며 뻣뻣했던 가락들이 순하게 휘어지면서 고스란히 안겨들죠 해지니네 국수처럼 우리는 우주의 가슴에 안겨 살고 있다는 발칙한 상상을 하죠
 
  3.
  자위라는 말도 말 그대로 자기를 위로하는 행위라는 말이죠 혹 그 자위행위를 리비도의 불온이라거나 외설로 보지 마세요 그건 내가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었죠 몇 초간의 그 팽팽한 고요를 꽉 껴안고 숨소리마저 정지한, 최고의 오르가즘이란 그때 그 순간인 것 같아요 정지한 그 상태로 계속 안겨 있고만 싶은……
포옹이 없다면 오르가즘도 없어요 그래서 안는다는 말, 참 좋은 말이죠
 
  4
  남의 아픔은 왜 그리도 빠르게 내게로 전이되는지 지난 사월에 다녀 온 팽목항의 슬픔을 고스란히 안은 가슴을 어떻게 해줄 수 없어, 그냥 울어주기만 할 뿐이죠
  아내도 없이 어린 딸을 키우며 혼자 사는 가난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면 문득 아내가 되어주고 싶다는 오지랖 넓은 걱정도 하죠
  이제는 내안에 들어 있는 타인같은 나를 하나 둘 불러내어 안아주고 싶어요 세상에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나의 스무 살의 어느 날과 서른 살의 막막함과 치를 떨며 꼭꼭 봉인해버린 기억 속의 나를 불러내어 가만히 천천히 오래오래 안아주고 싶어요
 
  ‘무거운 건 들거나 끌고 가려 하지 말고 가슴에 안고 가라'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라요





고요의 뒤편



1. 고요, 소요
고요의 뒤편이라고 썼는데 소요의 뒤편이라고 써졌다
고요는 불안했다 아니 소요는 집요했다
기역자 바로 곁에 시옷이, 손가락이 아주 조금 흔들렸을 뿐인데
양떼구름 흘러가다 순식간에 새털구름이었다
저것은 양떼구름일까 새털구름일까
그 아닌 그가 말했을 때 나 아닌 나는 먹구름일 거라고 말했다
그 아닌 그와 나 아닌 나 사이에는
붉은 벽돌의 말 회색벽돌의 말 콘크리트 벽 같은 말들이
절벽의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나 아닌 나는 거기에 간 적이 없다고 했고
그 아닌 그는 남이 나를 보았다고 했다
남 아닌 남은 나 아닌 나가 거기에 간 적이 있다는 말을
바람에게 들었다고 했다고 했다
내 열 여섯 살 기억의 언덕에 피었던 꽃은
쑥부쟁이였을까 구절초였을까 나무쑥갓이었을까
나는 거기에 간 적이 있을까 없을까
구름과 꽃과 기억과 바람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소요 뒤편 고요로 만나볼까
고요의 뒤편 소요로 만나볼까


2. 사냥꾼과 원숭이와 각설탕
“아프리카에선 원숭이를 어떻게 잡는지 알아? 사냥꾼들이 각설탕을 던져놓으면 원숭이들이 거기에 중독된대. 그럼 좁고 긴 구멍을 파서 각설탕을 넣어두지.
  냄새를 맡고 온 원숭이가 앞발을 집어넣을 거 아냐? 근데 구멍이 너무 작으니까 설탕을 움켜쥐면 그걸 놓지 않는 이상 손을 뺄 수 없게 되지. 사냥꾼이 다가오면 원숭이도 눈치 챌 거야. 그런데도 이 멍청한 원숭이들은 사냥꾼이 그물을 던질 때까지 설탕을 놓지 못한대.” *
 
  *영화 『오마르』 중에서 암자드가 친구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





겨울나무 소견서
-말이 한그루 나무라면 우리가 공통으로 알고 있는  나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어요



나뭇가지에 앉아 그녀는 새처럼 노래를 불렀죠
그녀의 혀는 달콤한 노래를 가득 담고 있는 레코드판 같았어요
그녀의 입술을 빠져나온 노래는 천개의 바늘이 되어
빙글빙글 돌며 나무의 혈관을 타고 흘렀죠
나뭇가지를 흔들고 우듬지를 핥으며
그늘을 거느리고 자꾸자꾸 퍼져나갔죠
극단의 바늘 끝 같은 혀를 통과한 노래가
숲을 들썩일 때마다
나무는 자주 어지럼증에 시달렸죠
도처에 검은 그림자처럼 이끼 낀 소문들이 번져가고
곳곳에 잠복한 노래는 시도 때도 없이 재생되곤 했죠
달콤한 노래에 젖은 잎사귀들이 하나 둘 돋아날 때마다
나무는 구토에 시달렸으며
치사량을 넘는 소음이 소멸되었다 다시 생성하는 동안
나무둥치에는 툭툭 채송화꽃 같은 붉은 반점이 솟곤 하였죠
‘달콤한 독이 묻은 노래를 과잉섭취 하셨군요,
풀만 드세요‘
 
곧 압축된 겨울이 풀리면 침묵을 노래하라는 소견이 첨부 되었다





<시작메모>


밥통論



  내가 살던 읍내에서 십리쯤 가면 봉화산이라는 제법 높은 산이 있었지요. 맞은 편 산꼭대기에는 촘촘한 레이다망이 줄을 지어서 무언가를 잡아내려는 듯 쉬지 않고 돌아가고는 했었죠.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그곳에서, 오리 쯤 떨어진 외딴집에 늙은 부모와 어린 계집아이가 살고 있었죠. 계집아이는 온통 궁금한 것이 많았조. 어쩌다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작은오빠가 내려오면, 왜 미국이 한국에 와 있느냐고 묻기도 했죠. 한 번은 외할머니 산소 옆에 외사촌오빠를 묻고 돌아오던 날, 왜 내 무덤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오빠는 대답 대신 “아이구! 이 밥통아” 하면서 꿀밤을 먹이곤 했죠.


  계집아이가 궁금했던 세상은 그 후로 제 안에서 갇혀버렸죠. 궁금한 것은 갈수록 많아졌지만, 누구에게 물어보기보다는 밥통인 채로 지나가거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저절로 알아지거나 하였죠.


  오늘 아침, 문득 그때가 생각났지요. 누구도 명쾌하게 길을 일러주지 않았던, 알 수 없었기에 가끔은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던, 수많은 길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 그때 궁금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알아지거나 어쩌면 모르는 채로 지나가기도 하겠지만, 아직도 꼭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죠.



  나, 아직도 밥통인지요.





*김수자 2006년 《문학시대》로 등단. 시집 『불쑥』. 갈무리문학동인.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