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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아라포럼/임보/좋은 시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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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아라포럼/임보/좋은 시의 조건
좋은 시의 조건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임보
제가 준비한 얘기는 새로운 사조를 소개 하려는 건 아니고,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이나 상식적인 얘기들을 정리해가지고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해서, 좋은 시의 조건이라고 했습니다만 객관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의 조건은 이랬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것을 나름대로 생각해서 6가지를 제시했어요.
우리 현대시의 출발을 1908년 「해에게서 소년에게」부터 잡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계산을 한다고 하면 100년을 넘어섰어요. 한 세기를 넘어선 겁니다. 우리 현대시도 이제 이론적으로 어떻게 정의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동안 현대시 얘기를 하면서 많은 비평가나 학자들이 주로 서구 시를 끌어다가 설명을 하려고 많이 시도를 했지요. 물론 그런것들을 우리가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우리 시는 다른 어느 나라의 시와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시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에 우리 시다운 시는 어떻게 찾는 것이 좋을까. 다른 외국의 시, 예를 들어 중국시나 일본시나 서구의 시들처럼 한국의 현대시, 하면 우리말의 독특한 하나의 시가 있어야 할 텐데 그걸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가. 각국의 수많은 민족들이 나라마다 의상들을 지니고 있잖아요. 일본은 일본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또 서양은 서양대로 의상이 각각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한복이라는 고유의 의상을 지니고 있죠. 그런데 요새 와서는 우리의 한복이 제대로 애용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상은 한복이다, 이렇게 내세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시는 이렇다, 라고 하는 것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문학의 이론이나 우리 시문학의 이론, 우리 시다운 어떤 본보기가 되는 것들을 생각해보자 정리를 해보는 거에요. 서두에 요즘시들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까, 하고 시작을 했어요. 여러분들은 열심히 읽고 계시겠죠. 얼마나 많은 시인들 혹은 일반인들이 열심히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은 글쎄 좀 의문이 가긴 합니다.
옛날에는 대형서점에 가면 시집들만 전문으로 파는 시집코너가 있고, 수많은 독자들이 그 주위에서 시를 읽느라 둘러쌓여있고는 했는데 요즘은 시집 전문 코너도 없어졌어요. 왜 없어졌느냐 하면 시가 안 팔리기 때문이란 말이지요. 장사하는 사람들이 시가 잘 팔리면 얼마든지 만들지 말라고 해도 코너를 넓게 잡을 텐데 시집이 안팔리니까 그런 겁니다.
왜 시집이 안 팔리냐, 그것은 시가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시가 재미가 없기 때문에 시를 찾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도 한평생 시를 공부해 왔고 시를 써온 사람이지만 요새 시들을 잘 안 읽어요. 앞부분 좀 읽어봐서 괜찮다 싶으면 읽고, 이건 좀 답답하고 짜증난다 이러면 중간에 그만 둬 버리지요. 다른 분들도 비슷할 거에요.
재미있는 시는 읽지 말라고 해도 밤을 새워가며 읽겠지요. 우리도 시를 재미있게 써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왜냐하면 요새 한국의 현대시가 이렇게 난삽한 형태에서 왜 바뀌지 않는가 하는 것도 한 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우리시가 이렇게 된 것은 첫 번째로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소위 정형적인 틀이 깨지면서 무질서해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처음 시의 출발은 정형시 아니었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향가로부터 정형시가 출발하지요. 정형시는 일정한 틀이 있어요. 중국의 대표적인 한시에 절구가 있는데 절구도 일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요. 5언절구니 7언절구니 이렇게 정해진 게 있었어요. 서양의 전통적인 정형시도 14행시다 3344라 해서 14행으로 정형된 틀을 지니고 있었어요. 우리의 정형시 시조도 틀이 있지 않았어요? 평시조가 3장 6구 12조, 초장, 중장, 종장, 거기에 맞도록 써야만 시가 됐단 말이죠.
시가 과거 정형시일 때는 시와 시 아닌 글의 한계가 아주 분명했어요. 정해진 틀에 맞게 쓰면 그건 시가 되고, 틀에 맞지 않게 쓰면 시가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유시가 등장했어요. 자유사상이 시에도 영향을 준 것이죠. 정해진 틀 속에 갇히기 싫어서 틀로부터 벗어난 자유시가 등장한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자유시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어요. 무엇을 써도 상관없고, 행을 나누어 써도 상관없고, 연을 나누어 써도 상관없고, 산문처럼 붙여 써도 상관없고, 길게 써도, 짧게 써도, 맘대로 써도, 시와 시 아닌 글의 한계가 상당히 모호해졌어요. 시인이 글을 써놓고 이걸 시라고 인정해야만 되는, 그런 판국에 이르렀다고 할까요? 시인이 시라고 인정해야 하는 그런지경에 이르다 보니까 시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는 것처럼 인식이 된 거죠. 자기 맘대로 써놓고 시라고 주장해도 그걸 인정해야 하니까 제일 쓰기 쉬운 글이 시인 것처럼 잘못 이해가 되고 있다는 것이죠. 재미없는 시는 읽지 않으면서 쓰기 쉬우니까 시를 쓰겠다, 시인 되겠다 하는 분들은 많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정말 시가 쓰기 쉬운 글인가 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해볼 일이 아닌가 하는 거에요. 또 현대시가 이렇게 난삽해진 중요한 이유가 뭐냐하면 프로이트가 등장하면서 심층심리 잠재의식 무의식 이런 것이 들추어지면서 소위 초현실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생겨난 겁니다. 시가 복잡해 지는 거죠. 프로이트의 생각은 우리가 의식하는 그 주위에 우리 조상으로부터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 전체가 떠받치고 있어서 그놈들이 모르는 가운데 의식의 세계를 자극해서 행동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세계가 잘못되면 정신이상현상이 일어나 나버린다. 잠재의식의 세계가 중요하다고 들춰내면서 문학에서도 그 숨겨져 있는 것을 대상으로해서 글을 써보자 하게 된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의 숨겨져 있는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는 우리가 접근하기가 곤란하고 힘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잠재의식의 활동이 꿈이니까 꿈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쓰려고 하고, 몽롱한 상태 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끌어내 나열해서 작품을 만들려고도 해보고, 심지어 이상한 약물을 복용하면서 몽롱한 상태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끌어다가 작품을 써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유명한 앙드레브르통이라는 사람은 초현실주의 선언을 하면서 자동기술법이라고 하는 것으로 작품을 쓰겠다고 주장을 하죠.
자동기술법이 뭐냐하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쓰는 거에요.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잡다한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놓고 그걸 갖다가 시라고 하고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는 거지요. 그걸 시라고 주장하는데 그 글은 아무런 논리도 없어요. 도덕적인 제약이라든지는 무시가 돼요. 문법에 맞지도 않는 걸 막 쏟아내는 거에요. 이것은 시 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지요. 머릿속에 떠오르는대로 써버리자 하는 초현실주의적인 요소가 현대시를 난해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어요.
그런가 하면 근래 러시아의 소위 형식주의 문학에서 시클롭스키라는 사람이 시의 특징을 얘기하면서 낯설게 하기라는 이론을 내세웠어요. 낯설게 하기는 시의 운율을 얘기하면서 시 속에 담겨져 있는 리듬 운율을 일상에 담겨져 있는 리듬과는 다른 낯선 것이다 좀 틀린 것이다 하는 것이지요. 우리 시도 3·3조나 4·4조에 담긴 리듬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일상생활 속 어투에 담긴 리듬하고는 좀 다르죠. 리듬을 설명하려고 하면서 쓰이기 시작한 말인데 이게 확대되어가지고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특징을 지적하는 말로 쓰이는 겁니다. 물론 시는 은유라든지 역설이라든지 과장이라든지 등등 다양한 표현 기법을 사용한단 말이죠.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적인 표현과는 다른 색다른 낯선 것이다, 아마 요렇게 이해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설득력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낯설게하기 이론이 죠. 다른 예술에까지 퍼져서 마치 현대예술의 특성을 지적하는 중요한 말인 것처럼 인기가 있어가지고 많은 분들이 심취하고 있는데 사실 애초의 시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이런 것이 시다운 글이다 생각해가지고 현실을 우그러뜨리고 이상하게 표현하는 시도들이 일어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우리나라에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데리다의 해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해체주의가 등장했지요. 뭔가 잘못된 것을 전도시켜서 바른상태로 뒤집어놔야 한다 하는 것인데, 이게 말하자면 해체이론이에요. 우리가 해왔던 전통적인 거 관습적인 거 그 동안의 문화 이분법적인 구조로 어느 한쪽이 좋고 어느 한쪽이 나쁘다 하고 규정을 해놨는데 요게 잘못됐단 말이죠. 그래서 뒤집어 놔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이분법적인 규정은 무엇과 같냐 하면 오른손과 왼손의 관계와 같다고 주장하죠. 우리가 오른손에 힘이 있는 것은 오른손에 많이 기회를 많이 줘서 힘이 있는 것이고 왼손잡이는 왼손에 많은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힘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런 것이 그동안 한쪽에만 기회를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잘못 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을 뒤집어놔야한다 이거에요. 그동안 오른손에만 힘을 준 사람은 왼손에도 기회를 줘야한다 이거에요. 우리사회의 구조가 이런 것이 잘못되었다 하는 걸 뒤집어서 기회를 못가진 것들에게 기회를 주고, 인정을 못받은 것들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해체시켜야 한다. 이렇게 주장한 것이 해체이론이죠. 그러니까 전통적인 것은 뭔가 잘못됐다, 전통적인것을 뒤엎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풍조가 바뀌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전통적인 것이 잘못 규정된 것은 아니거든요. 물론 전통 가운데서도 잘못된 것은 있어요. 수천년 동안 인류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래도 이것이 낫다고 생각되는 쪽이 전통으로 굳어진 것이니까 그래도 전통 가운데는 좋은 것이 더 많지요. 무조건 기존의 것이 좋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다음 현대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나는 김춘수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소위 무의미시라고 하는 그런 게 등장하면서 우리 한국시가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요. 김춘수 시인이 주장하는 무의미시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미술에서의 비구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미술을 크게 양분하면 구상화 비구상화로 나눌 수 있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본떠서 재현시키려고 하는 것을 구상화라고 하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그리려고 하는 것 그게 비구상화라고 하죠.
우리가 사과를 놓고 사과를 그대로 옮겨 그린다든지 새를 놓고 새를 그리는 것은 이세상 것을 그대로 옮겨놓은 그것이 구상화지요. 그런데 화가가 그리고 싶은 선을 그리고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물과도 닮지 않은 것을 캔버스에 만들어 놨어요. 비구상 화가들은 어떤 주장을 하냐하면 구상화는 사물에 대한 모방인데 신이 만들어 놓은 사물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데 자기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는 창조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거에요.
캔버스에 그려진 비구상화는 과거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기만이 유일하게 만들어낸 세계고 거기에만 존재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자기들이야말로 순수한 창조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죠. 구상화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새, 사과, 과일, 사람, 얼굴, 구체적 형상화된 사물을 캔버스에 그리죠. 비구상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자기가 그리고 싶은 색, 그리고 싶은 선,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느낌이야 있겠죠. 따뜻하게 느껴진다는지, 차갑게 느껴진다는지, 그런 건 있겠지만 무엇을 그렸느냐가 아닌 바로 그것 자체를 그린 것이라고 김춘수 시인도 그런 것 같아요.
지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적인 의미를 완전히 제거한 그런 창조물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그런데 미술은 선이나 색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세계를 비구상화로 만들어내지만, 시라고 하는 것의 밑천은 언어란 말이죠. 근본적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언어를 이렇게 구성해서 만들다보니 완전히 의미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김춘수 시인은 뭘 시도했냐면 그 분도 소위 초현실주의가 지향하는 자동기술법에 의해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쭉 쓰는 겁니다. 쓰다가 현실적인 정황이 나타나려고 하면 의도적으로 그것을 파괴해서 비현실적인 정황으로 만들어 가는 거에요.
예를 들면 현실적인 정황에서는 물고기하고 물하고는 아주 친밀해요. 물 속에 노는 물고기를 얘기한다고 하면 현실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만일 물고기가 나무 위를 날아간다든지 한다고 하면 그것은 현실의 정황이 아니에요. 현실적인 정황을 깨뜨려서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만들어요. 김춘수 시 같은 경우는 바다를 죽이기도 하고 죽은 바다를 사내가 한 손에 들고 걸어간다고 하고 그래요.
무의미 시 작품을 보면 거기 구사가 된 것은 지상적인 정황이 아닌 지상적인 것을 깨뜨려서 비지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거에요. 그것은 뭘 만드는 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황을 만들겠다는 것이죠. 그것이야말로 나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순수한 것이라고 주장 하는 거지요. 그래서 김춘수 시는 말장난 말놀이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 무슨 사상이나 주제 이런 거를 다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김춘수 시인이 만들어낸 작품은 논리적인 구조가 전혀 없고 도덕적인 것도 전혀 없게 되는 거에요. 시를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우리 시단의 대가인 김춘수 시인의 시가 이러니까 시는 이렇게 써야 하는거구나 해서 김춘수를 닮아가는 시들을 많이 시도해요. 그러면서 현대시가 상당히 혼란스럽게 된 거에요.
김춘수가 시도한 시는 충분히 의미가 있어요. 그 분이 만든 무의미시 그것은 한국 시단을 범위를 넓히는 그런 큰 공헌을 한 것이에요. 그런 문학사적인 의미는 있지만, 그 분이 추구하는 그런 시를 한국시의 정법으로 삼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시가 그걸 본보기로 해서 나아가는 것은 김춘수 시인 한 사람이 시도한 것으로 족해요. 그 이상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 하는 것이 내 생각이거든요.
방금 잡다하게 여러 가지 정황들을 이야기 했습니다만 문예 사조라든지 시단의 여러 가지 사정들 때문에 오늘의 시가 상당히 혼란스럽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시도 물론 변해야 해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사실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죠. 시도 변해야 하지요. 옛날의 향가와 오늘날의 시는 많은 차이가 있잖아요. 변화해야 발전하는것이죠. 그렇긴 하지만 어떤 쪽으로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좋지 않은 쪽으로 변화하게 되면 그걸 발전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떤 쪽으로 어떻게 발전시키는 것 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를 해본 것이에요.
첫 번째 제가 제시한 것이 뭐냐하면 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죠. 시는 언어예술이고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에요. 그래서 전달을 무시한 시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좋은 시겠는가. 어떤 분들은 그래요. 시 쓰는 것을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으로 생각해서 자기가 쏟아내고 싶은 것들을 마음대로 쏟아내면서 울적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멋대로 토해내는 시도를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겠죠. 그러나 만일 나 혼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썼다고 하면, 조용히 혼자 읽고 말 일이지 그런 것을 활자화해서 세상에 내보내서는 안된다 이거에요. 그래서 세상을 혼란시키는 공해물을 쏟아내는 것을 혼자만족을 위해 세상에 내놓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내놓으려면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이 가능한 작품을 써야할 것이 아닌가 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첫 번째 제안이에요.
작품을 써놓고 발표하기 전에 이웃집에 사는 일자무식 노파에게 읽어주면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느냐 물어봤다는 분도 있어요. 그 노파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 그때 발표를 하고, 잘 모르겠다고 하면 고쳐 쓰고 다시 노파한테 읽혀보고 하는 거지요. 그건 또 너무 지나친 경우입니다. 적어도 고등교육을 받는 독자라면 이해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을 써야 할 것이 아닌가. 일자무식의 모든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은 어려워요. 그렇지만 소통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작품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거에요.
두 번째 얘기는 시는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글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시 속에 담긴 내용이나 생각, 느낌이 아름답던지, 아니면 표현이 아름답던지 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작품얘기를 할 때 내용과 형식 얘기를 합니다만 가장 일상적인 것은 내용도 아름답고 형식도 아름답고, 둘 다 아름다우면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러나 그렇게까지 바라진 못할지라도 그 둘 가운데 하나라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를 예술작품이라고 해요. 예술작품이란 뭐냐, 바로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활동, 작용, 이런 것을 예술이라고 해요. 음악이나 예술, 이런 것들이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활동이고 이런 것들을 예술이라고 해요. 시도 예술의 반열에 오르려면 아름다운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아름다움을 담은 그런 작품을 우리가 지향하자 하는 것이 두 번째이고요.
세 번째는 새로운 것이어야 해요. 남이 이미 생각한 것을 내가 반복해서 얘기한다든지, 남이 느끼는 것을 나도 느꼈다고 한다든지, 이미 누군가가 얘기한 것을 모방해서 얘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요. 말하자면 창작품이어야 해요.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이 창작품인데 그게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죠. 모방은 누가 이미 얘기한 것을 흉내낸 것에 불과한 것이니 존재의미가 없는 것이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표현 기법을 내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 내 작품의 존재의미를 갖게 하는 것이죠. 모방하는 시는 쓰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모든 예술작품은 다 그래요. 창조성과 독창성이 중요한 것이죠.
네 번째는 가급적이면 흥겹고 재미있는 글이 되기를 바라는것이죠. 아까도 그랬지만 현대시가 재미없으니까 안 읽는다고 했습니다만, 시의 흥겨운 것은 주로 운율에서 생겨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봐요. 예술 작품 가운데서 가장 흥겨운 예술은 음악이죠. 음악은 바로 리듬 때문에 생겨난 거고, 그래서 우리가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성악이나 노래 같은 훌륭한 가사도 중요한 영향을 주겠습니다만 가사보다는 멜로디에 심취해가지고 음악을 좋아해요. 그래서 어느 음악가가 노래 발표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가는 것이죠. 그런데 시인이 시낭송을 한다고 하면 별로 인기가 없어요. 사실 내용으로 따지면 어떤 가수의 음악가사보다는 시의 내용이 훨씬 더 고급이고 의미가 깊을 텐데 인기가 없는 것은 음악에는 멜로디 흥겨움이 사람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애초에 시도 그런 음악성과 운율 등 음악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던 흥겨운 글이었어요. 그런데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틀이 깨졌다고 하는 것이죠. 정형시의 틀이 뭐냐면 음악을 담기 위한 리듬을 싣기 위한 틀이었던 거에요. 그 리듬이 깨지면서 운율도 소홀히 하게 된 것인데, 그래서 나는 현대시도 흥겨움을 주려고 하면 운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 수많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들을 보면 소월이나 미당이나 목월이나 이런 분들의 시들을 보면 리드미컬한 7·5조라든지 3·4조라든지 운율이 실려있는 그런 작품들을 일반독자들도 좋아해요. 그래서 현대시를 흥겹게 만들기 위해서는 리듬을 어떻게 살려낼까 고민해야 하지요. 리듬에 관한 얘기를 하려면 끝이 없어요.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가 많이 쓰고 있는 7·5조라든지 3·4조라든지 이런 율격을 관심을 가지고 살려보기도 하고, 나는 7·5조보다는 8·5조가 좋다, 나는 5·7조가 좋다던지 이런 것도 시도해보봐야지요. 7·5조라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7·5조가 아니었어요. 신체시와 더불어 일본 쪽에 지니고 있던 율조를 조금 모방한 것이에요.
5·7, 5·5라고 하는 율조를 우리가 끌어다 쓰면서 겨우 한 세기 밖에 안됐는데 7·5조가 마치 고유의 율격인 것처럼 친근하게 쓰고 있어요. 앞으로 우리도 4·8조를 시도해보기도 하고, 다른 율조를 시도해서 그것이 일반 독자들의 성격에 맞아 호응을 하게 된다고 하면 또 새로운 율조 사용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 다음에는 흥겹고 재미있게 라고 했어요. 시에 재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뭔가 하면 나는 스토리, 사건이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에요. 애초에 소설과 시가 이렇게 분화되지 않고 서정시 서사시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극시는 희곡으로 빠져나가고 서사시는 소설 쪽으로 분화되어 다른장르로 발전해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소설은 많은 독자들이 밤을 새워 읽어가는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재미있기 때문인데 소설에 재미가 어디서 나오냐 하면 흥겨운 사건 전개때문에 그렇단 말이에요. 그래서 소설이 지니고 있는 사건 이런 걸 서정시에서도 다시 끌어들일 수 없는가. 소설처럼 장황하게 말이죠. 그렇게 사건을 우리 서정시 속에 끌어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짤막짤막한 그런 사태 재미있는 정황 이런 것을 끌어들일 순 없을 것인가. 그런 것이 이제 내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그래서 내 시는 운율에 대해서도 한 번 관심을 가지고서 율연작시를 세 번째 시집 이후 쭉 시도를 해서 써보고 지금까지도 리드미컬한 작품을 써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고 서사성을 중요시 여겨 실험적인 시도 써봤어요.
내 시는 전통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쓰기도 하고, 어느 사건을 소재로 해서 쓰기도 합니다. 이야기시의 묶음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고 선시를 시도해서 써보기도 했어요. 선시는 신선 세계 이야기죠. 우리 전통적인 사상 가운데 신선사상이에요. 우리 조상들이 꿈꿨던 유토피아 이상적인 세계죠. 신선세계는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됐으면 하는 바람 세계인데 그런 세계가 어떤 세계겠어요. 첫 번째로 죽지않고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세계를 꿈꿨어요. 또 하나 뭐냐면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것,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 공중에 날아가는 새를 보고 나도 한 번 날아봤으면 하고 꿈꿨을 것이라는 거죠. 요새는 과학의 힘에 의해 비행기를 만들어 새보다 멀리 갑니다만 그때는 어떻게 공중을 날 것인가 하여 만들어낸 것이 도술이죠. 공중을 날기도 하고, 축지법을 해서 천리를 한 번에 뛰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어떻게 하면 음식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에 조그만한 환약 하나 먹으면 수십 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는 꿈을 옛날 선조들이 가졌어요. 그런 것들이 신선사상이에요. 근래에 와 현실의 제약을 극복해서 이상적인 세계를 꿈꿔보려고 하는 신선사상은 이걸 내가 다시 살려낼 수 없을까 해서 선시연작을 썼어요.
‘구름 위의 다락마을’이라는 시는 화자가 어떻게 해서 구름 위에 있는 신선세계에 올라가 여러 가지 정황을 글로 쓴 겁니다. 내가 요새 꿈꾸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어 낸 거에요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런 세계가 있었으면 하고 만들어낸 거에요. 김춘수 시인이 지향했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데 그건 비논리적인 세계에요. 내가 지향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세상 얘기에요. 해서 그런 시도까지도 내가 한 번 해봤는데 참고로 말씀 드렸고요. 여러분도 시에 재미를 붙이기 위해서는 리듬과 스토리가 있는 어떤 사건에도 관심을 가지고 시 속에 한 번 담아보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얼마 전에 쓴 「홍어회」라는 시를 한 번 읊조려 볼 테니 들어보세요.
여줏麗州들 봇미나리 다발로 져다
물 좋은 흑산 홍어 얼큰히 무쳐
됫소주 홀짝이며 생각하네
갯가로 가리 까짓것 갯가로 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남쪽 갯가로
보리술 솥뚜껑에 쏘는 불소주
둬 평 미나리꽝에 발을 담그고
푸른 산 푸른 바다 불타는 노을
돛단배 더딘 소식 애도 태우리-
중얼거리는 거니까 잘 와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내용이 비옥한 여주뜰에서 난 봇 도랑에 난 미나리 온실에서 자란 미나리 많이 만듭니다. 그런 미나리가 아니고 돌미나리를 다발로 푸짐하게 쳐다가 물좋은 흑산홍어 싱싱한 홍어 고추장에 말이야, 매운 고추장에 얼큰히 무쳐서 됫소주 놓고 홀짝이면서 생각하는 것이죠.
갯가로 가리 까짓것 갯가로 가리.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건 뭐냐면 어떻게 하면 남보다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남보다 높이 올라갈까 이런 쓸데없는 명예와 물질적인 욕심 이런 걸로 쭉 살아왔어요. 내가 마음이 팔려가지고 이렇게 살았구나 까짓것 때려치고 갯가로 가리, 어디 갯가로 가면 겨울에도 얼지 않는 따뜻한 남쪽 갯가 내 고향이 남쪽이니 남쪽에 대한 향수가 있어요. 따뜻한 남쪽에 보리 술 솥뚜껑에 쏘는 불소주 이건 여러분들 잘 이해가 안갈 수도 있어요. 예전에 쌀이 흔하지 않았을땐 보리를 많이 길러가지고 어려우니까 보리 가지고 보리술을 담갔어요. 소주를 만드는데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큰 가마솥에 술을 집어넣고 불을 때면 수중기가 올라오고 뒤집어가지고 딱 엎어. 그러면 손잡이가 밑으로 들어가겠죠. 손잡이 밑에 그릇을 대고 불을 때고 찬물을 부어서 솥뚜껑을 잡고 식히면 올라온 수증기가 솥뚜껑에 엉켜서 손잡이를 통해서 물을 떨어뜨리죠. 그게 재래식 소주 만드는 방법인데 그 소주가 아주 독해요. 그래서 불소주라고. 보리술 솥뚜껑에 쏘는 불소주 소주 만드는 방법 그런 게 들어가 있는 건데. 나는 그런 걸 체험했기 때문에 이제 소주가 준비가 됐죠? 두어 평 미나리꽝에 회를 안주를 먹을 심산이죠. 발을 담그고 있는데 그 주위 풍경이 푸른 산 푸른 바다 불타는 노을 마치 석양에 가까워지는 노을, 이런데 아직도 고기 잡으러 간 배가 안 온단 말이야. 그러니 안달이 난단 말이죠. 돛단배 더딘 소식에 애도 태우는데, 기다리는 맛도 괜찮아 이게 시평으로 된 말이죠 이것도 짧은 스토리를 담고 있어요. 시 속에 스토리를 집어넣으면 독자들도 오래 기억을 할 수 있어요. 재미가 있거든.
이건 또 7·5조 가락에 의해서 쓴 얘기이고요.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섯째는 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에요. 시가 흥겹고 재미만 있으면 안 되지요. 시 속에 알맹이가 담겨 있어야 해요. 좋은 영화를 보면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 것처럼 좋은 시는 여운으로 남아서 우리의 정신적인 영양소가 되지요. 우리를 힐링시키고 우리가 좋은 과일을 먹으면 맛도 있지만 먹고난 뒤에 과일 속에 담겨져 있는 영양소가 우리 몸에 좋은 역할을 하죠. 우리 몸에 이롭단 말이에요. 그런 것처럼 좋은 시도 재밌고 흥미있고 하지만 우리가 읽은 뒤에 정신적인 영양소로 작용하기 위한 요소를 담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 여섯 번째 시는 시정신이 담긴 글이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시정신은 시 속에 담긴 시정신이라고 쉽게 얘기할 수 있겠죠. 시 작품 속에 담긴 정신이 시정신이다 라고 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체가 하는 일이 도대체 뭔가 동물들 식물들이라든지 생명체가 하는 역할을 나는 어떻게 정의하냐면 객체의 주체화 작용이라고 나는 세계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얘기인가 하면 생명체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 몸 밖에 있는 세계의 것들을 끌어다가 자기 몸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그런 작용을 끊임없이 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것으로 먹는 것 호흡하는 것들 끌어들여서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는 일을 보면 우리가 분명 알 수 있어요. 잎으로는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고 공기 중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끌어들이고 뿌리로는 땅 속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끌어들이고 자기가 필요한 것들을 끌어들여가지고 몸뚱이를 키워가는 것이죠 세계의 자아화,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죠.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눈이 있고 귀가 있고 하는 건 왜 이런 감각기관이 있는가. 내가 필요한 것이 어디있는가에 대한 탐색하기 위한 레이더를 위한 장치에요. 식물 같은 건 움직일 수 없으니 눈 같은 것도 필요 없고 한자리에서 그렇게 하고 있지만 동물들은 감각기관이 있어 필요한 걸 섭취한단 말이에요. 인간이 어떻게 하면 물질을 많이 끌어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느냐, 어떻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내사람으로 만들까, 다른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욕구들이 사실 따지고 보면 자기 확대의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언어를 만들어서 언어를 사용하는것도 그런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의사소통한다, 그래서 내 의사를 상대방에게 알리고 또 상대방의 의사를 파악해서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자기를 늘리려고 하는 욕구 때문에 그래요. 글을 쓰는 것도 그 욕구에 대한 발현이라고 할 수 있죠.
글을 써서 세상을 설득해 봐야겠다 내 사람을 많이 만들어 봐야겠다. 이런 욕구 때문에 글을 쓰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인간은 참 묘한 동물입니다. 많이 가지겠다고 하는 욕구, 세속적 동물적인 욕구가 있는 대신에 또 그런 욕구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도 없지 않아 있어요. 무슨 얘기냐 하면 다른 동물에게는 볼 수 없는데 옆 사람에게 내가 잘못하면 안되겠구나 옆사람도 인정해줘야겠다 하는 선을 지향하는 그런 배려심이 인간에게는 있어요. 거짓말해서는 안되겠구나. 진실을 지향해야 되겠구나. 숨겨서는 안되겠구나. 가치있게 생각하려고 하는,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가치를 부여하는, 그런 가치관이 있어요. 그리고 또 한 번 마음을 결심을 했으면 꾸준하게 밀고 가야한다라는 절개, 지조라든지, 맑고 깨끗한 염결이라든지, 자연 속에 들어가서 조용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구라든지, 이런 동물하고는 다른 고급 동물적인 본능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에게는 있어요. 선비들이 그랬어요. 물질적인 동물적인 그런 욕망과는 달리 그런 것을 넘어서보고자 하는 초월적인 욕망을 나는 선비정신이라고 해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는 시를 읽어보면 시 속에 담겨져있는 그 정신이 선비정신하고 통해요.
그래서 바람직한 시정신은 바로 선비정신이다. 동물적인 세속적인 욕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선비정신이 바람직한 시정신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 선조들이 지녔던 선비정신을 시정신의 핵심으로 삼아서 발전시킨다고 하면 세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에요.
시는 단순히 좋은 시는 좋은 정신 밑에서 생겨난다. 그러니까 좋은 시가 되려면 사람의 바탕이 갖추어져야 한다. 인격수양이 언어를 잘 다루는 기교적인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해서 여섯가지를 제가 제시를 했어요.
소통이 되는 시, 아름다움을 지닌 시, 새로움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시,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 그리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선비사상이 시정신의 핵심이 되어있는 시, 이 여섯 가지를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의 바탕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우리 지금 싫어하는 수많은 독자들도 시가 참 재미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가 마음을 힐링 시켜주는좋은 작품이구나 하고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많이 돌아오지 않을까. 내 욕심은 그래요. 그런 감동적인 시를 많이 쓰기만 한다고 하면 이걸 세계화시킬 수는 없을까. 요새 한국 팝송들 k-pop이 얼마나 세계를 뒤흔들고 있어요. 그런 걸 보면 우리시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감동적이고 좋은 시를 쓰면 세계 곳곳에 한국시를 많이 수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시의 독자를 많이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조그마한 땅에서 시 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넓은 세상 세계 전체를 바라보면서 세계 전체가 감동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꿈을 가지기 바랍니다. 그런 일을 할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임보 1962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8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시 운율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62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시단에 등단함. 시집에 『임보의 시들 <59-74>』, 『산방동동山房動動』, 『목마일기』, 『은수달 사냥』, 『황소의 뿔』, 『날아가는 은빛 연못』, 『겨울, 하늘소의 춤』, 『구름 위의 다락마을』, 『운주천불』,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 『자연학교』, 『장닭설법』, 『가시연꽃』, 『눈부신 귀향』, 『아내의 전성시대』, 『자운영꽃밭』, 『검은등뻐꾸기의 울음』,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 등이 있음. 시론집에『한국현대시 운율 구조론』, 『엄살의 시학』, 『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 『시와 시인을 위하여』, 『좋은 시 깊이 읽기』 등이 있음. 상화시인상, 성균문학 대상, 시와 시학 작품상, 윤동주문학상, 김현승문학상 등을 수상함. 충북대학교 국문과 교수 정년퇴임. 월간 《우리詩》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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