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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신작시/천세진/같은 사진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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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신작시/천세진/같은 사진들 외 1편
같은 사진들 외 1편
-사막 이야기
천세진
같은 것들이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졌는데
도시의 성주조차 미스터리를 풀지 못했다
새 성주가 뽑혀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최고의 사진가도 필요 이상으로 찍어댔다
찍힌 모습들은 모두 같았다
늘 하나만을 남기고 폐기되었다
여분의 것은 처음부터 폐기를 의미했다
아홉 개 도시를 모두 순례한 위대한 여행자가
마침내 도시로 돌아왔다
거리 가득 환영 인파가 몰렸고
성대한 환영식과 기자회견이 열렸다
위대한 여행자가 입을 열었다
“아홉 개 도시에서 만난 것은,
우리와 똑같은 눈물과 웃음의 양식,
그리고 기호들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여행은 없습니다.”
도시는 엄청난 당혹감에 휩싸였다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나섰고
다른 도시는 아홉 장의 사진에 불과하다는
위대한 여행자의 시선에 오류가 있었다는 이론이
급속도로 설득력을 얻었다
위대한 여행자가 가져 온 사진 속
내전과 가뭄으로 잡초마저 사라진 땅을 가로질러가는
기나긴 피난행렬과 픽픽 쓰러져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립 밴 윙클*·1
시계를 가졌던 것뿐이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믿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누구나 믿지 않는가.
그래, 좀 놀았다. 주야장천, 주지육림, 흥청망청, 사생결단, 주객전도의 지경은 결코 아니었다. 주마간산으로 눈요기를 한 정도였다.
그 사이 오래 전에 빗장을 질러 둔 문들이 썩어 무너져 내리고, 너무도 많은 낮과 밤이 앞 다투어 달려갔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죽어서도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모두 온힘을 다해 유산을 만든다. 그래, 인정한다. 온 힘을 다해 쌓고 다듬어온 생은 아니었다. 한 잔 거나하게 들이키고 환락의 빛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딱 그 정도의 일탈이었다. 게을렀으나 길을 잘못 들지는 않았다.
80번의 계절이 지나간 길을 헤매며 돌아왔음에도 나는 받아들여졌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산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나보다도 앞서간 유산을 만나게 되었다. 살아서 죽음의 결과를 보는 어느 누구도 누리지 못한 행운을.
그것이 어떻게 축복이 되겠는가. “시계가 하나뿐인 사람은 시간을 알지만 두 개인 사람은 모른다.”**고하지 않던가. 나는 내 시계를 잃고, 엉뚱한 시계를 얻었다.
* 워싱턴 어빙이 1819년 발표한 단편소설집 <스케치북>에 들어 있는 단편『립 밴 윙클Rip Van Winkle』의 주인공. 지독히 게을렀던 립 밴 윙클은 미국 독립전쟁(1775년) 발발 전인 영국왕 조지3세 시절 산으로 올라가 구주희(요즘의 볼링) 놀이를 하는 낯선 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후 깨어난다. 마을로 돌아온 그는 2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을 알게 된다.
** 서양의 측정학계에 떠돈다는 농담. 로버트 P. 크리스, 『측정의 역사』, 노승영 역, 에이도스, 2012, P.296.
*천세진 2005년 《애지》로 등단. 『순간의 젤리』, 문화비평가,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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